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화씨 450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정국 Mar 21. 2021

누군가의 터널 속 어둠의 일부가 되지 않기 위해

김준혁, <아픔은 치료했지만 흉터는 남았습니다>

   

“상처와 고통의 양을 저울 위에 올려놓는 일이 비정한 일인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비정한 일은, 네가 아픈 만큼 나도 아프다고, 그러니 누가 더 아프고 덜 아픈지를 따지지 말자고 말하는 일일 것이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실제로 덜 아픈 사람이다. 지배하는 사랑과 미성숙한 사랑의 공통점 중 하나는 저울을 사용할 줄 모르거나 사용하지 않으려 하는 데 있다.”

-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53쪽     


  사람들은 몸이 아플 때 의사를 찾는다. 의사가 묻는다. 어디가 불편해서 왔어요? 여기 여기가 아파서 왔어요. 그래요, 얼마나 아파요? 하나도 안 아픈 게 0점, 죽을 만큼 아픈 게 10점이라면요. 음…(죽을 만큼 아픈 게 얼마나 아픈 걸까?) 한 3~4점 정도 될 것 같아요. 어휴, 고생이 많았겠어요. 일단 약을 이것이랑 저것이랑 드려볼게요. 평소에 스트레칭 많이 하시고요. 한동안은 무리하지 말고 좀 쉬세요. 차도가 없으면 다시 오시고요. 다른 증상은 없어요? 네, 다른 건 괜찮아요. 다행이네요.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약 챙기시고,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아픔의 정도를 숫자로 표현하는 일은 보다시피 불가능하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죽을 만큼 아픈’ 정도는 다르므로. 그러나 우리는 정확하지 않음에도 상대방의 아픔을 계량해야만 한다. 그것마저 없다면 처방할 진통제의 용량도 알 수 없고 몸은 움직여도 되는 상태인지, 더 큰 병은 아닐지 알 도리가 없으며, 그러므로 어떤 말은 건네도 괜찮은지 어떤 말은 해서 안 되는지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비정해 보이더라도 누가 얼마나 아픈지 따져야 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거기에 사용할 저울을 더 정확한 것으로 개량해야만 한다.

  세상의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고 그것을 탓하는 이들 또한 잘못을 저지른다. 항상 그른 이가 없듯 항상 옳기만 한 사람 또한 없다. 이들을 저울 위에 올린다면 옳음과 그름 사이 어딘가 위치할 것이다. 의료의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영웅이기만 한 사람도 없고, 악당이기만 한 사람 또한 없다. 의사와 환자 또한 사람이므로 우리는 선함과 악함 사이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우리는 비정해 보이더라도, 그것이 많은 이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일일지라도, 누가 언제 어디에 있었는지,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따져봐야만 한다.

  치과 의사이자 의료윤리학자인 저자가 쓴 <아픔은 치료했지만 흉터는 남았습니다>는 그래서 읽는 이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책이다. 그가 전작 <누구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에서 철학과 문학, 영화와 시와 소설의 영역들을 가로지르며 의료의 현실과 미래의 좌표를 그려냈다면 이 책에서 그는 과거로부터 ‘배송이 잘 되지 않은’ 편지들을 구출해낸다. 뛰어난 업적을 세웠음에도 소통에 서툴러 논란의 대상이 된 이그나츠 제멜바이스, 영화 <패터슨>에 영감을 준 시인이자 의사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 남자 행세를 한 여자 의사 제임스 베리, 자신의 유방암 수술 자국을 세상에 드러낸 모델 마투슈카, 피 한 방울로 건강을 측정할 수 있다는 약속을 팔았던 희대의 사기꾼 엘리자베스 홈스 등. 이들은 현대 의학의 변두리에 있었거나 문제를 일으킨 문제아들이다. 지금의 현대 의료를 만드는 데 이바지했다고는 볼 수 없는. 그러므로 이들이 보낸 편지는 원래대로라면 현재의 우리에게 도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는 수취인을 찾지 못한, 잘못 배송된 채 잊힌 수많은 편지가 있다. 저자는 이러한 목소리의 단절에서부터 일련의 편지들을 구해낸다. 어떤 목소리를 따라가느냐에 따라 우리는 다른 역사의 궤적을 그릴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미래로 배송될 예정이었던 이 편지들 – 지금 시점에서는 잘못 배송된 것처럼 느껴지는 – 은 그곳에 미리 가 있던 저자 덕분에 구출되었다. 불편할 것이 분명한,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학문의 가장자리에, 어쩌면 더 나은 의료의 미래를 상상하기에는 더없이 적합한 자리에, 저자는 미리 가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독자들은 이 책을 집어 들고 읽는 잠깐의 불편함을 감수함으로써 그가 살려낸 편지 묶음을 운 좋게도 손에 넣게 되었다.      


