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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랑 Jun 20. 2021

불편한 부지런함

너무 아쉬운 일이지만, 또 너무나 당연한 일

11월 결혼을 앞두고 신혼집에서 먼저 살림을 꾸렸다. 전세 기간이 끝나는 남자 친구가 신혼집에 혼자 살게 될 경우 혼자만의 질서가 신혼집에 생겨버릴까 우려하는 마음이 그 동기였다. 어렵게 엄마에게 말을 꺼냈고, 생각보다 쉽게(?) 엄마의 허락을 받았다. 문제는 아빠였는데, 아빠는 끝까지 허락하지 않고 토라져있었지만 결국엔 받아들이는 느낌이 되었다.


이 곳에서의 내 생활은 왠지 살짝 각이 잡힌 모습이다. 편하고 좋지만 깨끗한 새 공간을 지켜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우선 집이 좁다 보니 치울 공간이 충분히 소화 가능한 범위인 게 한몫할 수도 있지만, 집에서의 내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이 모습을 엄마가 아니 특히 아빠가 볼까 봐 걱정이 될 정도로 나는 이 공간에서 부지런하다.


밥을 먹자마자 곧장 설거지하는 것, 하얀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들을 발견하면 곧장 청소기를 돌리는 것, 샤워를 할 때 거품이 여기저기 튀었을까 살피고, 배수구에 머리카락까지 정리하고 나오는 것, 자고 일어난 침대 이불을 깔끔히 정리하고 나오는 것, 분리수거가 생기면 언제 버릴지 계획하는 것, 쌓인 빨래를 보며 언제 돌려야지 계획하는 것 등.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들.


원래 집에서 내가 담당하지 않던 일들에 관해 스스로 챙기기 시작하며 나는 부지런해졌다. 사실 나는 이곳에 있으면 주말에도 일찍 일어나고 하루를 길게 쓰고 일찍 잠드는 나의 패턴이 좋다. 나 스스로 내가 원하는 대로 하루의 시간을 제약 없이 쓰는 데 그 과정에서 나만의 규칙이 생기는 그 느낌이 좋다. 그러면서 동시에 마음 한편이 불편하다. 


어느 주말 혼자 있는 시간에 엄마와 언니를 초대했다. 아직 정리되지 않아 정신없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구색을 갖췄을 때였다. 여기저기 둘러보다 동그랗게 말려 화장실 장을 채운 수건을 보며 엄마가 물었다. "수건 누가 갰니?"  "나랑 오빠랑 했지" 그러자 엄마는 '결혼하면 다 잘한다더니 그 말이 맞네' 했다. 결혼한 딸이 엉망으로 살길 바라는 엄마는 없겠지만, 내 손을 떠난 딸이 야무지게 해 놓은 모습도 꽤나 서운한 듯 보였다.   


먼저 결혼한 친구에게 신혼집에 들어가는 것에 관해 이야기를 하니 친구가 말했다. 그 시간이 유일하게 부모님과 함께 살 마지막 시간이니 조금 더 충분히 시간을 쓰면 좋겠다고. 그렇겠다 싶었다. 그리고 나는 왔다 갔다 하기로 맘을 먹고, 이곳으로 이사온지 약 3주 동안 3번 집에 갔던 것 같다. 사실 나는 이제 본가에 가는 것보다 이 집에서 사는 것이 벌써 더 편해져 버렸다.


하지만 이상한 일은 떨어져 있기 때문에 평소보다 엄마, 아빠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한다는 것이다. 같이 집에 살 때는 아빠가 스킨이 떨어졌다고 말한 지 몇 주가 지났는데도 까맣게 잊고 사다 주지 않다가 어느 퇴근길에 불현듯 떠올라 집으로 주문을 하게 되고, 같이 살 때는 어차피 또 집에 가면 볼 거고 상태도 별로 안 좋으니 다음에 들러야지 하고 지나가던 엄마 일하는 곳에 들리게 된다.


반대로 엄마 아빠도 그런 것 같다. 생일날에는 너무나 당연하게 엄마가 끓여주던 미역국인데, 생일 전날 미역국 누가 끓여주냐며 걱정해주는 엄마의 말에 슬프기보단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생일날 아침 출근길에 가족 단체 카톡방에서 생일 축하한다는 아빠의 메시지를 받았을 때도 그랬다. 처음으로 받아보는 메시지인가 싶을 정도로 낯설면서도 기뻤다.


나는 우리들 사이에 이런 마음이 생긴 게 너무 좋다. 이 생각을 엄마 아빠와 함께 건전하게 공유하고 싶은데 직접 말할 용기가 없다.


31년을 함께 살아온 우리가 떨어져 살 게 되는 것은 너무나  아쉬운 일이지만, 또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동안 자취도 한 번 안 한 손 많이 가는 철없는 막내딸이기에 더 낯설 수 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서로 더 건강하게 받아들이고, 더 서로를 그리워하고 애틋해하는 관계로 발전하는 것은 어떨까? 이번 변화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좋은 계기라고 믿고, 엄마도 아빠도 나도 함께 같은 생각이 되길 바란다.

   

에 부모와 관련된 내용이 나오면 나는 항상 눈물을 줄줄 흘리며 슬퍼하는데, 엄청난 공감 능력 때문인지 스스로 못난 딸이라 생각해 찔려서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내가 일요일 아침 아주 오랜만에 키보드를 펴고 앉아 이 마음을 타닥타닥 써 내려가는 이유는 언니를 통해 이 글이 엄마와 아빠에게 전달되길 바라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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