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드름으로 뒤덮인 신혼
여드름은 대학교 졸업과 함께 막을 내렸다고 생각했다. 이십 대는 여드름이 하나둘씩 올라와도 자연스러운 나이지만 사십 대는 속병을 의심해 볼만한 나이이다. 길을 걷다 이마나 볼에 붉은 자국이 있는 학생들을 보면 당사자는 물론 속상하겠지만 ‘여드름은 젊음의 상징’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사십 대 이후의 여드름을 보면 왠지 청결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청결해 보이지 않는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나’였다. 행복한 일들로 뒤덮일 것 같았던 나의 신혼은 여드름으로 가득 뒤덮인 사십춘기였다.
전조증상이 있었다. 결혼식을 앞둔 두 달 전부터 오른쪽 턱과 가까운 볼 부위에 작은 뾰루지들이 하나둘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단순히 피부조직만 볼록하게 튀어나오고 여드름처럼 붉지 않아 당시에는 음식 문제나 생리 전 증후군 또는 가벼운 스트레스이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마음껏 색조 화장을 하고 싶었던 스무 살을 지나 스무한 살이 되면서 시작되었던 여드름은 꿈꾸었던 화장은커녕 집중적으로 여드름을 덮어야 하는 파운데이션의 떡칠로 나를 인도했다. 20여 년이 지나서일까 그 시절의 우울함은 잠시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의 이십 대는 매일이 이벤트 같았기에 반복되는 즐거움과 슬픔의 소용돌이 속에서 여드름을 깊게 고민할 시간조차 없었다. 더불어 세포의 빠른 재생도 한몫했다.
마흔 살의 여드름은 완전히 달랐다. 가볍게 생각했던 작은 뾰루지들은 결혼식 날까지 죽지 않고 왕성하게 살아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또한 불행 중 다행이었다. 당시 턱 주변으로 번져 있는 탓에 놀라운 화장술과 결혼식장의 눈부신 조명으로 어느 정도 감출 수 있었다. 만약 뾰루지의 위치가 양 볼이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결혼식과 신혼여행을 무사히 마친 뾰루지들은 이때다 싶어 점차 여드름의 형태를 띠며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내 두 볼과 턱을 울긋불긋하게 물들였다. 대학생 시절에도 이 정도의 규모는 아니었다. 코로나로 인해 마스크 착용이 필수였던 시기였기에 나에게 마스크 착용은 구세주와 같았다. 마스크로 얼굴의 반 정도를 가렸음에도 불구하고 가려지지 못한 여드름들은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걱정 어린 말투로 무슨 일이 있냐며 물어보는 지인들의 안부인사가 얼마나 듣기 싫었는지 모른다.
그때부터 나는 일에 필요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결혼식장에서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가장 화려했던 나의 모습을 깨트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내 얼굴에 마치 여드름 씨앗이라도 뿌린 듯 여드름은 피어나고 시듦을 무한 반복했고 상태에 따라 나의 기분도 좌지우지되었다. 매일 핸드폰 카메라로 얼굴을 찍어가며 전 날과 오늘의 상태를 비교하는 것이 나의 일상이 되었고 여드름 전문 화장품 사이트에 들어가서 고객들의 구매 후기를 보며 그 사람들과 동질감을 느끼고 때론 희망을 품는 것이 루틴이 되었다.
혹여나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마주칠까 섣부르게 걱정하기도 했고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상대방이 먼저 말을 꺼내기 전에 내 피부 상태를 이실직고했다. 피부과를 갔더라면 조금 더 빠르게 가라앉을 수도 있었겠지만 치료비와 독한 약이 부담스러웠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나에게 맞는 화장품을 찾게 되어 피부가 어느 정도 진정되어 가는 듯했으나 이 시기는 더 이상 올라올 여드름이 없을 정도의 전성기였기 때문에 전적으로 화장품만의 공은 아니었으리라.
몇 달이 지나자 매일 피부 사진을 찍는 일도 진절머리가 났고 주어진 삶은 여드름만 신경 쓰고 살기에 여유롭지 않았다. 거울 속에 여드름이 난 나의 얼굴을 보는 것이 익숙해졌을 즈음 여드름도 이제는 시시해졌는지 자취를 하나둘씩 감추기 시작했다. 여드름 너마저도 신경을 쓰지 않아야 사라지는구나 싶었다. 작년 6월에 발현된 뾰루지들은 올해 5월이 되어서야 희미하게 붉은 흔적만을 남겨놨으니 자취를 감추는데 거의 일 년이 걸린 셈이다.
얼굴에 났던 그 무시무시한 뾰루지들은 얼굴의 상처만 남기고 간 것이 아니었다. 내 마음에 우울을 심어주었고 자신감의 하락과 함께 인간관계까지 휘젓고 지나갔다. 붉은 여드름이 붉은 자국이 되고 나서야 스스로 진단을 내릴 수 있었는데 진단명은 ‘셀프 괴롭힘’이다. 올해 건강검진을 통해 ‘간혈관종’을 처음 발견하게 되었는데 현재는 지속적인 추적관찰만으로도 괜찮다고 했지만 그동안 나의 간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되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사십춘기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음식의 잘못도 아닌, 생리 전증후군도 아닌, 결코 가벼운 스트레스도 아니었다.
더 행복하기 위해서 결혼을 선택했지만 연애에서 결혼 준비과정으로 넘어가는 순간부터 결코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서로 맞춰야 할 일이 많은 결혼준비의 시기는 예민하고 섬세한 내가 받아들이기엔 벅찼지만 정해진 결혼식 날짜에 멋지게 도달해야만 했다. 아마도 결혼 전부터 나의 오장육부에서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그만 괴롭히라고 끊임없이 외치고 있었을 텐데 나는 그 외침을 듣고서도 외면했고 눈앞에 놓인 상황들을 어떻게든 완벽한 모습으로 맞추고 싶었다. 그 결과 속에서부터 시작한 여드름이 밖으로 터져 나왔을 것이다.
요즘에도 가끔씩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피부의 변천사를 보곤 한다. 이 사진들은 앞으로 맞이할 또 다른 시련을 이겨내기 위한 훈장 같은 존재처럼 여기는지 쉽사리 삭제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있다. 여드름은 그렇게 불꽃처럼 퍼졌다가 긴 시간 동안 타들어가는 장작처럼 서서히 사라졌다. 그렇게 미웠던 여드름이었지만 이제라도 가주어서 지금은 고맙기까지 하다.
사십춘기는 필연이었다. 여드름은 시기에 따라 젊음의 상징이 될 수도 있고 마음의 병이 될 수도 있었다. 겉으로 드러난 ‘형태’에 불과했던 것이다. 사십춘기는 내게 형태 안의 숨어있는 내면을 들여다보는 힘을 주었고 모양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원인을 찾고 해결해야만 한다고 알려주었다. 사십춘기를 보냈다고 해서 오십춘기를 맞이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