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하게 지내던 형님이 나를 좋게 보셨나 보다. 칭찬을 많이 해주셨다. 나는 그중에 ‘그늘이 없다’는 칭찬이 인상 깊다. 처음엔 그 뜻도 몰랐다. ‘그늘’이라고 하니 나쁜 뜻 같았다. 그것도 잠시. 찾아보니 그건 좋은 말이었다. 내겐 너무나 감지덕지한 뜻을 갖고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보면 기분이 좋아서 캡처까지 해놓았다.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졌으니까.
그리고 몇 년이 지났다.
사람은 누구나 힘들다. 철학자 버트런트 러셀은, "인간에겐 불행이 그칠 날이 없다"라고 했다. 힘들지 않을 수는 없다. 괴로움은 오지 말라고 오지 않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 방법을 찾아야 했다.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을.
나는 힘이 들 때면 도피처를 찾는다. 방공호 같은 데에 들어가 쉰다.
지금껏 들은 ‘칭찬들’이 내게는 도피처이자 방공호였다. 힘이 들면 그 칭찬들을 찾아, 위로를 얻고 희망을 품었다.
칭찬들은 마치 살아있는 것 같았다. 칭찬을 들은 그 순간에 끝나는 말이 아니었다. 매번 나를 우울과 절망, 한탄으로부터 구해냈다. 말 한마디는 천 냥 빚도 갚을 수 있고, 수십 년 된 인연도 끊을 수 있다는데. 나는 여기에 더 해보려 한다. 말 한마디로도 며칠은 웃을 수 있다고.
따듯한 기억도 그렇다.
고대 에피쿠로스 학파의 에피쿠로스는, 요로결석을 십여 년이나 앓았다고 한다. 요즘 날로 쳐도 매 순간 고통이 끝없이 휘몰아쳤을 텐데, 그는 그 오랜 세월을 견뎠다고 전해진다. 그가 에피쿠로스여서일까? 철학자여서일까? 그는 말했다. 너무 힘들 때. 예전에 친구들과 어울렸던 좋은 기억들을 떠올렸다고. 그 좋은 기억이 지금의 고통을 이겼다고.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궁금했다. 대체 얼마나 좋은 기억이길래. 그 힘든 시간을 그것으로부터 위로받았을까.
문득 '온정'의 힘이 생각난다. '칭찬'의 힘을 얘기하다가 곁길로 빠지는 필자를 부디 이해하시길.
누군가의 따듯한 온정은 수십 년 된 원한도 풀 수 있었다. 한 변호사의 이야기가 기억난다. 그가 막 ‘z’ 회사의 변호를 맡았을 때, 그 회사에 매년 소송을 거는 A라는 분이 있었다고 했다. 문제는, A는 띄어쓰기 한 자 안 된 고소문을 매년 보냈다는 것이다. 읽는 게 여간 곤욕스러운 게 아니었다고. 더 큰 문제는 A는 매번 패소하면서도 또 소송을 걸었다는 것이다. 승소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변호사는, 어떤 계기로 A와 가까운 사이가 됐다. 그리고 A는 이후로 z 회사에 더 이상 소송도 걸지 않았다고 한다.
어떻게 그랬을까? 그 변호사는 말했다. 그냥 진심을 다해, 그분을 도와드렸다고. 상대편이지만. 이겨야 할 사람이지만. A의 고충을 묵묵히 들어주었다고. 그게 다였다고. 그 변호사는 말했다. 온정의 힘은 대단하다고.
칭찬과 온정은 모두 힘이 세다. 모두 따듯한 기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렷다.
그러니 이제. 가까운 사람에게 칭찬 한 마디 해보면 어떨까. 한 마디로도 족하다. 그것도 결코 약하지 않다. 그 말 한마디로도 무수한 울림을 전할 수 있으니까.
친하지 않으면 어떤가. 나와 다른 남이지만. 그 사람도 이 세상의 또 다른 ‘나’인데.
그렇게 칭찬을 주고받다 보면, 우리도 모르게 세상은 행복한 사람들도 가득하지 않을까.
*나는 항상 칭찬에 진심을 담는다. 진심이 담긴 칭찬이 진정한 ‘칭찬’이라고 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