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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 여행자 Jul 29. 2021

이곳의 시간은 왠지 달리 흘러갈 것만 같다

샛길로 빠지다, F1963

엄마가 퇴직하시고 열흘이 지났다. 때마침 옥수수 출하 시기여서 옥수수 따다 파느라 바빠서, 코로나 시국이라 외출은 엄감생심이라는 등등의 이유로 제대로 나들이 한 번을 못 나가셨다. 지난해 가을 일흔 번째 엄마 생신 때 아버지께서 내걸으셨던 가족 여행은 잊어버리신 건지, 아예 물 건너가버린 건지 까맣게 잊어버린 것 마냥 누구도 언급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 내일 다 같이 바람 좀 쐬고 오면 어떨까요."

"나는 안 갈란다, 둘이 다녀와라."

"그럼 점심 혼자 챙겨 드셔도 괜찮으시죠."

공식적으로 당당히 나설 수 있는 엄마와의 단둘이 외출, 내가 원하던 나들이의 그림이었다.

"엄마 나랑 오늘 소풍 가실래요, 자갈치 시장보다 재미있지는 않을 거지만 그래도 같이 바람 한 번 쐬러 갈까요?"

"난 기운도 없고 그냥 집에서 쉬고 싶은데."

"집에 있으면 계속 가라앉기만 하고, 기분전환 겸 나갔다 와요."

뜨거운 폭염 속이지만 파란 하늘에 새하얀 구름, 엄마와 밀린 이야기를 뭉개 뭉개 피우기엔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

"인정머리 없고 융통성이라고는 꽉 막혀서는..."

우선 아버지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썰어대기부터 시작했다.

연고가 많지 않은 도시 부산은 친척 경조사로 들르거나 지나치는 경유지였다. 그 이전을 거슬러 가서는 어릴 적 수학여행차 둘러보았던 해운대 해수욕장, 용두산공원, 금강 수족관, 유엔 국립묘지 등이 꼽는 관광지이고, 이어 방문한 코카콜라, 송월타월 등의 공장으로 견학의 도시로 기억되는 곳. 어느 해 부산국제영화제 취재차 찾았던 PIFF광장과 남포동, 태종대 정도가 내가 알고 있는 부산의 단편적인 모습이었다.

이전 공장부지를 복합 문화공간으로 리모델링 한 F1963은 갤러리와 중고서점, 카페, 레스토랑, 도가, 도서관, 전시장, 야외 정원 등이 골고루 포진해 있는 명소로만 접하고 있었다. 언젠가 이 미지를 방문해 보리라 벼르고만 있던 터였는데 때마침 이곳에서 인상 깊게 읽은 책의 작가가 그동안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고 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인파가 몰리는 곳이 염려스러웠는데 다행히(?) 예상 이하로 사람이 많지 않아 한산하기까지 했다.

방역상으로나 함께 간 엄마를 생각하면 이 한산함이 무척이나 다행스러웠지만 북적북적 붐비었으면 좋았을 공간이었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한, 한때는 산업의 최전선이었던 공장을 사람들로 다시 돌리겠다는 취지로 마련된 곳답게 큰 부지와 넓은 공간을 새로운 문물들로 채우기에 적합해 보였다.  

F1963, 이름 그대로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공간이었다. 와이어 공장이었던 이곳은 2008년 이후 창고로 버려졌던 공간을 2016년 부산비엔날레 특별전시장으로 활용된 이후 부산시와 부산문화재단, 고려제강이 함께 와이어 공장의 건물 형태와 골조만 남기고 리노베이션 되었다고 한다.

각각의 공간마다 개성 있게 와이어로 구성하거나 공장의 시설물을 그대로 남겨두었다. 시멘트 기둥과 벽채, 계단 아래 옛 건물의 기반이 되었던 돌 마저 오랜 시간이 품고 있는 본래의 정체성을 굳건히 지키고 것처럼 보였다.

오래된 것과 시공간을 새로운 시간으로 재해석해 창조해낸 새로움이 함께 어우러지는 공간들이 인상적이었다. 과거와 현재가 서로의 시간과 공간을 조금씩 내어주고 차지하며 공존해 있는데 그것이 또 다른 새로움으로 느껴지는 곳이었다. 이날 중정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뜨거운 햇살이 작열하는 지붕 위로 하얗게 피어오르는 구름과 어우러져 한 폭의 액자가 되었다. 이곳에서 다양한 공연과 행사들이 열리면 운치 있는 야외공연장이었을 것 같은 중정에는 아랑곳 않는 폭염이 가득 쏟아지고 있었다.

수제 맥주집 Praha993와 복순도가 막걸리의 술통 안에서는 시간으로 익어가는 느림의 술들이 옛 공장 터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맥주가 발효되고 있는 양조장과 막걸리가 숙성되고 있을 복순도가의 독 항아리, 발효주들과 어울리는 음식들이 함께 선보이는 파인 다이닝. 시간의 흐름을 직접 맛보는 멋스러운 공간의 탁월한 콘셉트였다.

가장 아쉬웠던 복순도가, 때마침 휴무일이었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예술도서관은 예술과 디자인, 건축 분야에 특화된 도서관으로, 인문학 강좌와 다양한 장르의 작은 음악회가 열린다고 한다. 모든 것이 멈춘 코로나라는 지리멸렬한 시간 속에서 문화와 예술, 트렌디한 상업공간으로 새롭게 재창조된 이곳이 어떤 흐름의 세월을 안고 흘러갈 것인지, '이 아이가 어떻게 성장해 나갈까'라는 오지랖 같은 엉뚱한 상상을 해보았다.  

"엄마, 재미없지요? 오늘따라 막걸리 집까지 문을 닫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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