  진료실에서 탄생하는 말들, 우리의 자녀들     

  편지에 담긴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단순하지 않다. 본받을 것만 있는 영웅담이나 자기계발서와는 달리 <아픔은 치료했지만 흉터는 남았습니다> 속 등장인물들은 섣부른 판단을 허용하지 않는 인물들이다.

  이그나츠 제멜바이스는 그중에서는 꽤 알려진 편에 속한다. 그는 세균과 감염에 대한 개념이 없던 시절, 출산 후 산모에게서 발생하는 산욕열의 원인이 씻지 않는 손에 의해 전달되는 입자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의사가 소독액에 손을 씻고 산모를 돌본 경우, 그렇지 않았을 때 비해 산모가 사망할 확률이 훨씬 낮게 나타났다. 그러나 제멜바이스의 주장은 당시의 의료계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이는 우선 그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그동안 의사가 산모들을 죽여왔다고 말하게 되는 것일 뿐 아니라, 제멜바이스 본인이 손을 씻지 않는 다른 의료인들을 ‘살인자’라고 몰아세우는 등 설득에 적절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저자는 독자가 간과하기 쉬운 부분을 지적한다. 우리는 의사로서든, 환자로서든, 의사의 말이 환자에게 제대로 닿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목격한다. 어쩌면 그것의 원인에는 의사-과학자라고 부르는 정체성 – 의사라는 직업의 기반이 과학에 있으며 그것이 의사의 언행에 권위를 준다고 믿는 – 이 자리하지 않는지 저자는 묻는다.     


  “과학을 통해 의술이 존립할 수 있는 근거를 스스로 마련한 의사-과학자 집단은 다른 집단과 소통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 우리는 그 모습에서 자신의 발견을 정연한 글로 발표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제멜바이스를 떠올립니다.”(p.29-30)
  “이론과 실험에 파묻혀 다른 것에는 전혀 무관심한 ‘미치광이 과학자’와 달리, 의사는 자기 생각을 잘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p.28)     


  이러한 소통 불능의 문제는 <아픔은 치료했지만 흉터는 남았습니다>를 관통하는 주제다. 수년간의 교육과 수련 과정을 통하여 인체와 질병에 대한 지식을 쌓았음에도 이것이 막상 환자에게 도움이 되어야 할 때 막혀버리는 까닭은 무엇인가. 저자는 시인이자 의사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글, <진료 The Practice>에서 같은 고민을 했던 선구자의 모습을 발견한다.     


  “여러 번 우리는 거부당하고, 우리가 예전에 해준 조언이 맞다는 걸 알면서도 일에 쪼들리는 엄마나 남편들이 다른 조언자를 찾는 상황을 마주합니다. 이것 또한 게임의 일부입니다.”(p.75)
  “우리가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지 않나요? 그것이 바로 우리를 좌절케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에게 갇혀 있는지 알릴 수 없는 우리의 무능력, 서로에게 중요한 가장 간단한 것도 말할 수 없는, 우리 중 어느 누구도 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가장 소중한 것도 알리지 못하는, 바로 그 무능력이 우리의 삶을 장작더미 속에 숨은 고양이 새끼들처럼 구별할 수 없게 만듭니다.”(p.78)     


  이처럼 환자와 의사 사이에 말이 통하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두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서일 것이다. 혹은 겉으로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처럼 보일지언정 서로에게 도달한 언어는 다르게 이해되기 때문이다. 환자는 질병의 경험을 언어로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의사는 종종 잘못 이해한 바를 토대로 조언을 건넨다. 이 조언 또한 일상적인 대화에서 쓰는 언어와는 아주 다른, 의사들의 언어로 이루어져 있어서 처음 듣는 사람이라면 마치 외국어를 듣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 간극을 좁히거나 넓히는 것이 은유의 역할이다. 저자는 전작 <누구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에서 수전 손택의 저서, <은유로서의 질병>과 <에이즈와 그 은유>를 인용하며 질병을 이야기할 때 은유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다.     


