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전을 준 것까지만 네 몫이다, 그 이후는 신의 몫이다.
이른 10대 시절, 크리스마스의 분위기가 감돌던 어느 겨울날이었다. 엄마와 함께 영화관을 갔었는지, 저녁 외식을 했었던지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전 날 눈이 많이 왔고, 제설이 제때 되지 않아 거리가 꽁꽁 얼어있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는 길 건너편 정류장에서 탈 수 있었고, 6차선 대로에 횡단보도가 만들어지기 전이어서 지하도를 내려가야 했다. 미끄러운 계단을 한 발 한 발 신중히 딛으며 내려가던 기억이 난다.
계단을 서른 개쯤 내려가고 나면 건너편으로 이어지는 통로였고, 따뜻하진 않았지만 바람이 잘 들지 않아 바깥보단 덜 추웠다. 그래서 겨울 지하도엔 늘 구걸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날도 어김없이 초라한 행색의 아저씨가 너덜너덜한 우체국 택배 상자를 깔고 엎드려 있었다. 그 앞엔 시장에서 딸기나 깐 마늘을 담아 놓을 때 쓰는 작은 플라스틱 소쿠리가 놓여 있었다.
어릴 땐 그런 사람들이 하루 종일 엎드려있기만 하는 걸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밥을 먹고 싶거나, 춥거나 몸이 찌뿌둥해서 쉬고 싶을 땐 어떻게 하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궁금했다. 구걸을 한다는 비참함 이전에, 같은 자세로 엎드려 있는 일이 정말 피곤하고 지루할 것이란 생각에 연민이 일었다. 동전을 넣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고 죽은 듯 엎드려 있는 사람을 보면 사실은 자고 있는 거라던지, 아니면 실제로 죽은 걸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엎드려 있는 사람들을 보면 늘, 어깨가 들썩이거나 고개가 움직이는지 슬쩍 살펴보곤 했다.
그날 나는 외출을 해서 기분이 좋았고, 그리 낙천적일 수 없던 형편에도 '안 돼' 소리 한 번 않던 너그러운 엄마가 선별해 준 따뜻하고 마음에 쏙 드는 옷을 입고 있었다. 부족할 게 없는 상태였다. 엄마 손을 잠시 놓고, 엎드려 있는 아저씨 앞에 멈춰 서서 허리춤에 매고 있던 동전지갑을 열었다. 엄마는 가만히 서서 어린 딸의 선량한 행동을 지켜보며 자식을 바르게 키우기 위해 고민한 지난 시간들이 헛되지만은 않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분명 흡족했을 것이다. 그 흡족함은 눈빛과 표정에 드러났을 것이고, 어린 나는 그런 엄마의 반응을 경험적으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좋은 일도 하고 엄마도 기쁘게 하는, 세상에서 가장 착한 어린이 사례를 몸소 보여주고 있다는 우쭐함이 즐거웠을 것이다.
동전 지갑 안에는 십원, 오십 원, 백 원 동전이 잔뜩 있었다. 모두 털면 3천5백 원 정도 될 것 같은 양이었다. 동네 슈퍼에는 백 원짜리 사탕이 많았고, 문구점에서 파는 종이컵 떡볶이가 오백 원, 고급 팬시점에서 가장 탐나던 캐릭터 노트가 천 오백 원 정도 할 때였다. 어린이의 생활물가지수를 고려해 보았을 때 아껴 쓰면 일주일 정도의 용돈이었다.
엄마의 계속되는 따뜻한 눈빛을 의식한 것도 있지만, 엎드려 있는 어른에게 얼마를 줄까 하며 동전을 골라내는 것도 옳지 못한 행동 같았다. 어쨌든 소쿠리는 비어있었기에 십원도, 오십 원도 모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어린이는 전재산을 소쿠리에 와르르 쏟았다.
엄마의 눈이 동그래졌다. '정말 다 주려고?' 하고 놀라는 것 같기도 했고, '우리 딸은 통이 크네!'라고 감탄하는 것 같기도 했다. 뿌듯했다. 의기양양한 기분으로 홀가분해진 동전지갑을 여미고, 엄마와 나는 엎드려 있는 아저씨를 뒤로 했다. 그런데 몇 걸음을 떼기도 전에 믿을 수 없는 소리가 들렸다.
-쨍그랑, 쨍그랑-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는데, 엎드려 있던 아저씨가 짜증이 잔뜩 난 표정으로 소쿠리에서 동전을 꺼내 여기저기 집어던지고 있었다. 동전 중 하나가 또르륵 굴러오더니 내 발에 부딪쳤다. 십원 짜리 동전이었다.
"보지 마, 가자" 엄마가 내 등을 부드럽게 밀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나는 쉽게 고개를 돌릴 수 없었고, 통로의 끝에서 첫 번째 계단을 디딜 때까지 계속해서 동전을 집어던지는 아저씨를 줄곧 노려보며 걸었다. 동전이 타일 위를 구르고, 지나다니는 사람들 발에 차이고, 누군가의 구둣바닥에 철커덕하고 밟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계단을 오르면서도, 버스를 타고 집에 오면서도, 잠자리에 누워서도 타일 위로 동전이 굴러오는 소리는 뒤통수를 바짝 따라왔다.
