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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두소이 Jun 04. 2020

08 흘러넘친 사랑

사랑이신 하나님의 증명

  우리는 글을 읽을 때 그 글의 “목적”을 살핀다. 그리고 윈도우 쇼핑을 할 때 특이한 물건을 보면 “이건 왜 만든걸까?”라고 자문하면서 그 물건의 “목적”을 살피곤 한다. 모든 창조물은 “목적”이 있고 기독교는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말함으로써 특별한 “목적”이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그 “목적”은 우리가 계속 살펴보고 있는 “비전”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비전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리가 여기서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이 그분을 예배하는 주체로서 하나님 나라를 구성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 설명하자면 우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무언가를 만들거나 구매하는 경우 대개는 그 물건이 없으면 그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고 느끼는 경우들이 있다. 이러한 생각을 “인간”에게 적용하여 마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인간이 없다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수 없을 것만 같다고 생각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예를 들어 “사랑”을 생각해 보자. “사랑”은 우리가 논의하는 비전인 “하나님의 영광”을 대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개념이다. 교회 내에서 숱하게 불러 본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찬양을 떠올려 보면 인간이 없었다면 하나님은 사랑할 수 없었을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사랑”은 본질상 관계에서 성립되는 언어로 복수의 인격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에서 사랑은 삼위일체의 증명이라고 진술하신다.

  “즉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사실은 어떤 의미에 있어 삼위일체의 증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시고 영원한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항상 사랑하신 누군가가 반드시 존재해야 합니다.”

  태초 전부터 사랑이신 하나님은 그 안에서 이미 완전한 사랑의 관계가 성립되었고 사랑해야 할 대상이 부족해서 추가로 필요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완전하심을 이해하기 위해서 삼위일체를 살펴보자


삼위일체 하나님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다. 사실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해 신학자들이 만든 용어이다. 그럼에도 삼위일체의 개념은 성경 도처에 깔려있다. 성부도 하나님이시고, 성자도 하나님이시며, 성령 또한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하나님은 한분이라고 성경은 진술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6:4)

  삼위일체 교리와 관련된 표현들을 몇 가지 살펴보자.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본질상 단일하신 신격 안에 삼위가 계시는데 본질과 능력과 영원성에 있어서 동일하시다. 이들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아다나시우스 신조(Athanasian Creed)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성부께서는 하나님이시다. 성자께서도 하나님이시다. 성령께서도 하나님이시다. 그렇지만 세 명의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한 분이시다. 성부께서는 주님이시고 성자께서도 주님이시고 성령께서도 주님이시다. 그렇지만 세 명의 주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한 분의 주님만이 계신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독교 진리에 따라 각각의 위격을 하나님이시며 주님이시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동일한 진리에 의해 우리는 세 명의 하나님이나 세 명의 주님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금지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어도 이 삼위일체의 개념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의 관계도 인간을 창조하신 온전한 목적도 바로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은 한 분이라서 사랑할 대상이 없다고 한다면 마치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사랑의 대상이 없어서 사랑하고 싶어서 사람을 창조한 것처럼 되어 버린다. 실제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은 더욱 불쌍하게 된다. 왜냐하면 사랑의 본질을 모르는 하나님께서 사랑을 연습하기 위해 사람을 만드신 것처럼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는 사람이 결혼하고 애를 낳아 부모가 되어 첫 자식에게 갖는 애틋함과 비슷해 보인다. 첫 자식에 대해 부모로서 연습이나 경험이 없어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키우지만 둘째 부터는 첫째의 경험으로 큰 무리없이 키우는 경우와 유사해진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4:16)라고 기록한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완전하신 삼위의 하나님께서 그 안에 완전하고 흠이 없는 사랑의 관계가 성립한다. 그 사랑이 넘쳐 흘러 앞서 이야기한 대로 하나님 자신을 기뻐하기 위해서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신 것이다.


