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뜩 쌓인 빨래를 세탁기에 욱여넣고 세제통을 집어 들었다. 조금만 써도 기가 막히게 때가 잘빠진다는 광고에 혹해 어제 새로 산 세제였다. 빨래 양에 따른 권장 사용량을 잠시 살피다가 이내 한 컵 가득 부어 세탁기 안에 탈탈 털어 넣었다.
‘나원참, 방금 세탁기에 넣은 빨래의 무게가 얼마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러고 보니 세제를 바꿀 때마다 이랬다. 세제마다 권장 사용량의 기준이 달랐고 도대체 얼마만큼의 세제를 사용해야 빨래도 잘 되고 환경도 심하게 오염시키지 않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자리에 앉아 인터넷을 뒤졌다. 설명의 문제인지, 이해의 문제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세제마다 비슷한 설명을 하고 있었고, 때문에 나와 비슷한 의문과 불편을 갖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날부터 ‘이 ‘문제’를 개선할 만한 방법이 없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출원된 특허와 선행기술을 조사했고, 나름의 아이디어를 동원해 제품을 디자인했다.
딱 여기까지였다. 이다음은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어떤 단계가 있는지 아는 바가 없었다.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생각들을 잔뜩 토해 놓은 노트 몇 장만 남기고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몇 주 전에는 비누에 대한 아이디어가 그랬고, 몇 달 전에는 수유 브라에 대한 아이디어가 그랬다. 결과물도 없고 죄다 앞 단의 생각들이었다.
몇 번 반복되다 보니 궁금했다. 도통 하나로 꿰어지지 않는 이런 생각들이 나에게, 구체적으로는 나의 커리어에 무슨 도움이 될까 하고. 답을 찾지 못했다. 의심은 거둬지지 않았고 종국에는 ‘쓰잘 때기 없는’ 생각들만 하는 내가 한심했다.
와중에 같은 회사 입사 동기인 그녀를 만났다. 동기라고는 하지만 회사에서는 몇 번 대화를 나눈 적도 없는 사이였다. 그녀는 두 번째 육아휴직 중에 있었고, 나는 세 번째 임신이 유산으로 끝나 소파술 이후 휴가 중인 참이었다. 우연히 여성 커리어에 대한 인스타그램 라이브 방송을 함께 듣고 있음을 알고 연락이 닿아 내친김에 얼굴도 보자 했다. 그냥,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동지애, 뭐 그런 것이었달까.
단 한 번의 만남으로 확답할 수 있을까 싶지만, 그녀와 나는 결이 비슷한 사람이었다. 적어도 '나'와 '내 길'을 찾고 싶어 하는 마음만큼은 아주 많이 닮아 있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녀는 자신이 무엇에 관심 있고 무엇을 잘하는지 이제 대략은 아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들이 그녀의 이야기에 잘 녹아 있었다. 방법을 찾고 있다고 했지만, 한 발 떨어져 있는 내가 보기에는 이미 그녀의 길이 시작된 것처럼 보였다. 덩달아 들떴고, 부러웠다.
"그동안 읽고 싶은 책을 읽다 보니 어느 한 분야로 모인다는 걸 알았고, 그래서 그 분야 책만 계속 읽었더니 이제는 누가 무슨 얘기를 하면 '아, 그건 이런 책에 보니 이런 내용이 있더라고.' 정도로 얘기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나도 해보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분야 책만 파고들어 나름의 전문성을 키우면 지금의 불안이 조금은 안정될지 궁금했다. 좋아하는 분야가 너무 광범위한 게 문제라면 문제라서 그녀는 어떻게 책을 읽었는지, 어떻게 딱 한 분야를 찾을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한 달이 지나도록 그녀의 말이 잊히지 않았다. 안부를 핑계 삼아 연락을 했다. 지금은 무슨 책을 읽냐고, 어떤 내일을 준비 중이냐고 물었다. 여전히 읽고 쓰는 요즘을 보내고 있다는 그녀의 근황을 듣다 문득, 그녀와 함께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회사에 입사해서 똑같이 두 번의 육아휴직을 거친 두 여자가 미래를 꿈꾸는 방식의 다름에 대해서. 그녀는 툭 던진 나의 날 것 같은 의견에도 손을 잡아 주었고, 우리는 서로에게 ‘글쓰기 메이트’가 되었다.
그런데, 어라? 이건 내가 그녀에게 궁금했던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결론인데?
뭐, 쓰다 보면 알게 되겠지. 내가 궁금했던 그녀의 방법도, 그녀에게 글 쓰자 제안했던 나의 진짜 마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