  “그(손택)는 에이즈에 씌워진 ‘역병’과 ‘타락’의 은유와 맞서 싸우려 노력한다.”
  “은유가 잘 선택되었는지, 잘못 선택되었는지는 따져보아야 한다.”
  “병의 잘못된 은유는 간혹 질병이라는 현실보다 더 크게 개인을 괴롭힐 수 있다.”(p.185)
  “문제는 좋은 은유다.”(p.189)     


  좋은 은유는 말하자면 눈금이 세세하고 측정치가 정확한 저울이다. 완벽한 재현이 불가능하리란 걸 알지만 우리는 은유의 도움을 받아 그것을 최대한 가깝게 재현해보려 노력할 수는 있다. 그리고 좋은 은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좋은 시나 소설, 영화. 마음을 전하고자 했던 이들의 편지, 철학자들의 엄밀한 글. 저자는 그렇게 답을 이미 문제 속에 담아 두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저자의 책들을 다시 읽어 보자. 이제 진료실의 풍경은 새롭게 보인다. 의사와 환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어떤 일이, 상대방의 이해와 보살핌을 바라며 힘겹게 언어가 탄생하는 순간이.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진료>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의사에게는 태어나고 있는 말을 그 자리에서 지켜볼 수 있는 놀라운 기회가 주어집니다. 의사 앞에는 말이 생생한 모양과 색을 띠고 놓여 있습니다. 때묻지 않고 갓나온 그 말을 의사는 돌봐야 하는 책임을 집니다. 의사는 그 말이 얼마나 어렵게 태어나는지, 그리고 그 말이 결국 어떻게 사라지는지도 보게 됩니다. 그 자리에는 말하는 사람과 우리(의사)들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 말의 부모입니다. 그보다 감동적인 것은 없습니다.”(p.78)     


  모순과 복잡함을 받아들이는 일     

  의사는 의학뿐 아니라 언어에도 전문가가 되어야 하는가? 어떤 종류의 언어에서는 분명히 그렇다. 자신의 한마디 말에 환자의 평생을 바꾸어버릴 힘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의사는 자신의 말을 소홀히 다뤄선 안 된다. 그것은 무엇이든 배우고 흡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어린 자녀에게 부모로서 해야 할 말을 고르는 일과 비슷하다. 특히 의사의 말은 감정을 직접 건드리기에 상대방의 감정의 움직임에 민감해야 한다. 그것을 현대 의학교육에서는 공감 능력이라고 말한다. 어린 자녀들이 그렇듯 환자들 또한 공감받기 원하므로 의사는 공감 능력을 길러야 한다. 하지만 의료인이 수련 과정에서 먼저 배우게 되는 것은 공감 능력보다는 감정을 가라앉히고 제거하는 능력이다. 인턴으로서, 레지던트로서 업무를 수행하는데 온갖 감정에 휘둘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배들은 우리가 초연하길 바란다. 우리의 환자들은 우리가 그에게 공감해주길 바란다. 의사란 과연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저자는 <누구를 어떻게 살려야 하는가>에서 이러한 모순적인 상황을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먼저 생각해봐야 할 문제는, 공감이라는 것이 과연 인간의 감정, 정서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인간의 한 단면인가 하는 것이다. 감정이 한없이 메말라 있는 어떤 사람이 엄청난 공감 능력을 보이는 경우를 상상해보자. 공共감感이 한자의 뜻처럼 같이 느끼는 것이라면 글쎄, 이것은 소위 말하는 형용모순 아닐까? 감정을 억누른 사람이 다른 사람의 감정을 같이 느낄 수 있을까?”(p.170)
  “그렇게 감정을 철저히 무시할 것을 요구받은 의료인이 공감에서만은 뛰어나리라 기대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 오히려 끊임없는 엄숙함, “초연하라”는 명령이 등뒤에서 계속 울리는 한, 학생들은 자신이 어떤 감정을 겪는지도 모른 채, 의료인으로서의 성장 과정을 지나쳐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p.172)     


  <아픔은 치료했지만 흉터는 남았습니다>에서는 남자 행세를 한 여자 의사, 제임스 베리의 사례를 살펴본다. 나이팅게일과 동시대를 살았던 제임스 베리는 크림 전쟁에 참전했던 군의관이자 실력 있는 외과 의사였다. 나이팅게일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실력은 있었지만, 매우 권위적이고 무례했다고 한다. 베리가 여성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사망한 후 알려지게 되는데, 그의 시신을 염한 여성이 비용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베리의 비밀을 폭로했던 것이다.     