흘러넘침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일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인간의 존재가 없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완전하시다면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유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단지 우리는 성경에서 계시된 내용과 유한한 틀 안에서 이해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흘러넘침”으로 설명하고 싶다. 예를 들어 물이 가득찬 그릇에 물을 더 부으면 물은 흘러 넘친다. 그러나 그 그릇은 여전히 완벽하게 물로 가득차 있다. 그릇이라는 유한한 틀로 설명하기 때문에 한계가 있지만 흘러넘침에 대해 일부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성경에 나오는 흘러넘침에 대한 두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첫째,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와 대결을 펼친 엘리야를 들 수 있다. 엘리야는 누가 하나님인지 해보자고 제안한다. 그 시험은 제단 위에 제물을 놓고 누가 불을 내려 제단을 태우는지 보자는 것이다. (왕상18:23,24) 먼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가 다양한 의식을 치르지만 불은 내려오지 않았다. (왕상18:25~29) 엘리야 차례가 되자 엘리야는 무너진 단을 수축하고(왕상18:30) 단 주위에 도랑을 만든다. (왕상18:32) 그리고 제물 위에 물을 붓고 (세번 반복한다.) 그 물은 단 주변의 도랑을 가득 채운다. (왕상18:33~35) 그리고 기도하자 불이 내리고 그 불은 젖은 제물을 모두 태우고 주변 도랑의 물을 모두 마르게 한다. (왕상18:36~38) 엘리야는 불이 우연히 발화될 가능성을 모두 제거함으로써 바로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이 불을 내린 진짜 하나님이심을 입증했다.


  둘째, 오병이어를 들 수 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가지고 축사하시고 떼어 나눠줄 때 남자만 오천명(여자와 아이포함 약 2만명으로 추정)이 다 배불리 먹고 열 두 바구니 차게 거두었다. (마6:41~44) 왜 열두 바구니나 차게 남기셨을까?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공급하실 때 적정량만 먹도록 하셨었는데(출16:18) 왜 신약에 와서 양식과 관련한 기적을 행하실 때 양식이 남도록 하셨을까? 나는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해 나중에 누군가 일말의 어떠한 핑계도 대지 못하도록 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학창시절 수학시간에 배웠던 무한의 개념을 떠올려 보자. 무한에 자연수를 빼거나 더해도 여전히 무한이 된다. 무한하다고 여겨지는 이 우주는 여전히 확장한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가 체감하지 못할 뿐 무한의 개념은 우리 주위에 널려 있다.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신 사랑인 것이다. 바로 이 무한하신 사랑의 흘러넘침에 따라 인간은 창조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인간의 창조는 하나님께서 사랑이심을 증명하기 위함일 것이다.


인간의 존재이유


  냉정하게 말한다면 인간은 하나님 앞에 불필요한(?) 존재이다. 성경에서도 인간이 악을 행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못한 경우 모두 멸하셨던 경우도 있고 신인동형동성론적 표현으로 사람을 창조하신 것에 대한 후회를 언급하시기도 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6:5~8)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32:9,10) 그러나 그런 하나님께서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우리를 통해 기뻐하신다고 기록한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3:17)

 인간을 멸하시려고 하시긴 했지만 꼭 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노아의 홍수 사건에서는 노아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으며 족장시대에는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특별히 부르셨고 출애굽시대에는 실제 그렇게 되진 않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을 모두 멸하고 모세를 통해 큰 나라를 이루려 하셨다. 결국 하나님의 기쁨이 되지 못하면 멸망당할 수 밖에 없는 불필요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을 기쁨이 되기 위해서는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인간은 하나님 앞에 원칙적으로 불필요하지만 조건적으로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이 되는 한 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조건적”이라고 해서 우리의 행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고(히11:6상) 이 믿음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선물이다. (엡2:8,9)


  사람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옛날이야 가문을 이어간다는 게 중요한 사회적 가치였기 때문에 자녀를 낳았는지 모르지만 요즘 세대는 다르다. YOLO(You Only Live Once)가 유행이듯이 자녀를 꼭 낳아야 할 분명한 이유가 없다. 자녀를 많이 낳으면 경제적으로 살기 힘들다고 여기기 때문에 자녀를 적게 갖거나 아예 자녀를 갖지 않거나 심지어 요즘은 비혼선언이 늘고 있다. 결국 자녀를 갖든 안갖든 결혼을 하든 안하든 우리 선택의 본질은 각자의 인생관에 근거한 이기심의 표출일 뿐이다. 즉 자녀를 갖는 부모는 그 자녀들로 인하여 기쁨과 즐거움을 얻기 위함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가 비슷하리라 생각된다. 인간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받기를 원하시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실패해도 버려두거나 포기하시지 않으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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