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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마 Feb 15. 2020

미국 살이 : 아이의 복통, 당황하지 말자.

어제 오후 아이들을 데리러 preschool에 갔을 때의 일이다. 둘째 하린이가 교실 한쪽 구석에서 몸을 웅크리고 아랫배를 움켜쥐고 있었다. 딱 봐도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고 내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엄마, 배가 아파" 한다. 선생님은 크게 놀라지 않은 얼굴로 "방금 전에 같이 화장실 다녀왔는데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는데...."라고는 말끝을 흐릴 뿐이다. 성격이 예민하고 까칠하긴 해도 엄살을 피우는 아이는 절대 아니다. 오히려 주사도 씩씩하게 울지 않고 잘 맞고, 충치 치료도 웃음가스 없이 잘 버텨내는 아이이다. 표정을 보니 어딘가 많이 아픈 게 분명하다.


우선 이마를 짚어보니 열은 없었다. 마음이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하린아 손가락 하나로 어디가 제일 아픈지 콕 찍어봐" 했더니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을 가리킨다.

한 번 더 안심이 되었다.

"하린아 혹시 오늘 화장실 가서 응가했어?" 물어보니 화장실은 갔지만 응가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응~~ 알겠어, 그럼 우리 집에 가서 따뜻한 물 마시고 좀 쉬자. 엄마가 배 만져주면 괜찮아질 거야"


안심을 시키고 안아서 나오는데도 계속 배가 아픈지 중간중간 울음을 터뜨렸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소파에 눕히고 하린이가 제일 좋아하는 옥토넛 만화를 켰다. 시선을 조금 분산시킨 뒤 얼른 몰래 다리에 작은 침 하나를 꽂았다. 어떤 편을 볼지 리모컨을 이리저리 돌리며 고르느라 침을 꽂는지도 몰랐던 녀석이 문득 자기 다리에 꽂힌 침을 보고 "침 맞기 싫어..." 하며 운다. 그럼 그렇지. 아무리 통증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얇은 침이라고 해도 5살 아이에겐 아직 바늘이라는 것이 무섭다. "하린아 이거 봐~~ 이거 하나도 안 아픈 침인 거 하린이도 알지? 봐 엄마도 꽂았는데 하나도 안 아파~"라며 얼른 내 손에도 같은 침을 하나 꽂는다. 엄마 손에 같은 침이 꽂힌 걸 확인한 후에야 울음을 그쳤다. 5분쯤 지났을까... 이젠 배가 안 아프다고 한다. 이렇게 빨리 상황이 종료될 줄 알았으면 옥토넛 10편 봐도 된다는 약속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 뻔했다.


살면서 한의사가 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솔직히 한국에 있었을 땐 이 정도로 감사하지는 않았는데, 외국에 있으니 이렇게 감사할 수가 없다. 만약 내가 전업주부이거나 다른 직업을 가진 엄마였다면 이런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당황했을 것 같다. 여기가 한국이라면 어디든 가까운 소아과로 뛰어갈 수도 있고, 심각한 상황이면 응급실로 직행하면 되지만 이 곳은 악명 높기로 소문난 의료체계를 가지고 있는 미국이지 않나. 이 곳에도 당연히 소아과도 있고 응급실도 있지만 우선 진료비라는 큰 걸림돌이 있다.  얼마 전 남편과 함께 주재 발령을 받은 부장님 따님이 학교에서 두통을 호소했더니 선생님이 병원을 데려가 주었고, 나중에 청구된 비용이 천불 가까이 되더란다. 검사 결과는 정상으로 나왔다는데, 심각한 다른 이상이 없는 일반적인 두통이라는 진단을 받기 위해 여러 가지 검사를 한 모양이다. 커버리지가 좋은 보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적은 돈을 지불해도 되겠지만 좋은 보험 또한 비싸기 마련... 나도 처음 아이들 결핵검사 병원을 알아볼 때 남편 회사에서 지원하는 보험을 적용해 주는 병원인지부터 열심히 확인해야 했다. 가령 아이가 배가 아프다고 할 때도 충수염, 장염, 혹은 장협착 등등 심각한 병이 아니라, 그저 장운동이 원활하지 못해 생긴 복통일 뿐이라는 진단을 받기 위해 (개인의 보험 커버리지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한국 대비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함은 분명하다. 언어장벽도 무시할 수 없는 걸림돌이다. 엄마가 영어를 잘한다면 혹은 한인이 운영하는 소아과가 근처에 있다면 크게 문제가 안 되겠지만.


