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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주현 Dec 27. 2023

'침묵하는 신'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

영화 <사일런스>의 메시지

지난 달, 명상코스에서 씨팅하고 있는 동안 영화 <사일런스>가 떠올랐다. 엔도 슈사쿠의 소설 원작을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영화 <사일런스>는 한 마디로 '침묵하는 신'에 관한 이야기다. 소위 신이 정말 있다면, 인간 세계의 불의를 어찌하여 가만히 둘 수 있는가? 또는 저렇게 나쁜 사람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어찌 가능한 것인가?라는 의문을 17세기 일본의 기독교 박해에 빗대 전개한다.


몇 해 전 처음 그 영화를 봤을 때, 무척 인상 깊었지만 감독이 무얼 말하고자 하는 건지 쉽사리 알기 어려웠다. 포르투갈 예수회의 저명한 신학자이자 선교사 페레이라 신부(리엄 니슨)와 그 제자인 로드리게스 신부(앤드류 가필드)가 결국 끔찍한 고문과 탄압에 굴복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지난 집중 명상에서 비로소 그 의미가 와 닿았다. '순응'(겸손)이다. 끝내 일본인 아내를 두고 일본 문화에 적응한 두 신부의 태도는 배교가 아니라 오히려 진정으로 신의 뜻을 받든 숭고한 행위다. 신이 그들에게 요구한 건 선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신이 그들에게 바란 건 자기 '에고'를 꺾을 줄 아는 태도였던 것이다. 


17세기 일본의 기독교 박해 속에서 이루어진 영화 속 선교 행위에는 그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선교 신부들의 에고, 즉 내가 옳다는 신념이 섞여 있다. 그런 에고는 신의 말씀으로 척박한 환경의 사람들을 구원한다는 정의로운 명목 때문에 더 두껍고 단단하다. 선교를 막으려는 일본 관리의 탄압은 신의 뜻에 비추면, 불의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 신앙을 한층 진실되게 만들려는 신의 의지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배교의 증거를 예수 형상의 석판 밟는 행위로 표현한다. 신부를 비롯한 일본 신앙인은 그 석판 밟기를 고역스러워하며 주저한다. 일본 관리는 말한다. 그저 석판일 뿐이라고. 사실이 그렇다. 아무리 예수(또는 부처 등) 형상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런 모든 조형물은 책상이나 발수건과 다를 바 없는 물체일 뿐이다. 


더구나 성경에서는 자기를 위한 우상뿐만 아니라 그 어떤 형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라고도 말한다.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믿지 말라는 구절을 근거로 많은 신앙인이 예수만큼은 그 지침의 예외로 삼아도 된다고 여기고 여러 예수 형상을 만들어 그 발 밑에 절한다. 마치 예수가 모든 인간을 자기 발 아래에만 두고 싶어한 것처럼.


명상을 시작하려면 먼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야 한다.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방법은 집중이다. 어느 한 가지에 집중하면 마음은 차분해진다. 촛불을 뚫어지게 보거나 어떤 형상을 떠올리고 그것에 집중해도 되고, 아니면 염불 외듯이 특정한 소리에 집중해도 된다. 그러나 내가 하는 명상에서는 오직 코구멍의 숨을 지켜보도록 하면서 형상이나 소리를 통한 방법을 경계한다.


형상(또는 소리)을 통하면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기가 수월하다. 숨을 지켜보는 건 무척 어렵다. 끊임없이 생각이 일어나고 나도 모르게 그 생각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형상은 다른 생각이 일어나는 걸 막는다. 형상 자체가 생각, 즉 분류와 분석, 판단 작용을 거친 것이기 때문이다. 분류와 분석, 판단 작용은 복잡한 세상을 인식하고 살아가기 위한 뇌 기능이지만, 대개 그 과정에 에고가 개입된다. 


인간은 어떤 대상을 인식함과 동시에 그 기능을 떠올리는 나머지 그것을 그 자체로 보지 못한다. 책상을 보면 책상으로, 그러니까 앉아서 뭔가를 읽거나 쓰거나 또는 다른 어떤 작업을 하기에 편한 도구로서의 형상으로 인식하지 그 형상 자체로만 보기 어렵다. 자신의 그 목적(에고)에 부합할수록 좋은 것(선)이고 그렇지 않으면 별로(악)라고 '판단'한다. 그런 자기 판단(에고)이 영화에서 예수 형상의 석판 밟기를 신부와 신앙인들이 그토록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즉 예수 형상의 석판은 인간의 에고를 비유한 것이다. 


신에게는 에고가 없다. 따라서 선악도 없다. 선악은 인간의 판단에 따른 분류이지 신의 것이 아니다. 선악이 신의 분류라고 여기는 건 중세 유럽의 세계관 영향일 가능성이 크다. 중세 유럽인은 인간 세계를 신 세계의 연장으로 보았다. (그 덕에 태어나면서 정해지는 신분 차별을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선악이 없는 신은 인간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침묵할 수밖에 없다. 신의 침묵이란 곧 허용(사랑, 자유)이다. 다만,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신을 절대자라고 믿는 신앙인이라면, 신이 행하는 것이 곧 선이고, 그에 순응할 것이다. <사일런스>에서 페레이라 신부가 배교로써 더 이상 신이 (인간처럼) 선을 행하길 기도하며 기다리지 않고, 신이 허용한 그 세상의 모습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천체과학 연구 등)을 하는 것처럼.


인간이 뇌의 분류와 판단 작용 없이 살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다만, 이 작용에 내가 옳다 또는 나만 위하거나 나를 내세우려는 에고가 강하게 작용하면, 고통을 자초하게 된다. 세상 일 또는 신의 뜻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미약한 인간은 자꾸만 인간이 신의 뜻을 따르는 게 아니라 신이 인간 가치를 따르길 요구하며 신이 선을 행하길 바라는 오만을 부린다. 영화는 이러한 인간의 교묘한 자만을 경고하고자 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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