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 1]
서울 홍은동 문화촌에 산 적 있다. 내가 다섯 살 때였으니까 대충 35년 전 이야기되겠다. 엄마, 아빠, 동생 그리고 나. 이렇게 우리 네 가족은 문화촌 산꼭대기에 있는 단독주택에 살았다. 대지 면적이 30평 남짓 됐을까. 건물 면적은 20평 정도. 원래 작은할아버지가 살던 집이었는데 아빠한테 싸게 팔았다고 했다. 얼마나 싸게 샀는지 3백만 원도 안 줬단다. 히야~ 요즘 같으면 상상할 수도 없는 횡재 아닌가. 어린 나에게 그 집은 동네 아이들과 뛰어놀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컸다.
그렇게 생각했다. 내 기억 속의 첫 번째 우리 집. 단란했던 우리 집. 물론 문화촌으로 이사 오기까지 세 번의 집을 더 거쳐야 했지만 그때는 너무 어려서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래서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집은 문화촌이다.
마당이 꽤 컸다. 꽃밭도 두 개나 있었다. 마당 양쪽에 각각 하나 씩. 그 꽃밭에는 사철나무, 장미나무, 앵두나무, 라일락 나무가 있었다. 봄이 되면 동요 가사처럼 채송화, 봉선화, 나팔꽃도 피었다. 샤방샤방한 나비들도 많이 모였다. 꽃밭 너머로는 서울 시내 전경이 내려다 보였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서울의 그윽한 밤, 찬란한 불빛이. 손님들이 올 때마다 전망 하나는 끝내주는 집이라고 감탄했다. 그때는 하늘에 별도 빛났다. 고개를 들면 바로 내 머리 위에 별이 빛나고 있었다. 나를 비추는 듯 반짝였다.
그래, 난 그렇게 멋진 집에 살았는데......
잠시 잊고 있던 그 집이 다시 생각난 건 당숙 아저씨 때문이다. 지난해 할머니 팔순잔치 때 만난 당숙 아저씨가 - 아빠에게 집을 판 작은할아버지의 아들, 난 태호 삼촌이라고 불렀다 - 내게 그 집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자기가 얼마 전에 인왕산에 갔다가 문화촌 옛집이 생각나 그곳에 가봤다는 거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그 집이 그대로 있었다고 했다. 이미 주변은 다 재개발돼서 말끔한 집과 아파트가 들어섰는데 그 집만 덩그러니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는 게 아닌가. 대문 앞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단다. '주의! 무너질 위험이 있는 집'
빵 터졌다. 어쩜 이렇게도 생명력이 강한 놈을 봤나. 마치 그 집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내가 자기를 가끔씩 추억하고 있는 걸 알고 있었을까. 당숙 아저씨에게 그 얘기를 듣는데 미치도록 옛집이 그리웠다. 보고 싶었다. 궁금했다. 다시 만나고 싶었다. 다시 살고 싶었다. 무너질 위험이 있다는데 지난 태풍에 그 집은 무사할까. 갑자기 걱정이 앞섰다. 날 좋은 날 예쁘게, 그 집을 찾아가야겠다. 그때까지 제발 살아만 있어다오. 무너지지 말고.
난 문화촌 집에서 가장 행복했다. 지금까지는 그렇다. 앞으로 내가 어떤 집에서 누구와 함께 어떻게 살지 모르겠지만 그때 그 시절에 살던 집만큼 나를 편안하게 행복하게 만드는 집은 아직 없었다. 왜냐면, 왜냐하면, 그 집에서 우리 가족은 모두 웃었으니까, 웃으며 모여 살았으니까. 그랬던 게 그때가 마지막이었으니까.
요 며칠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문화촌 집이 기억에, 꿈에 아른거렸다. 좀 전에 한 말도 쉽게 잊어버릴 만큼 저질 기억력인데도 이상하리만치 문화촌 집은 생생했다. 마치 지금도 살고 있는 집처럼. 마당 한 귀퉁이에 있던 거미줄도 기억난다. 거미에 대한 추억도 없는데, 왜지? 나도 모르겠다. 첫사랑 얼굴도 가물가물 잊힐 판인데, 한낱 거미줄 따위가 내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다니. 그 집이 나를 찾고 있음을, 나를 부르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가야 했다. 가야만 했다. 자는 엄마를 흔들어 깨웠다.
엄마, 내일 문화촌에 가보자.
거긴 왜?
그냥, 그냥 보고 싶어......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집을 나섰다. 지하철을 타고 홍제역에 내렸다. 두근두근... 헉! 여기 맞아? 진짜 맞아? 조금 걸어내려가니 이 동네 랜드마크 유진상가가 보였다. 그동안 페인트 덧칠을 많이 한 듯 보였다. 40년 이상 오래된 건물이라는 걸 잘 감춰놨다. 재개발 소식을 들었는데 아직 헐리진 않은 모양이다. 내가 살던 집은 홍제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10분 정도 더 가야 했다. 홍은초등학교 앞에 내렸다. 아, 내가 다니던 학교다!
