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가기
깨고 싶지 않았던 꿈에서 깨어났다. 3년동안 꿈꿔왔던 방콕으로 돌아갔었다. 꿈이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직 태국 물건들이 집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있다. 몸은 시커멓게 타 있다. 귀에는 태국어가 윙윙거리며 들리는 듯하고 태국 냄새가 옷에 배어 있는 듯하다. 인스타그램에는 태국 여행 피드가 도배되어 있고 아직 태국을 여행하고 있는 친구들이 태국소식을 전하는 디엠을 보내온다. 진짜 방콕에 갔다 왔나 보다.
아침 11시 20분 비행기라 7시쯤에 일어나서 씻고 짐 싸서 가야지 했지만 설레는 마음에 7시 한참 전에 눈이 떠졌다. 씻고 대충 짐을 싸서 나가려는 데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빠뜨린 것 같다. 여권이랑 카드, 영문으로 뽑은 백신접종 확인서만 있으면 어떻게 든 나갈 수 있겠지 하고 창문을 잠그고 다 차지도 않은 쓰레기 봉지를 묶어서 8시쯤 밖으로 나왔다. 날씨는 조금 흐리다. 지하철은 출근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나도 꼭 출근해야만 할 것 같다. 너무 오랜만에 해외 여행이라 어색하다. 진짜 여행 가는 게 맞나 확인하려고 괜히 여권을 만지작거려본다.
공덕역에서 공항철도로 갈아타니까 큰 캐리어 가방을 끌고 온 여행객들이 제법 보이기 시작한다. 진짜 여행 가는 게 맞나 보다. 10시 조금 전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타이항공 카운터를 찾아 줄을 섰다. 긴장된다. 진짜 여권하고 백신접종 확인서만 있으면 나갈 수 있는지 의심된다. 제대로 내가 티켓을 사서 돈을 냈는지도 의심된다. 태국으로 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믿기지 않는다.
내 차례가 왔다. 심호흡 한번 하고 긴장하지 않은 척 억지 미소를 지으며 카운터로 갔다. 여권과 백신접종 확인서를 내밀었다. 직원은 컴퓨터에 뭔가 톡톡 입력하더니 갑자기 전화를 건다.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잠시만 기다리라고 한다. 왜 그러는 걸까. 뭔가 잘못된 걸까. 카운터 끝에 있는 직원과 몇 분 얘기하더니 다시 돌아와서 자리 문제 때문이라고 잠시만 더 기다려 달라고 한다. 잠시만 더 긴장하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다. 다행히 직원은 여권과 티켓을 주면서 10시 50분까지 32번 게이트로 가라며 시간에 동그라미를 쳐준다.
환전도 아직 안 해서 대충 근처에 있는 하나은행 ATM에서 노란 5만원짜리 지폐로 40만원을 뽑았다. 태국가서 바꿔야지. 요즘은 달러만큼 한국돈도 잘 쳐준다고 들었다.
배가 고프다. 시간도 조금 남았고 해서 1층에 있는 롯데리아로 가서 햄버거를 하나 사 먹었다. 그리고 시간 맞춰 게이트에 도착해서 비행기에 올라탔다. 창가 자리다. 얼른 짐을 올려놓고 자리에 앉아 좌석벨트를 조여 맸다. 아직 비행기가 뜨지 않아 실감이 안나 안절부절 못하겠다. 초조하게 기다린다. 띵딩. 캡틴의 안내방송이 나온다.
“캐빈 크루, 위 알 레디 투 테이크 오프……. 크로스 체크”
비행기 전체에서 기계 돌아가는 윙윙 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창밖을 보니 절대 움직일 것 같지 않던 비행기도 조금씩 앞으로 나간다. 그러다 결국 하늘로 날아간다. 땅에서 점점 멀어지더니 순식간에 구름 위다. 진짜 가나보다.
자다 깨다 멍하게 있다 보니 기내식이 나온다.
“치킨 누들? 포크 프라이드 라이스?”
이럴 줄 알았으면 햄버거 안 먹고 조금 버틸 걸 그랬다. 항상 저가항공만 타다 보니 기내식이 나올 거라는 건 상상도 못했었다. 치킨 누들이 꽤 맛있다. 두 번 리필해서 마신 화이트 와인도 기가 막힌다.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내 옆은 한 칸 띄우고 그 옆에 한국 여자분이 앉았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안경을 써서 별로 눈에 띄지 않았던 외모였던 거 같은데 자고 일어나니 다른 사람이 앉아있다. 다른 사람이 앉은 건가. 화장으로 사람이 이렇게 바뀔 수가 있는 건가. 노란색 파자마 같은 옷은 그대로 인걸 보니 같은 사람인 것 같기도 하다. 메이크업 아티스트인가.
