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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동순 Jan 24. 2023

[수줍은 사찰 산책] 검은 지장보살 네로

도선사와 지장보살

  수줍습니다.

  그래서인지 평소 쎈 캐릭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뭐랄까, 쉽게 주눅 든달까요. 심신 박약한 저로서는 강하고 억세 보이는 상대는 늘 부담스럽습니다. 그래서인지, 가장 다가가기 힘든 불상이 지장보살이었습니다. 물론, 겉모습만 보고 그리 판단한 것입니다.

  지장보살은 쎈 캐릭터답게 개성도 강합니다. 빡빡머리에 승려복을 입고, 한 손에는 커다란 지팡이를 짚고, 다른 손엔 커다란 구슬을 들고 있으면 백퍼 지장보살입니다. 얼핏 보면, 생김새가 어째 법정스님 닮은 듯도 합니다.

  지장보살은 제가 아는 보살 중 임무가 가장 분명하고 막중합니다. 바로,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원’하는 일을 합니다. 그가 든 지팡이는 지옥문을 깨뜨린다는 ‘육환장’이오, 다른 한 손에 든 구슬은 어둠을 밝히는 ‘장상명주’라고 합니다. 나락의 끝에서 누군가를 구해낸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일까요. 남을 위해 제 발로 지옥문을 드나드는 그 심정은 어떨까요. 그런 일을 하는 분이, 한가하고 유연해 보인다면 그것 또한 못 볼 꼴일 듯합니다.

  또한, 지장보살은 ‘부처’가 되기를 무기한 연기하신 분이라고도 합니다. 불교의 ‘극락 대기소’라고 할 수 있는 ‘도솔천’에 들기를 거부하고, 중생의 땅에서 중생과 함께 중생을 위해 살아가는 분이라고 합니다. ‘고타마 존자’가 과거불이고, ‘미륵불’이 미래불이라면, ‘지장보살’은 현재불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사실, 지장보살의 숭고함도 숭고함이지만 이런 촘촘한 캐릭터의 얼개가 정말 매력적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2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질 수 있겠지요. 매력이 곧 생명력입니다.

  작년 읽은 책 중 참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 한 권 있었습니다. ‘입보리행론’이라는 책인데요. 그중 ‘보리심’이란 개념이 쉽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으로 널리 중생을 교화시키려는 마음을 ‘보리심’이라고 한답니다. 이해 못 할 글자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의 깨달음에 머물지 말고 남을 구원하라는 메시지가 쉽게 와닿지 않았습니다. 제 코가 석자인데, 나라도 깨달으면 됐지 왜 남까지 신경 쓰나 싶었습니다. 그것도 단순한 ‘사명감’이 아닌, ‘불에 덴 듯’ 절박하게 행해야 한다는 게 불가능한 숙제 같았습니다. 어찌하면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사람이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이해를 못 하겠다면 적확한 예라도 찾고 싶어서, 한동안 산책길의 스무고개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어떤 소설의 설정에서 겨우 제 딴에는 끄덕일만한 예를 찾았습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소설 있잖아요. 어느 날 갑자기, 저만 쏙 빼놓고 세상 모두가 장님이 되어버린다는 상상을 해봅니다. 그렇다면, 저는 홀로 눈뜸에 만족하고 살아야 할까요. 아닐 겁니다. 어떻게든, 눈먼 자들이 위험한 곳으로 향하지 않게 하기 위해 안간힘을 쓸 것입니다. 코 앞에 수도꼭지도 찾지 못해 목말라하는 자들에게 물컵을 쥐어줄 것입니다. 누구라도 그럴 겁니다. 그리고 그건 결국, 제 살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베푸는 것이 자신에게 좋다’는 달라이라마의 말을 이제 조금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어쩌면, 사람은 모두 누군가의 ‘지장보살’이 될 수 있습니다. 험한 시절, 험한 상황에서 누군가를 위해 ‘불에 덴 듯’ 뛰어든 시대의 지장보살님들께 새삼 감사함을 전하고 싶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 원래 쓰려했던 건 이게 아니었는데, 쓸데없이 길어졌습니다. 단지, 도선사 검은 지장보살상에서 우연히 만난 검정고양이를 가볍게 이야기해 보려 했습니다. 그래서, 제목도 ‘검정 지장보살 네로’라 지었지요. 그저, 지장보살과 깜장 깔맞춤에 참선하듯 앉아있는 고양이가 참 예뻤다는 얘기를 사진자랑과 함께 하고팠는데, 새벽에 쓰면 이게 참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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