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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두소이 Mar 17. 2020

06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영광과 그 나라의 확장

  우리는 앞에서 비전이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했고 이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동일함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으로부터 “하나님의 나라”를 도출할 수 있다고 하였다. 우리는 이제 이 “하나님의 나라” 사상을 살펴 보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서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비전”에 대해서 좀 더 깊은 이해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신구약 성경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주제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요약할 주제는 예수님이라고 알고 있을 것이다. 구약은 오실 예수님, 신약은 오신 예수님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머리말에서도 언급했듯이 예수님의 본질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통해 극대화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를 창조함으로써 시작해서(창1:1)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계22:1,2)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신약에 와서 생긴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구약에 많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이사야 선지서에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65:17) 또한 예수님께서도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하신 말씀이 바로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다.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5)

  “하나님의 나라”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 너무나도 당연한 개념이었다. 이에 대해서 존 브라이트는 자신의 책 “하나님의 나라”(컨콜디아사)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반복적으로 언급하였지만 한 번도 멈추어 서서 그 말을 정의한 적이 없다. 또한 청중 중 누구도 그를 가로막고 “선생님이여, 선생님이 그렇게 자주 사용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라고 묻지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예수는 그 용어를 마치 그것이 이미 확증되어서 이해되어지고 있는 것처럼 사용하였고, 사실이 그러하였다. 하나님 나라는 모든 유대인들의 어휘 가운데 들어 있는 말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이미 이해하고 있는 것이었고 또 간절히 고대하던 것이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생소할 수 있지만 거리에서 외치던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의 천당과 다를 바 없는 개념이다. - 참고로 막1:15에 대응되는 마4:17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천국’으로 번역되어 있다 - 하지만 ‘천당’이나 ‘천국’은 이원론의 영향 및 선입견으로 인하여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이 세상과는 동떨어져 보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기에는 부적절하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용어 그대로 설명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 사상은 너무도 방대한 개념이기 때문에 한 챕터에 담아 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따라서 여기에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는 비전을 이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자.



  국가의 3요소


  중고생 시절 사회시간에 배운 “국가의 3요소”를 떠올려 보자. 그것은 “주권, 백성, 영토”이다. 이 중에서도 “주권과 백성”이 더욱 중요한데 예를 들어 외국에 있는 대사관 부지가 비록 그 땅이 본국의 것이 아닐지라도 자국의 주권이 있으므로 자국의 영역이 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심지어 자국의 범죄자가 대사관으로 피했을 때 그 해당국가에서도 바로 체포하거나 어쩌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재 이스라엘 국가도 – 물론 여전히 분쟁이 존재하지만 – 영토가 없이 지내오다가 주권과 백성이 유지되어 1948년에 국가를 다시 세울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주인되시는 나라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존재하는 나라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예수님의 주되심과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성립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하게 성취되진 않았지만 지금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고 말할 수 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 어느 찬송가 가사에도 분명히 나와 있다. “…내 주 예수 계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가 예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의 모형 –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하나님의 나라가 마지막에 궁극적으로 성취되기 전까지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선 하나님의 나라를 눈으로 볼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모형이 존재한다. 그것은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이었고 신약에 와서는 교회가 이를 대신한다.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의 관계에 대해서는 뒤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우선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국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모형으로서 이스라엘은 아브라함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큰 민족”(창12:2)을 이루실 것임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본래 이름인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꾸실 때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다.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17:5~7)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이후 이삭과 야곱을 거쳐 요셉에 이르 족장시대를 거쳐 애굽에서의 400년(창15:13)동안 노예생활을 하고 출애굽해서 가나안에 입성하기까지 나라의 형태를 갖추진 못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나라”를 염두해 두셨다. 예를 들면 출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32:10) 이에 대해 모세는 오늘날의 중보기도를 하면서 “주의 백성(출32:11)”이라고 말한다. 가나안 입성 후에는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렸는데 사사의 위치는 왕으로서 군림하는 자리가 아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에 맞춰 하나님이 일으키신 구원의 도구였다.(삿2:16,18, 삿21:25)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그 백성을 직접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였다.