다시 캡틴의 방송이 들린다.
“레이디스 앤 젠틀맨. 디스이즈 유얼 캡틴 스피킹”
이제 약 40분 후에 도착할 예정이고 원래 도착 시간이었던 오후 3시 10분보다 50분 빨리 도착하게 되었단다. 어떻게 50분이나 빨리 도착할 수가 있을까.
진짜 비행기가 착륙하고 시간을 봤더니 2시 20분이다. 비행기에서 내려서 입국심사장으로 걸어갔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입국심사장만 통과하면 진짜 태국이다. 아직은 코로나 여파 때문인지 줄이 길지 않다. 적당히 줄이 많이 길지 않은 곳에 서서 기다리고 내 차례가 왔다.
“싸와디캅!”
여권과 백신접종확인서를 직원에게 내밀었다. 오른쪽 네 손가락 지문을 스캔하고 동그란 카메라를 보고 사진을 찍었다. 이제 태국에 올 때 입국신고 카드를 쓸 필요는 없다. 내 여권에 3년만에 도장이 찍혔다. 그리고 통과했다. 태국에 왔다. 발걸음이 가볍다. 짐을 부치지 않아서 수화물을 기다릴 필요없이 단번에 통과했다. 한국에서 사온 태국 유심카드로 바꿔 끼우려고 하는데 뾰족한 핀셋으로 아무리 폰을 찔러도 카드가 안 나온다. 유심카드 파는 곳 아무데나 가서 도와 달라고 하니 한 번에 카드가 열린다. 얼른 태국 유심카드로 바꿔 끼웠다. 그런데 3G다. 너무 느려서 아무것도 안 된다. 일단 공항을 벗어나서 생각해 봐야겠다.
항상 저가항공으로 태국을 오다 보니 수완나품 공항은 오랜만이다. 돈무앙 공항에서는 공항 문 열고 나오면 바로 택시 잡는 곳이 있었는데 나를 맞아주는 것은 시꺼먼 먼지와 숨막히는 열기뿐이다. 오른쪽으로 조금 걷다 보니 맞은편에 카오산으로 바로 가는 리무진 버스가 생겼다. 버스가 언제 오는지 모르겠다. 시간표가 없다. 1분이라도 더 빨리 가고 싶다. 계속 오른쪽으로 걸어가니 택시표를 뽑는 키오스크가 있다. 택시표를 뽑고 어디서 택시를 타야 하는지 몰라서 어리둥절 하고 있으니 앞에 있는 택시기사 아저씨가 택시표를 보여 달라고 하신다.
“넘버 나인? 디스 웨이!”
택시가 주욱 서 있는 곳 위로 각자 번호가 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18번이다. 다시 왼쪽으로 걸어갔다.
“12, 11, 10, 9 여기 있다”
9번 밑에 있는 택시 기사 아저씨에게 표를 주고 택시에 탔다.
“카오산 로드요”
공항을 벗어난 택시는 몇 번이고 와서 이미 익숙한 하이웨이 위로 달린다. 옆으로 태국 글씨가 쓰여진 광고판도 보이고 뜨거운 방콕 햇살을 가득 머금은 샛초록색 잎의 큰 나무들도 보인다. 반가운 얼굴도 보인다. GOT7 잭슨 얼굴의 대형 전광판이 눈이 띈다. 라디오에서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태국어 라디오 소리가 들린다. 저번주만 해도 방콕에 홍수가 났다는 기사를 봤었는데 오늘은 날씨가 화창하다.
20분쯤 가다가 갑자기 차가 막히기 시작한다. 앞에 사고가 난 건지 차가 아예 안 움직인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조바심이 난다. 기사 아저씨는 걷는 것보다 느린 속도로 조금씩 바퀴를 굴린다. 아저씨도 지루한 지 연신 스트레칭을 하고 백미러로 내 표정을 체크한다. 그렇게 30분이면 올 거리를 1시간 반 만에 도착했다. 카오산 근처 지리는 눈감고도 찾을 수 있어서 숙소로 걸어갔다. 카오산과 쌈센 거리 사이에 있는 Bed station이라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