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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진의 낮은숲 May 20. 2019

비겁한 즐거움?

[에세이 - 4]

세상 남자들은 모든 여자를 남몰래 지켜보는 데서 묘한 쾌감을 느끼는 걸까.




이상한 경험은 대학시절부터 시작됐다.

대학교 2학년 때였나... 기억이 맞다면 분명 그렇다.

졸업한 지 20년이 넘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아마도 그때쯤이었던 것 같다.

매일 저녁 9시만 되면 어김없이 낯선 남자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처음엔 아무 말 없이 내 목소리만 듣고 있었다.

내가 전화를 먼저 끊기 전까지 그는 전화기를 들고 있었다.

그렇게 2주가 흘렀나... 그 남자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어렵게 용기를 낸 목소리. 순수한 소년의 목소리 같은, 침착하고 따뜻한... 그래서 쏘아붙일 수가 없었다.

난 본능적으로 느꼈다. 내게 해코지할 사람은 아니라는 걸.


누구세요?


그는 자기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다만, 같은 대학에 다니는 학생이라는 사실만 말했다. 이름도, 나이도, 전공도 모두 밝히지 않았다. 그리고 내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을 지켜보고 있어요
당신은 '샴푸의 요정' 같아요


Oh my God ;;;


그러고는 그날그날 몰래 바라본 내 모습에 대해 브리핑을 시작했다.

오늘 입은 옷은 예뻤다, 바지보다 치마가 더 잘 어울린다, 머리는 길게 풀어라, 머리를 쓸어 넘기는 모습이 좋다, 키가 큰데 하이힐은 왜 신냐, 전공 서적이 무거워 보여서 들어주고 싶었다...


헐!


그는 마치 애인처럼 간섭했다. 잔소리다.  

치, 무슨 상관이람... 그때부터 나는 주변을 심하게 의식다.


혹시 이 사람인가?

아니, 저 사람인가?

아냐 아냐, 저기 저 사람 같은데...


한마디로 노이로제 걸릴 지경이었다.

그래서 나는 고민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그를 잘 떼어낼 수 있을까. 고심 끝에 반짝 떠오른 묘안은 '만나자'였다.


당신은 내게 환상을 갖고 있어요
우리 만나서 얘기할까요?
만나면 환상이 깨질 거예요


그는 환상을 깨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 내 앞에 설 자신도 없다고 했다.


나 외모 안 봐요


이렇게 하얀 거짓말을 해가며 그를 어르고 달랬다. 하지만 그는 끝내 용기를 내지 않았고, 만나자는 말을 무한 반복하는 내게 질렸는지 더 이상 전화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는 나를 계속 지켜보겠다고, 성공하길 바란다고 마지막 응원도 잊지 않았다.


이후에도 한동안 나는 주변을 의식하며 살았던 기억이 다.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인더풀'에 등장하는, 공주병 망상에 빠진 정신질환 여주인공처럼.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방송작가 과정을 준비하면서 내 병(?)은 어느새 치유가 되는 듯싶었다.




나는 운 좋게도 대학을 졸업하기 전 KBS에서 방송작가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작가 2~3년 차였을 때 이상한 전화가 또 걸려왔다.


 당신을 계속 지켜보고 있어요


헐!


그때 그놈 목소리는 아니었다. 뉴페이스였다. 그 남자는 자기가 KBS 직원이라고 했다. 당시 내가 예능국과 교양국을 오가며 일하고 있었던 터라, 분명 제작진 가운데 한 명이었을 거다. 연락처를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지만 그런 거 알아내는 건 식은 죽 먹기라나 뭐라나...


왜 내게 이런 일이 또 생기는 거지? 내가 그렇게 매력적인가? 그건 아닌데...


정말 물어보고 싶었다. 나한테 왜 그러냐고. 만나고 싶으면 말을 면 될 텐데 왜 이런 방법을 쓰냐고. 신분도 밝히지 않으면서.


하루는 너무 피곤하고 귀찮아서 소리를 빽~ 질렀다. 그는 흠칫 놀라며 내가 보기 보다 성깔 있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영영 사라졌다.


소리 지른 보람이 있었나? 유후~

하지만 거기가 끝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난 2005년부터 나는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만들어서 운영했다. 원래 사생활 노출을 좋아하지 않아서 SNS를 잘 안 하는 편인데, 지인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소식 좀 전하살자고 졸라서 어쩔 수 없이 뒤늦게 만들다.  


그런데 이상한 사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여러 명이었다. 실체가 없는 유령 같은 존재들.

나에 대한 집착이었을까?

아니면 '사회적 관음증'이었을까?


여하튼 그 가운데 한 사람은 꽤 오래갔다. KBS 보도국 직원으로 추정되는 그 사람은 '비밀 글'을 참 많이도 남겼다.

그 사람은 나를 만날 생각은 없었다. 다만 나에 대한 관심을 그런 식으로 표현했을 뿐...

그렇다고 언제까지 실체 없는, 유령 같은 존재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다. 그것은 내게 무의미한 일이었으니까.


결국 나는 2012년에, 그러니까 미니홈피를 운영한 지 7년 만에 문을 닫았다. 오로지 그 사람을 피하기 위해서 내 글과 사진들을 다 덮을 수밖에 없었다.




이 지긋지긋한 현상(?)은 잊을만하면 또 시작되고 또 시작되고... 3~4년에 한 번씩 반복다. 내가 아직 싱글이라서 그까.


지난해에는 즐겨 듣는 뮤직룸에 낯선 자가 또 등장했다. 자기 신분을 숨기고 말을 걸어 남자. 뜬금없이 좋아한다고 고백한 남자. 진정성도 없고 책임감도 없는 남자. 물론 이 남자도 지금은 내게서 떨어다.


이렇게 묘한 경험이 반복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싫어하는 말이 생겼다. 

'지켜보고 있다'는 .

그건 머리가 시키는 게 아니다. 가슴이 기억하는 일이다.


나는 이제 '가짜'가 싫다. '진짜'를 만나고 싶다. 같이 이야기하고 같이 손잡을 수 있는, 그런 '진짜'가 곁에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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