  이는 사사시대를 끝내고 왕정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스라엘 백성은 블레셋으로부터 고통받고 있었고 사무엘의 아들들이 그 당시 사사였지만(삼8:1) 사무엘과 달리 정직하게 행하지 않자 왕을 세워 달라고 요청한다.(삼상8:5)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버렸다고 말씀하셨다.(삼상8:7)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있어 왕이 되신다고 기록한다.(삼상12:12)

  이것은 이스라엘이 왕을 세운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스라엘은 사울이 초대 왕으로 추대되어 비로소 국가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었다. (삼상12:22)

오늘날은 민주주의로 인해 국민이 곧 주인이자 백성이지만 왕정국가에서는 왕이 주인이며 국가였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 당시 루이 14세가 “짐이 곧 국가다”라고 말했다는 것은 어쩜 당연한 일일 것이다. 왕정국가야 말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이 주인되심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이 왕으로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것임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해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의 전성기를 거치고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국가가 나뉘어 역대왕들을 거쳐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로마시대에 이르러 속국으로 전락한다. 유대인들 - 신약시대에 이르러 이스라엘 백성은 유대인으로 불리게 된다. - 은 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가져올 메시아를 기대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자 이 세상에서 먹을 것을 해결해 줄 사람으로 여겼고(요6:26), 그 기대가 무산되자 떠나 버렸다. (요6:66)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음을 여러 차례 말씀하셨다. 이 중 빌라도와의 대화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요18:36,37)



  교회와 하나님 나라

 

  구약의 하나님 나라 모형인 이스라엘은 신약에 이르러 교회로 완전히 대체되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12지파는 유명무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야고보서에는 초대 교회 성도들과 이스라엘 12지파를 동일하게 부른다.(약1:1) 사도 바울 또한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 편지를 쓰면서 하나님의 이스라엘(갈6:16)이라고 부른다. 존 브라이트는 그의 저서 “하나님 나라”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마치 어떤 특정한 날에, 말하자면 베드로의 고백과 함께(마16:16-17) 혹은 오순절에(행2; 참조, 1:8) 시작된 것처럼 우리는 교회의 기원에 대해 물을 필요가 없다. 교회는 어떤 날에 창설된 것이 아니다. 때문에 우리는 어떤 공적인 기념일을 지킬 수 없다. 그것은 그 나라의 부름에 복종하였던 예수 주위에 모인 소수의 사람들 가운데서 시작된 것이다. 아니 그것은 옛 계약 자체 안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참 이스라엘을 고대하였던 구약성서 안에서 시작된 것이다. 신약성서가 선언하는 대로, 약속된 왕국을 물려받기에 적합한 참 이스라엘에 대한 모든 기대 – 남은 자 개념 안에 가장 잘 요약된 기대 – 가 교회 안에서 성취되었다.” (존 브라이트 “하나님 나라” 275p~276p)



  교회는 바로 하나님 나라 그 자체이다. 하지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두 종류의 교회 - 가시적 교회와 비가시적 교회 - 가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라는 종교로서의 가시적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은 될 수 있을 지 몰라도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가시적 교회와 비가시적 교회를 혼동한다. 가시적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도 결국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 하나님의 백성이므로 “하나님 나라”라고 할 수 있지 않느냐고 혹자는 반문할 지 모른다. 그 자체만 놓고 보면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가시적 교회가 하나님 나라로 동일시하는 순간 가시적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사나 형식들이 율법화 될 수 있고 이원론에 의한 구조적 오류가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인양 받아들여질 위험이 있다. 하나님은 교회를 위한 건물을 짓지 않으셨고 특정 종파를 만드시지도 않으셨다. 다만 예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셨고 그 백성들이 모여 교회, 즉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 하셨다.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백성이 모인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는 마지막 때 “우주적 예배”를 드릴 것이다. 앞서 말한 “우주적 예배”의 비전은 달리 말하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마막에 궁극적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므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비전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내 개인 사명선언서에 명시한 비전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과 그 나라의 확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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