안녕? 난 6학년 4월까지 여기 다녔었는데... 나 기억하니?
일요일이라서 문은 닫혀있었지만 운동장은 훤히 보였다. 꼬마 은주가 신발주머니를 멀리 던지고 있었다. 어느 남자아이와 함께.
이얏! 내가 더 멀리 던졌다. 으하하핫!
내기에 진 남자아이는 절망한 척 연기하며 내 뒤를 따랐다. 내 신발주머니를 들고서. 난 안다. 그 아이가 일부러 져준 걸. 신발주머니가 무겁다고 하면 그 애는 항상 그런 내기를 제안했고 나한테 항상 져줬다. 나중에는 책가방도 던졌다. 물론 딱 한 번이다. 필통에 담긴 연필심이 다 깨져서 엄마한테 혼나고 밤새 연필을 깎은 뒤부터 난 절대 책가방은 던지지 않았다.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그렇다.
홍제천 다리를 건넜다. 빨간 벽돌로 지은 빨간 집들이 다닥다닥 어깨를 붙이고 비좁게 모여있었다. 같은 모양, 같은 색깔. 그래도 옛날 촌티를 벗은 모습이 대견했다. 울퉁불퉁하던 골목길도 시멘트로 제법 잘 닦여있었다. 하지만 경사는 여전했다. 원래 산꼭대기에 자리한 집들이니까 그것 만큼은 불평할 수 없었다. 이곳에 살기로 한 이상 말이다. 그래도 어린 나에게 이 길은 고문이었다. 나처럼 게으른 아이가 어떻게 이 길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살았을까. 하루에 한 번 학교 갈 때만 내려가리라, 다짐했었다. 하지만 엄마가 시장에 가자고 하면 난 파란색 장바구니를 들고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갓 튀겨낸 오뎅을 사 먹는 재미에. 시장 중간쯤 전봇대가 있는 자리에 오뎅을 즉석에서 튀겨 파는 할머니가 있었다. 길쭉한 오뎅 하나 종이에 싸서 입에 물고 엄마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장을 봤다. 그때는 시장에서 닭을 잡는 것도 하나의 볼거리였다. 닭장마다 닭이 가득했다. 손님들은 살아있는 닭을 직접 골랐다.
저기, 저기 위에 밤색 애로 주세요
얘요?
아니, 그 옆에 눈 부리부리한 애 있잖아
그렇게 간택(?)받은 놈은 죽어라 꽥꽥 소리 질렀다. 오늘이 자기 제삿날인 걸 아는 울음이다. 먼저 그놈은 털을 뽑히는 형벌을 받았다. 어떤 큰 통에 들어가더니, 퉁탕퉁탕 벽에 부딪치는 소리가 막 나더니 이내 알몸으로 나왔다. 오 마이 갓! 주인아저씨는 그놈 모가지를 쥐고 도마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칼을 들었다. 난 그 순간에 고개를 돌렸다. 닭 모가지가 날아가는 순간 내 목도 날아가는 것처럼 얼굴을 찡그리며 괴로워했다. 우리도 그 집에서 종종 닭을 샀다. 그 이후 나는 닭을 사는 날에는 엄마를 따라나서지 않았다. 오뎅을 사준다고 해도, 두 개 준다고 꼬셔도 못 들은 척했다. 인간이 잔인하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다.
이런저런 추억들이 나를 산꼭대기 옛집으로 안내했다. 여긴가? 저긴가? 엄마 도움이 필요했다. 너무 많이 바뀌어서 내 기억으로는 찾기 힘들었다. 엄마가 앞장섰다. 우리 가족이 살던 옛날 문화촌 집을 향해서.
길은 미로 같았다. 다리가 아팠다. 운동 부족인가. 운동화를 신고 오길 잘했지. 또 한 번 생각했다. 홍제천 다리에서 산꼭대기까지 그 옛길 실루엣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구비구비 골짜기처럼 푹 파였던 골목길과 무수히 많은 계단들은 평평하게 잘 닦여져서 이젠 차도 다닐 수 있어 보였다. 정말 모든 게 바뀌었다. 삐까뻔쩍 - 과거에 비하면 말이다 - 새롭게 지은 단독주택, 빌라가 보란 듯이 들어섰다. 순간 어디가 어딘지, 제대로 가고 있는 게 맞는지, 내가 살던 동네가 맞는지 헷갈렸다. 엉뚱한 골목으로 들어서려던 순간, 엄마가 나를 불렀다.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나는 엄마를 놓치지 않고 따라갔다.
