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지는 긴장감을 해방감과 기대감으로 채운 마블의 끝판왕
전 세계 마블 팬들은 올 4월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 바로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개봉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 4월에 개봉한 <아이언맨>을 시작으로 만 11년의 대장정이 일단락된다. 물론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 두 번째 시리즈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블랙 위도우 솔로 무비 등이 네 번째 페이즈로 예고되고 있지만, 1세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히어로 몇몇의 은퇴(?)가 점쳐지는 어벤져스4는 여태 등장한 영웅들의 총출동, 역대급 이벤트가 점쳐진다.
이런 빅 이벤트를 목전에 두고 반드시 필요한 연결고리가 바로 <캡틴 마블>이었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 그 누구도 맞서지 못한 타노스에 대적할 혹은 절반이 재가 되어 사라진 인류를 구원할 존재로 캡틴 마블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세 번째 페이즈가 진행될 동안 단 한 번 얼굴조차 비추지 않았던 존재의 잠깐의 힌트가 그 쿠키영상에서 유니폼 상징으로 나타났기에 모든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타노스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캡틴 마블>'이라면서 말이다.
캡틴 마블은 위대한 페미니즘 영화로 기획됐다.
그런데 이 엄청난 기대감의 반대편에는 불매하겠다며 개봉도 하기 전에 평점 테러를 행하는 이들도 많이 보였다. 주연 배우인 브리 라슨(캡틴 마블 역)의 여러 발언과 트위터로부터 촉발됐다. 이 시대 최고의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들을 생산해내고 있는 마블 영화에 정치적 올바름 내지는 페미니즘을 '묻혔다'면서 불만을 표현했다. 물론 이런 논란에서 불구하고 <캡틴 마블>은 <극한직업>을 넘어 올해 최고, 역대 MCU 6위에 해당하는 오프닝 스코어로 극장가를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 <캡틴 마블>의 스토리는 진부하다. <토르>의 초기 시리즈를 본 듯했다. 액션도 지금껏 나온 MCU 영화 중 하위권에 속할 것이 분명하다. 그 아래에 당장 떠오르는 건 <블랙 팬서> 정도다. 최근 나오는 히어로 영화들의 매력은 설득력 있고 강한 빌런들로부터 나온다 생각하는데 그 면에서도 긴장감이 떨어진다. '혼자서는 세상을 구할 수 없다'던 홍보 문구와 달리 슈퍼맨 혼자 세상을 다 구할 것만 같은 밸런스 붕괴를 보여준 DC의 <저스티스 리그>가 떠오르기까지.
그래서 이 영화가 무엇이 그렇게 특별하냐고 묻는다면 MCU에서도 20개의 영화가 나올 동안 없었던, 첫 번째 여성 영화라서 그렇다고 답하겠다. 주연 배우 브리 라슨뿐만 아니라 감독도 그리고 작가진도 대부분 여성으로 구성되었다. 이제야 이런 구성의 제작진과 배우로 나왔다는 것부터가 신기한데, 굳이 신선하고 특별한 스토리가 필요했나 싶다. 무난한 여성 서사만으로도 충분했다고 본다.
"당신 혼자서는 불가능해."
"너무 감정적이야. 이성적으로 생각해."
"여자는 조종석에 어울리지 않아."
영화는 시종일관 이런 대사가 이어진다. 캐럴 댄버스(브리 라슨 분)의 아버지부터 시작해 공군 동료들뿐만 아니라 욘-로그(주드 로 분)와 닉 퓨리(사무엘 L. 잭슨 분)에게 이르기까지. 이 땅의 여성들이 숱하게 들어왔을 '흔한 말'들이다. 여기에 대한 캡틴 마블의 반응은 어땠을까. 넘어진 자전거를 다시 세우고, 떨어진 야구배트를 다시 잡고, 레이싱카의 속력을 올려 폭주한다. '여자는 조종석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과거 기억이 재생되고 있는 스크린에 포톤 블래스트(주먹에서 나가는 에너지 빔)를 쏘자 '유리'가 산산조각 나듯 부서질 때는 해방감을 선사한다.
캡틴 마블에게 혼자서는 불가능하다고 조언하던 닉 퓨리를 구한 것도 캡틴 마블이었고, 그나마 캡틴 마블이 결정적인 도움을 받는 대상도 동료였던 흑인 여성 조종사 마리아 램보(라샤나 린치 분)다. 능력을 깎아내려서라도 대등하게 싸우고 싶어 한 욘-로그를 한 방에 보내버리고, 자신의 능력을 위한 것인 줄로 알았지만 알고 보니 통제하고 억제하던 장치를 과감히 '벗어던진다.' 워낙 능력이 뛰어나 우주를 지키는 '바깥일'만 하기에도 바쁠 캡틴 마블이 닉 퓨리와 나란히 서서 함께 '설거지'를 하는 모습도 상징적이다.
내가 왜 너에게 나를 증명해야 하지?
우연한 기회에 강력한 힘을 갖게 된 캡틴 마블이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자신을 찾아가는 이 이야기가 여성 해방에 무슨 도움이 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마리아 램보와 그의 딸이 존재가 꽤나 중요한 장치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아니라도 끊임없이 증명하기를 요구받은 여성들이 한 편의 이 영화를 통해 느낀 공감과 해방감은 어떠한 형태로든 영감을 주지 않을까. 많은 여성들과 여성 서사가 더 많아져야 한다는 대전제에 동의하는 이들이 끄덕일 수 있는 영화임에는 분명하다.
한편 이 영화에는 고양이 '구스'가 등장한다. 마블 영화에 고양이라니 이건 반칙이 아닌가 싶다. 구스가 귀여워서 어쩔 줄 몰라하는 닉 퓨리의 모습과 그로부터 이어지는 여러 MCU의 떡밥들이 예고 없이 쏟아지니 결코 놓쳐서 안 되는 부분이다. 여느 마블 영화와 마찬가지로 쿠키 영상도 두 개나 되는데, 모두 어벤져스와 연결되는 장면들이니 마블 팬이라면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극장을 나오게 될 것이다. 어제는 세계 여성의 날이었고, 그 날에 맞춰 개봉한 북미에서 <캡틴 마블>은 올해 최고의 오프닝 스코어를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