어쨌든 우리 둘째는 장운동이 원활하지 못해 생긴 일반적인 복통이었다. 보통 변비가 있거나 변비까지는 아니더라도 똥글똥글 포도 똥을 자주 누는 아이들은 가끔 이런 복통을 호소할 때가 있다. 혹은 평소에는 배변에 별 문제가 없더라도 성격이 예민하여 집이 아닌 곳의 화장실에는 볼일을 보지 못할 때도 그럴 수 있다. 아이들이 배가 아프다고 할 때 가장 우선적으로 심각한 상황을 배제하는 것이 중요한데, 열이 나는지,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 충수염이든 장염이든 장협착이든 일단 몸 안에 염증반응이 일어나고 있다는 지표가 열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단순히 배가 아프다고 해도 무조건 열은 체크해야 한다. 고열이라면 의심의 여지가 없겠지만, 충수염도 급성이 아닐 때는 미열만 있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일단 열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가벼이 지나쳐서는 안 된다. 어디가 아픈지 위치를 물어볼 때는 손가락 하나로 가장 아픈 곳을 찍어보라고 하면 좀 더 파악이 쉬워진다. 오른쪽이라면 충수염 가능성이 높으니 빨리 병원을 가는 것이 좋다.  물론 충수염이라고 하더라도 배 전체가 아프다거나 명치가 아프다거나 하는 비전형적 경우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조심스럽기는 한데, 그래도 직관적으로 판단할 때 명확히 오른쪽이 아프다고 얘기한다면 좀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통증 호소 직전에 배변을 했는지, 상태는 어땠는지도 중요한 포인트이다. 설사를 했다거나 구토를 했다면 여지없다. 빨리 병원을 가는 것이 좋다. 다행히 둘째는 열도 없었고, 왼쪽이 아프다고 했고, 오른쪽 아랫배의 충수염 검사부위(McBurney point)를 눌러보아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직전에 설사도 구토도 없었고 오히려 화장실은 갔으나 볼일을 보지 못했다고 하고, 평소에 약간의 변비 경향을 가진 아이이기에 단순 복통으로 진단할 수 있었다. 혈자리 중에 부교감신경을 자극해서 장운동을 도와주는 "족삼리"라는 혈자리가 있는데 그곳에 침을 놓아주니 금세 좋아졌다. 물론 집이 주는 안락함과 최애 프로그램인 옥토넛도 도움이 되긴 했지만.


나는 한의사이기에 침으로 재빨리 처치를 할 수 있어 다행이었지만, 일반 가정에서는 어떤 방법이 있을 수 있을까? 우선은 아이를 편안한 곳에 눕히고 배를 조이는 옷은 버클을 풀어주거나 벗기고, 따뜻한 물에 설탕을 조금 타서 조금씩 먹여주면 좋다. 엄마손은 약손이라고 아이의 배를 눌러가며 문질러 주는 것은 오히려 자극을 줄 수 있기에 권하지 않고, 차라리 따뜻한 핫팩을 올려주는 것이 낫다. 족삼리라는 혈자리를 손끝으로 눌러 자극을 주는 것도 조금은 도움이 되는데 이때 통증이 있는 곳과 반대쪽 다리를 자극한다. 가령 왼쪽 복통이라면 오른쪽 다리의 족삼리혈을 자극하라는 뜻이다. 안정된 환경에서 아이가 점차 호전이 되는지 꾸준히 반응을 살피되, 혹시라도 전혀 호전되지 않거나 혹은 간헐적인 통증이 지속된다면 병원에서 정확한 진단을 받아볼 것을 권한다.


복통이라는 것이 다양한 원인으로 발생할 수 있고, 명확한 진단을 내리기까지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고려해야 하기에 이렇게 단순화해서 글을 쓰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잠깐 망설여지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과 달리 타지에 있으면서 의료 접근성이 떨어지는 환경에 있는 엄마라면 비슷한 경험 있지 않을까? 그래도 누군가는 비슷한 상황에서 우왕좌왕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처하는 데 조금은 일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일천하지만 경험을 나누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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