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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주현 Oct 14. 2024

한국의 음울하고 침울한 창작물과 인간 혐오 세계관

삶과 인간에 대한 긍정과 사랑은 추악한 인간 본능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명상에서는 오계를 강조한다. 거짓말, 정신을 취하게 하는 물질, 살생, 삿된 성행위, 도둑질 가운데 일상에서 지키기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가 살생이다. 여름 모기 뿐만 아니라 화단이 있어서 각종 벌게가 많은데 특히 개미는 내버려두면 나무와 화초에 해롭기 때문이다. 개미를 죽일 때마다 큰 스트레스였다. 


시골에 있어서 센터에도 벌레가 많다. 내가 1년에 한 번 참석하는 10일 코스를 봄이나 가을 아니면 겨울에 가는 건 벌레 때문이다. 여름엔 벌레가 많아지는데, 벌레를 죽일 수 없다. 방에 벌레가 들어오면 곳곳에 비치되어 있는 책받침과 투명 컵으로 내보내야 한다.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살생-일상에서 가장 많이 저지르는 곤충 살생 금지를 무겁게 강조한다.


차라리 고기를 먹지 말라고 하지, 해로운 곤충을 죽이지 않아야 한다는 건 지키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납득도 잘 되지 않았다. 생명 존중이라면, 곤충보다 고기를 먹지 않는 게 훨씬 의미 있는 것 아닐까? 모기나 개미처럼 해충은 죽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내가 하소연하자, 차라리 벌레가 생기지 않도록 나무와 화초를 키우지 않든가 어떤 방법을 찾으라는 어시스턴트 티쳐 조언 중에 왜 벌레 살생 금지를 강조하는지 알 수 있었다.


벌레를 죽일 때의 마음 때문이다. ‘에잇, 더럽고 해롭고 거슬리니까 죽어!’라는 혐오의 마음에 반응하는 행위이다. 도덕을 통해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다른 생명을 죽이면 나도 똑같이 그런 일을 당하므로 이를 피하기 위해서와 같은 식의 1차원적 인과응보, 업보 때문이 아니다. 싫은 마음에 거부로 반응하는 행위, 살생은 그런 혐오에 대한 극단적 반응이고, 일상에서 쉽게 마주치는 하찮은 벌레를 아무 생각 없이 죽일 때마다 그런 반응 태도를 거듭 연습하게 되어 그것을 습관으로 만들기 때문인 것이다. 삶을 고통으로 만드는 건 다름 아닌 바로 그런 반응 습관이다. 이것이 첫번째 이유이다.


명상 차원의 이유도 있다. 오계에서 경계하라는 다른 행동과 마찬가지로 마음을 거칠게 만든다. 명상으로 마음이 고요해졌다가도 벌레를 죽일 때마다 다시 마음이 일렁이고 거칠어진다. 명상력이 쌓여서 마음이 어느 수준 이상 고요해지면 벌레를 죽이고 싶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더 마음이 고요해지면, 이제 고기나 생선 뿐만 아니라 채소 중에서도 소위 오신채라고 하는 자극적인 식재료도 자연히 멀리하게 된다고 한다. 몸 감각이 예민하게 인지되어 그런 걸 먹으면 몸 안에서 어떤 특정한 감각이 인지되고 그 감각은 더 깊이 무의식을 탐구하는 일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이 하나라는 진실을 직접 목격하는 지경에 이르면 자연히 다른 생명을 죽일 수 없게 될 것이다. 그제야 이른바 범부가 흔히 얘기하는 생명 존중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살생 경계, 생명 존중에는 명백하고 구체적인 이유가 있다. 그냥 막연히 모든 생명은 존엄하기 때문에 죽이지 말라는 게 아니다. 그래서 명상에서는 육식을 금지하지는 않는다. 물론 센터에서 지내는 동안은 오신채도 제외한 채식을 제공받지만, 일상 생활에서는 그것을 규율로 안내하지 않는다. 


이같은 배경을 고려해서 따져보면, 고기를 섭취하기 위해 특정 동물과 물고기를 잡아 먹는 걸 따로 금기시할 이유가 없다. 육식은 내 주위를 얼쩡거리는 벌레를 죽이는 행위와 엄연히 다르다. 동물을 혐오해서 하는 행위가 아니다. 인간의 잔인성이나 이기심 때문도 아니다. 먹이 사슬과 같은 자연생태계다. 비건이 등장한 것은 현대의 놀라운 식품제조 기술로 고기를 대체할 수 있는 음식이 풍요로워진 덕이지 그런 기술이 없던 전근대나 더욱이 원시시대에 육식 거부는 죽음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좋아한단 이유로 지나치게 많이 먹는 건 오계에 어긋날 것이다. 탐닉과 집착의 마음을 연습하는 것일 테니.)