은주야, 여긴 거 같은데?
어디? 여기? 이 골목?
쿵......!!!
거기 있었다. 내가 살던 집. 내가 그리워하던 그 집이 거기 우두커니 서 있었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마치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네처럼 초라하게 멍하니 거기 서 있었다. 뭐야, 이 바보! 왜 너만 그대로야? 다 변했는데, 왜 너만 초라하게 남아있는 거야!! 순간 원망했고, 이내 측은했다. 낡은 담벼락을 쓰다듬었다. 애썼다. 고생했다. 대견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느라. 그동안의 눈물겨운 삶이 그대로 보였다. 초록색 대문은 페인트 칠이 다 벗겨져 붉게 녹슬어 있었다. 서울시에서 받은 도로명 주소가 깨끗하게 붙어있어 상대적으로 더 초라해 보였다. 탄력을 잃은 회색 담장은 힘센 장정이 달려들면 그냥 무너질 것처럼 부실해 보였고 여기저기 금도 쩍쩍 많이 갔다. 쯧쯧쯧...... 누가 살고 있을까. 문패를 찾아보니 없다. 사람이 안 사나? 집 안이 궁금했다. 대문 틈으로 들여다봤다. 잘 보이지 않았다. 벽을 잡고 까치발을 들었다. 아, 툇마루가 그대로 있네? 그래, 거기서 난 뭐든지 다 했었는데...... 인형놀이도, 공기놀이도, 일일 공부도, 숙제도, 낮잠도, 엄마가 만들어준 부침개도 먹고, 옆집 아이도 돌봤는데...... 내가 좋아하던 나무들은 사라졌다. 꽃밭이 통째로 없어졌는지 안보였다. 장독대는 창고처럼 변해있었고, 붉은 기와가 자랑이던 지붕은 천막으로 뒤덮여 볼 수 없었다. 비가 새나? 천막이 날아가지 말라고 폐타이어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어린 나는 이가 빠지면 항상 지붕 위에 힘껏 던졌다. 새 이 달라고 정성껏 빌었다. 어른이 된 지금, 내 이가 가지런히 난 것도 그때 썩은 이를 멋지게 잘 던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까치가 물어가 새 이를 준다고 엄마가 전설처럼 말하곤 했다. 집 뒷골목 길로 올라갔다. 그쪽도 역시나 번듯하게 길이 잘 닦여서 더 이상 뒷골목 음침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마침 뒷집에 새로 집을 짓고 사는 아저씨가 밖에 나와있었다.
여기 누구 살아요?
안 살아요...
얼마나요?
오래됐어요.. 호구조사 나왔어요?
아뇨.. 35년 전에 여기 살았거든요.
당숙 아저씨가 말했던 것처럼 '주의! 무너질 위험이 있는 집'이라는 푯말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이 말이 불안감을 조성한다고 주민들이 반발해서 뗀 건 아닐까. 주변 집값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겠지. 왜 이 집만 재건축하지 않고 이대로 남아있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자세한 내용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인근 부동산에 물어보고 싶었지만 하필 일요일이라서 문이 닫혔다. 할 수 없이 궁금증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집주인이 더 이상 이 동네에 살고 싶지 않았나? 다른 곳으로 이사 갔겠지? 집이 팔리지도 않았나? 다시 지어 임대라도 할 수 있잖아, 그만큼의 여윳돈은 없었나? 오만 생각이 다 든 끝에 내린 결론은 '돈만 있으면 내가 다시 사고 싶다'였다. 지금 이 집이 흉물스럽게 놓여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고 있지만 나는 안다. 이 집이 얼마나 볕이 따뜻한지, 얼마나 바람소리가 시원하고 아름다운지, 별을 헤아리는 낭만이 얼마나 큰지 나는 안다. 나는 아주 잘 안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엄마에게 뜬금없이 고백했다. 문화촌 집에 살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만약 그때 우리 가족이 아파트로 이사 간다고, 잠실 8학군으로 간다고 이사하지 않았더라면, 문화촌에 그대로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엄마는 손에 쥔 묵주 알을 굴리면서 아무 말이 없었다. 아니, 쓴웃음을 지었다. 그곳에서 난 돈이 없어도 행복했다. 내가 가난한 집 아이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지금 우리는 그 시절보다 조금 더 나은 환경에 살고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렇게 됐을까. 왜 서로 등지면서 흩어져 사는 걸까. 그래, 어쩌면 내가 되찾고 싶은 건 '무너질 위험이 있는' 문화촌 옛집이 아닌 듯싶다. 아마도 '무너질 위기에 놓인' 우리 가정, 우리 가족이 아니었을까...... 복잡한 마음에 한숨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