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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진 May 14. 2020

어떤 소식

어제는 춘분이었구나. 낮과 밤이 마주 보는 날. 밤새 비가 많이 왔고 나랑 철희는 오래도록 껴안고 있었다.


이화 사거리, 제비가 그려진 카페에 들어갔다. 천장이 낮은 구석에서 나는 손을 잡자고 말했다. 우리는 얼마 전 아이스크림 때문에 싸웠다가 오래도록 대화를 하지 않고 있었다. 유치한 열흘. 아까운 열흘. 철희야,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을 듣고 너무 놀라지 않겠다고 약속해. 병원에서 받아온 서류 봉투는 병원 이름이 보이지 않게 뒤집어놨다. 바람 빠진 풍선 같은 몇 마디를 던졌고 한참 말이 없었다. 내 딴에는 좀 달래본다고 블랙유머를 몇 개 날렸는데, 나만 웃기는 거였다. 얼굴을 쥐어 싸고 철희는 낭떠러지에서 계속 떨어지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우리 둘은 시간을 들여 주섬주섬 눈물을 주워 담았다. 현실 감각이 좀처럼 돌아오질 않았다. 나는 능력치가 후진 게임 캐릭터가 된 것만 같았다. 호기심에 스탯을 이것저것 눌러보다 결국은 탱도 딜도 힐도 못 하는 그냥 폭망한 캐릭터. 32년간 뭘 선택했길래 여기까지 온 거더라? 철희와의 대화 중에도 지나간 선택의 순간들이 쉴 새 없이 사고를 휘감았다. 나는 그때마다 머리를 세차게 좌우로 흔들고, 마주 앉은 사람의 투명한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마음이 적당한 온도를 되찾았다.


신기하기도 하지. 업무에 치여 냉랭하던 의사들이 초음파나 CT가 끝나면 조금씩 친절해졌다. 아, 엄청난 게 들어있나 봐. 선량한 이들이 무의식적으로 베푸는 작은 친절. 불안감이 만들어낸 착각이라고 믿고 싶었다. 아직 몰라요. 확진은 대학병원에서 할 거예요. 대학병원 로비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중에서 내가 제일 젊은 것 같았다. 교수의 옆자리에 바짝 붙어 물었다. 선생님. 제가 알고 있어야 할 메뉴얼 같은 게 있을까요? 준비해야 할 것이 있을까요? 교수는 입을 다물고 마우스 스크롤을 굴리기만 했다. 으으으. 짜증나.


부모님께 차마 말씀드리지 못해서 경기도에 사는 동생을 불렀다. 그녀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현실 감각이 뛰어난 이였다. 18개월 된 아이를 보듬고 동생이 말했다. 오빠, 우리는 이제부터 마라톤을 할 거야. 그러니까 힘을 내야 해. 우물쭈물 대답을 준비하다가 나는 초등학교 때 참가했던 달리기 시합을 떠올리고 말았다. 200미터 경기였던가. 6명이 달렸는데 4등을 했다. 무릎을 잡고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선생님이 했던 말은 선명하게 남아 있다. 도진, 왜 마지막에 힘을 빼는 거야. 끝까지 달려야 해. 결승점에 닿을 때까지! 동기부여의 신호탄, 낙담을 보장하는 주문은 그때 만들어졌다. 거참, 소년 스포츠 만화도 아니고. 끈기라… 물엿 넣은 멸치볶음에나 끈기가 있지, 내 삶에서는 찾기 어려운 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마라톤 출발선에 서 있다. 강제로 호출되었다는 억울함은 많은 이들의 응원 덕에 날려보냈다. 다만 이 출발선이 여기가 맞는지, 혹시나 더 후퇴하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머리를 세차게 좌우로 흔든다. 과거와 미래에 사로잡히지 않고 현재를 살기 위해, 나는 일단 멈춰섰다. 그리고 그토록 미뤄왔던 글을 쓰기로 했다.


입원 5일차. 이게 웬 떡?! 병원식으로 쌈밥이 나오다니.
세상에 암에 대한 정보는 넘쳐났고, 철희는 잠이 왔다.
퇴원하는 날 짐을 다 싸고 나서. 자세히 보면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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