인간에 대해서도 예외 아니다. 인간처럼 모여 사는 모든 영장류는 서열 질서를 갖는다. 그것은 자연생태계와 같은 본능이자 섭리이고, 그러한 질서는 피 튀기는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원시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중세 기사도 정신이 생기기 전까지 사람들은 아무데서나 툭하면 결투를 벌였고 그 바람에 주위에 있던 무고한 사람이 적지 않은 피해를 보았다. 홉스의 ‘만인을 위한 만인의 투쟁’은 그런 모습에 대한 고찰이었다. 그럼에도 인간 세상의 흐름은 나머지 영장류 동물과 달리 그 과정에서 가능한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지 않고 다치지도 않는 방향으로 진화되어 왔다. 그것이 오늘날 각종 경쟁, 시합, 대회 등이다.


그러나 여전히 아직 혈투를 대체할만한 방법을 찾지 못한 분야도 있다. 나라 사이가 대표적이다. 나라 사이 혈투는 서열이 정해져 있으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힘의 우위가 비등해지거나 누군가 도전하면 피할 수 없다. 나라 사이 뿐만 아니라 한 나라 안에서 정치 세력 사이도 때로 혈투를 부를 수 있다. 과거 한국의 5.18, 4.3, 시리아 내전 등등처럼. 그러면 서로 죽일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직접 당사자 아닌 사람들도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중세 기사 계급이 사람 많은 시장이나 광장이든 상관하지 않고 결투한답시고 말을 타고 서로를 향해 칼을 휘두르고 다니느라 주위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거나 경제적 손해를 입었듯이.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은 서열 질서라는 본능에 따른 일이란 점에서 어쩔 수 없기도 하다. 군비경쟁을 비롯해서 각종 경쟁으로 압도적 힘을 가지려는 건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런 참혹한 일을 막기 위해서,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안타까운 죽음과 희생에 냉담해도 괜찮다는 의미가 아니다. 모여 사는 영장류의 이러한 특징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인간과 삶을 긍정하고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영화 기생충부터 드라마 오징어게임 그리고 한강의 소설까지, 세계적으로 인정 받은 한국 창작가의 이야기가 하나 같이 음울하고 음침한 데에는 근본적으로 인간과 삶에 대한 혐오와 부정이 있기 때문인 듯해서다. 메시지는 의미 있을 지 몰라도, 독자 사이에 ‘안 본 눈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침울하고 어두운 분위기라는 소설 뿐만 아니라 아이를 낳지 않으려 했던 이유, 소설가란 뭐냐는 (김창완) 질문에 뜬금없이 무해한 직업이라는 답변, 전쟁하고 있는 데 무슨 수상 축하 기념이냐고 했던 한강의 인터뷰를 보면서 더 그런 인상을 받았다. 


흔히 좌파 이상향이라고 하는, 아무 것도 죽이지 않고 평등 속에서 서로 양보하고 사이 좋게 나누면서 지내는 도덕적 인간 세상의 평화는 필히 인간의 본능을 거세하고 완전히 새로이 개조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즉, 현실적으로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세상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데 현실은 시궁창과 같으니, 그 같은 시궁창을 만드는 인간을 혐오하지 않고, 그런 삶을 즐기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삶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수박 맛 어쩌고 하면서 일상의 작은 것에서 의미와 즐거움을 찾는 척해도 금세 다시 저 멀리서 벌어지는 전쟁을 끌여다 붙이면서 막연한 얘길하고, 뜬금없이 무해하다느니 하면서 직업적 일에 있어서 해로움을 언급하는 건 저변을 이루고 있는 염세적 인간관 아니고서는 나오기 어렵다. 그런 사람이 평화를 말하는 것은, 마치 인간 사랑을 의미하는 것 같지만, 완벽하지 않은 인간 본능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그것은 인간 혐오를 위장하는 표현에 그칠 수밖에 없다.


삶과 인간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밝은 마음은 모여 사는 영장류의 서열 질서 본능, 그로 인해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피해와 희생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에만 생긴다. 무고한 피해와 희생을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세상을 진화시키는 건 오직 그렇게 삶과 인간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밝은 세계관, 인간관을 가진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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