어른이 된 나는 '아 거참 아저씨 쯧' 정도로 곧장 소각이 가능한 감정이지만, 설명할 수 있는 감정의 가짓수가 많지 않았던 어린이는 처리가 어려운 낯선 불쾌함이었다. 당황스러움과 난처함, 실망감, 배신감, 불쾌함, 날 선, 증오, 두려움, 상처 같은 것들이 조금씩 가지가지 담긴, 역겨운 메뉴만 모아 놓은 뷔페 접시 같았다.
- 모든 힘들고 배고픈 어른들이 다 그러는 건 아니야. 그 아저씨는 정말 불쌍한 사람인 거야
엄마의 진심 어린 위로에도, 쉽사리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불 꺼진 방 안에서 잠이 들 때까지 낯설고 불편한 감정을 똑바로 마주하려고 애썼다. 어린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동전을 내던진 아저씨가 불쌍하진 않았다. 난 나에게 소중한 걸 줬는데, 왜 감사하며 받질 않지? 볼품없는 작은 소쿠리에 차고도 넘치게 쏟아주었던 동전이 아른거렸다. 불쌍한 어른은 타인의 연민을 땅바닥으로 내던질 자격이 없어야 했다. 불쌍한 어른도 나보다 어른다워야 했다. 어떤 어른은 가장 밑바닥에서도 뛰어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어린이. 차가운 지하도 바닥의 한 칸짜리 너덜너덜한 우체국 박스 위로 내몰리는 삶이 될 때까지의 지리멸렬한 사정은 안중에도 없는 어린이. 동전을 쏟아붓던 어린이의 무지에는 그렇게 순수하게 잔인한 구석이 있었다.
그것도 트라우마라고 다시는 적선하지 말자는 옳지 못한 다짐을 하고 한참이 지나, 10대 후반이 되었다. 미국의 작은아버지가 건강이 몹시 좋지 않아 잠시 귀국하여 우리 집에 머물었다. 작은아버지는 결혼 직후 작은어머니와 빈손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자식 둘을 낳고, 차에서 어린 아들 딸을 재우며 밤낮으로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돈 없는 동양인 이민 가족의 눈물겨운 정착기, 영화 미나리 그 자체인 분이었다. 지금은 작은아버지의 삶에 믿음이 절실했음을 이해하지만, 그때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가족들과 조촐한 식사를 마치고, 어른들 사이에서 많은 대화가 오고 가던 중 지금까지의 어려움을 어떻게 지나왔는지, 또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같은 심오한 주제가 다뤄지고 있었다. 그러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준 얘기, 죽겠다 싶을 때 거짓말처럼 꼭 맞는 도움을 받았던 이야기, 그리고 신비로운 종교적 체험과 같은 영역으로 대화의 불이 번졌다. 사춘기의 미성숙한 정신세계는 어른들 대화의 열기를 견디기 어려웠고, 찬물을 끼얹듯 수년 전 동전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 도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도 있어요.
어른들의 대화는 조용히 멈추었다. 작은아버지는 나이 터울이 많아 이미 성인이 된 형제와 사촌들 사이에서 유일한 10대로 남아있던 나를 막내딸 대하듯 마냥 따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매우 사려 깊은 어조로 담담히 물었디.
- 그렇게 생각하니? 왜?
나는 뒤통수에 다시 들려오기 시작하는 동전 소리를 작은아버지에게 들려주었다. 작은아버지에게 다시 들려주는 동전의 기억은 어릴 때 보다 훨씬 더 불쾌해진 소리를 담고있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작은아버지가 이미 사춘기 아들 딸을 겪은지 오래기에 새삼 흥미로운 정신 세계라 여겨준 점이었다. 작은아버지는 이야기가 모두 끝날 때까지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었다. 그리고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 동전을 준 것까지만 네 몫이다, 그 이후는 신의 몫이다.
무어라 항변하려 했지만 모든 말들이 길을 잃은 듯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뒤통수를 바짝 쫓던 동전 소리가 사그라들었다. 기억을 끄집어내며 죽 끓듯 일어나넌 감정들도 조용히 가라앉았다.
작은 아버지가 미국으로 돌아가고 난 이후, 나는 줄곧 그 말을 되뇌었다. 동전을 준 것까지만 네 몫이다, 그 이후는 신의 몫이다. 그리고 삶의 많은 순간을 지나는 동안에도 줄곧 그 말을 떠올렸다. 마음을 준 것까지만, 도움을 준 것까지만, 최선을 다해 애를 쓴 것까지만, 더는 사랑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한 것까지만. 동전 지갑과 함께 굳게 잠겼던 마음속 많은 문을 열고 보이는 소쿠리에 가진 것을 쏟아붓고 그냥 돌아섰다.
마침내, 엎드린 아저씨가 불쌍하게 느껴지는 어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