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 절편 공장
가을이 끝나갈 무렵 윗마을 서당골로 할머니부터 막둥이까지 온가족이 총출동한다. 한여름 게으름만 부리던 소도 막중한 임무를 띠고 터벅터벅 따라온다.
30마지기 정도 하는 밭에 고구마를 잔뜩 심었다. 엄마와 할머니가 줄기를 걷어내면 오빠가 쟁기를 맨 소를 닥달해가며 고랑을 오간다. 쟁기삽이 지나는 길마다 땅속에 허연 살을 감추고 있던 고구마들이 땅위로 솟아오른다. 젤로 어린 축에 속한 막둥이와 내가 달려들어 고구마를 주워 담아 고구마 절편기가 있는 쪽으로 나르면 아빠가 절편기를 돌리고 언니가 납짝납짝 썰려나오는 고구마를 미리 깔아둔 파란 천막에 널기 시작한다. 쟁기는 쉴 새 없이 땅을 파고, 절편기도 쉴 새 없이 돌아가서 나나 막둥이나 언니나 밭고랑을 연신 뛰어다녀야 한다. 그러면서도 너른 밭을 꽉 채운 햇볕이 기분 좋아 까륵까륵 웃었던 기억이 있다. 힘들지는 않았다. 아빠는 내내 농담을 하시며 즐겁게 일하도록 부추겼고, 엄마도 할머니도 바쁜 손놀림 중에 어린 우리들을 기특하다 칭찬해 주셨다. 고구마 줄기가 다 걷어지고 엄마와 할머니 손이 우리 일을 거들어 주면 여유가 생긴 우리는 보직을 바꾸어 가며 또 한참 뛰어다니고 까륵까륵 웃어댄다. 고구마 줄기가 다 걷어진 너른 밭을 납짝납짝 썰어진 고구마 절편이 다 뒤덮을 때쯤에는 해가 서쪽 산머리에 걸려 있고, 우리 식구는 겨우내 먹을 고구마 몇 가마니를 리어카에 싣고 집으로 돌아온다.
겨울철 김이 나올 때쯤에도 같은 기억이 있다. 작은아버지네 김 뜨는 일을 큰집인 우리집 식구들까지 다 가서 거들어야했다. 손이 꽁꽁 얼 정도로 추운 날이지만 햇볕이 담뿍 내려쬐는 김발이 먼저 생각나고 바쁘게 종종거린 기억, 어른이고 애들이고 많이 웃던 기억이 난다. 기억 저편 어딘가에 있던 추억인데 갑작스레 애틋하게 떠오른다. 이쯤에서 한번 떠올리지 못하면 영영 사라져버릴 기억 같아 서글프다. 건강했던 부모님이 그립고, 그 깃 아래서 마냥 까불어대던 우리가 그립다.
지금도 나는 땀흘려 일하는 게 즐겁다. 고된 노동을 할 때도 그날의 행복했던 노동을 떠올리고 지금도 그곳에서 손톱이 닳도록 일하시는 부모님일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