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미루어 오던 집 청소를 했다. 언제 저렇게 쌓였는지 눈에 보이지도 않던 먼지는 어느덧 몸집을 불려 집 구석구석 자리를 잡았다. 보이지 않으면 그만이겠으나, 눈에 보이는 건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성미인지라… 눈에, 맨발바닥에 밟히는 먼지가 싫어서라도 무거운 몸을 일으켜 청소기를 잡는다.
구석구석 청소를 하다 보면 잃어버린 물건을 찾기도 하고, 예전에 썼던 일기장과 편지를 발견하기도 한다. 잠시 쉴 겸 하나씩 들춰 보면 잠시나마 추억 여행을 떠난다. 기왕 시작된 추억 여행이 아쉬워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첩도 뒤적여 본다. 언제 이렇게 많이 찍었나, 싶을 정도로 방대한 사진의 양에 기가 꺾이지만 하나둘 옛 사진을 정리하다 보면 언제 시작된 줄도 모르고 나는 추억 속을 헤매고 있다.
집을 청소하고, 오래된 사진첩을 갈무리하듯, 마음에도 청소가 필요한 것일까. 눈에 보이지도 않던 작은 감정들이 소복이 쌓여 가는가 싶더니, 어느덧 데굴데굴 마음 곳곳을 굴러다닐 정도가 되었다. 덩어리째 굴러다니는 작은 감정들로 마음속은 늘 소란스럽다. 콕콕 마음 한 구석을 찔러대기도 하고, 쿵쿵거리며 소음을 일으키기도 한다. 눈에 거슬려 다가가면 눈치 빠른 감정들은 잰걸음으로 바삐 침대 아래로, 옷장 뒤로 숨어버린다. 체념하고 돌아서면 어느새 더 큰 덩어리로 나타나 마음속을 제멋대로 돌아다닌다.
△ 위 이미지는 Google 이미지에서 검색, 차용하였습니다.
나는 요즘 심한 감정 기복에 시달리고 있다. 난생 처음 겪는 우울감에 당황스러운 날들이 하루 이틀 늘어갔다. 잘 생각해 보면 예전에도 우울하고, 기복을 겪는 순간들이 있었으나 그 기간이 길지 않았고, 주변에 고민을 털어놓을 사람이 많았으며, 타고난 성격으로 인해 지나고 나면 그저 ‘다 좋은 추억이지.’라며 미화해 버리지 않았나 싶다.
비로소 인식하고 직면하게 된 우울감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요즘. 나는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안 그럴 줄 알았던 내가 어느 순간부터 “나 때는…”, “옛날엔 내가…” 하고, 옛날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내가 지금에 만족하고 있지 못하단 사실을, 내가 과거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과거의 내가 쌓여서 지금의 내가 되었겠으나, 엄밀하게 말하면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과거의 내가 어떠했든 지금의 나는 그냥 지금의 나일 뿐이다. 주민등록번호와 지문, 혈액형, 이름 정도를 제외하면 사회적 위치나, 성격, 생각과 가치관, 심지어 생김새까지 모든 것이 다르다. 이 정도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 봐야 하지 않을까. 거의 동명이인 수준으로.
어쨌든 지금의 나는 우울감에 사로잡혀 보내는 시간이 많다. 어쩐지 울적하고, 종종 외롭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조용히 떠나고 싶다가도, 왁자지껄한 인파 속에 아무렇게나 어울려 춤추고 노래하고 싶다. 어떨 땐 손에 쥔 모래처럼 서서히 사라지고 싶다가도, 핀 조명이 비추는 무대 위에 서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싶다. 말하고 싶다. 또 침묵하고 싶다. 가만히 있고 싶으면서도, 무언가 하고 싶다. 양립할 수 없는 바람들은 나를 괴롭게 한다. 모순적인 바람들의 뿌리를 따라가다 보면 아주 작지만, 분명한 바람이 있다. 그것은 바로 행복이다. 그래, 나는 그냥 행복하고 싶은 거다.
지금 학교에서 가르치는 작품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나는 ‘나’를 허투루 간수했다가 ‘나’를 잃은 사람이다. 어렸을 때는 과거 시험을 좋게 여겨 그 공부에 빠져 있었던 것이 10년이다. 마침내 조정의 벼슬아치가 되어 사모관대에 비단 도포를 입고 백주 도로를 미친 듯 바쁘게 돌아다니며 12년을 보냈다. 그러다 갑자기 상황이 바뀌어 친척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한강을 건너고 문경새재를 넘어 아득한 바닷가 대나무 숲이 있는 곳에 이르러서야 멈추게 되었다. 이때 ‘나’도 땀을 흘리고 숨을 몰아쉬며 허둥지둥 내 발뒤꿈치를 쫓아 함께 이곳에 오게 되었다. … 그래서 ‘나’를 붙잡아 함께 머무르게 되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한문 수필, ‘수오재기(守吾齋記)’의 내용 중 일부이다. 딱 내가 저 때 다산 선생의 상황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담당 학급과 함께 교무실 자리가 바뀌면서 정말 귀양(?)살이를 하게 되기도 했고…. 나는 너무 바쁘고 정신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나’를 돌보지 못했다. 신경 써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공부도 해야 했고, 결혼도 해야 했다. 집도 사야 했고, 차도 고쳐야 했다. 일도 해야 했고, 사랑도 해야 했다. 짬짬이 친구들도 만나야 했고, 주변의 이목에 나를 맞춰야 했다. 신경 쓸 일이 많다 보니, 자연 ‘나’를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당연히 ‘나’를 돌아보는 방법도 잘 모른다. 하지만 서툴더라도 이제는 내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나’와 많은 대화를 나눠 볼 생각이다.
‘내’가 철이 없어 말도 안 되는 떼를 쓴다면 잘 달랠 것이고, 미처 몰랐던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경청하고 ‘나’의 아픔을 보듬어 줄 것이다. 부탁을 한다면 생각해 본 뒤 부탁을 들어줄 것이고, 가끔은 잠만 자는 ‘나’를 깨워 밖으로 데리고 나갈 것이다. 협상이 필요하면 흥정을 할 것이고, 토의가 필요하다면 충분히 의견을 나눈 뒤 최선의 방안을 이끌어낼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는 나의 행복을 위해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것. 나는 내 몫만큼의 행복이란 손에 쥐려 하면 할수록 멀어지는 것이고, 자연스레 삶 근처에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저 겸허하게 기다리면 행복이 먼저 다가와 손을 내밀 것이라고, 그 외의 것은 내 것이 아니라고, 그렇게 여기며 살아왔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행복해지려면 노력을 해야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었다. 내 몫만큼의 행복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행복의 크기엔 제한이 없었다. 나는 마음먹은 만큼, 노력하는 만큼 행복해질 수도 불행해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부터 행복해지기 위한 노력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첫 번째 단계는 생각날 때마다 마음속 청소기를 돌리는 일이다. 구석구석 숨어있는 감정의 조각들을 찾아내어 잘 들여다보고, 기꺼이 내다 버리는 것. 이것이 내가 나를 찾고, 행복해지기 위한 첫 번째 작업이다.
나는 구석구석 숨어있던 ‘나’를 찾을 것이다. 나를 찾아 이야기를 나누고,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바라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해 긴긴 대화를 나눌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청소가 끝나는 날, 깨끗해진 집을 둘러보듯 나는 행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