  19세기 초반의 일이니 베리는 의사로서의 재능과 꿈이 있었더라도 어쩔 수 없이 남자 행세를 해야만 했으리라. 그러나 굳이 남성적인 특징, 권위적이고 무례한 모습까지도 따라 해야 했을까?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 바라는 공감하는 의사상과는 다르다. 그러나 우리가 의사라는 직업을 상상할 때는 가부장적이고 뭐든지 다 아는 전지전능한 의사를 떠올리지 않는가? 그러므로 베리 또한 그러한 역할을 연기한 것은 아닐까? 이는 의사가 감정을 억누르면서 동시에 뛰어난 공감력을 보이길 바라는 마음과 함께, 그가 남성적이면서 동시에 여성적이길 바라는 환자들의 마음을 반영한다. 그렇다면,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의사’라는 인물은 원체 혼성의 존재”(p.113) 일지도 모른다. 단지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의 성별이, 혹은 정체성은 태어나면서 주어진 그것 하나라고 여겨왔을 뿐이다. 좋은 진료를 위해서는 환자 내면의 복잡성을 이해해야 하듯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복잡성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좋은 의사란 다양한 정체성을 아우를 수 있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왜 우리는 이처럼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글을 읽어야 하는가     

  그러므로 <아픔은 치료했지만 흉터는 남았습니다>를 읽는 일은 불편한 일이다. 세상은 보기보다 복잡하며, 이 글을 읽는 당신 또한 마찬가지며,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의사는 의학뿐 아니라 언어에도 능숙해야 한다는 것. 저자는 독자에게 많은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추궁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격려이기도 하다. 더 나은 날들을 바란다면, 비록 불편한 이야기일지라도, 우리는 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1993년 8월, 모델 마투슈카의 반라 사진이 <뉴욕 타임스 선데이 매거진>의 표지를 장식한다. 모델은 붕대를 연상시키는 흰 드레스와 두건을 두르고 있으나 조명이 집중적으로 비추는 오른쪽 가슴은 가려지지 않은 채 드러나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른쪽 가슴이 있었던 흔적, 유방암으로 인해 절제술을 받은 가슴의 흉터가 조명 속에서 빛난다. 마투슈카의 얼굴은 빛이 들어오는 사진의 오른쪽을 향하고 있어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의 꽉 다문 입꼬리에서 느껴지는 것은 평온함 혹은 당당함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제 몸을 보는 것이 불편하신가요? 얼른 이 표지를 넘겨서 불편한 장면에서 벗어나고 싶으신가요? 저는 말합니다. 이것이 상처 입은 여성의 육체입니다. 질병을 겪는 한 사람의 몸입니다. 저를 보는 당신은 지금 건강한가요? 앞으로도 계속 건강할 것이라 확신할 수 있나요? 그렇지 않다면 이 몸은 당신의 미래입니다. 그러니 눈을 돌리지 마세요. 저를 보세요. 이 목소리를 들으세요.’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일은 불편한 일이다. 저자에 의하면 그것은 “다른 신체에 가해진 손상은 내 신체의 유기적 통일성을 위협”(p.167)하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우리는 남이 겪는 고통을 보면서 자신이 겪었던 고통의 기억을 떠올리며 괴로워하고, 장차 우리를 찾아올 고통의 예감에 몸서리친다. 이토록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장면을 마주했을 때 사람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상처 입은 사람을 마주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어떤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는가.      


  “그 불편함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요. 예컨대 시선의 윤리라고 하는 것을 상정할 수 있을까요. 보지 않아야 하는 것이 있을 수 있으니 눈을 감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 어불성설이라면, 시선의 윤리라는 것은 무엇을 볼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볼것인가를 가름하는 일일 것입니다.”(p.168)     


  그러므로 우선 보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자. 혹은, 읽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자. 누구를 어떻게 살려야 할지, 아픔은 치료되었지만 남아있는 흉터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저자의 책들을 읽는다고 정답이 우리에게 주어지진 않는다. 그러나 어디든지 있으므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주변의 고통이라면, 적어도 그를 외면하지는 말자. 그리고 고통에 고통을 더하는 일은 더더욱 하지 말자.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그의 책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트라우마에 관해 다음과 같이 썼다.      


  “‘트라우마에 관한 한 우리는 주체가 아니라 대상에 불과하다.’ (...) 한 인간이 어떤 과거에 대해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 되어버리는 이런 고통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당사자가 아닌 이들은 짐작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이 공부하고 더 열심히 상상해야 하리라. 그러지 않으면 그들이 ‘대상으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그걸 잊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말한다. 이제는 정신을 차릴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더 이상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지 말라고. 이런 말은 지금 대상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체가 될 것을, 심지어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주체가 될 것을 요구하는 말이다. 당신의 고통이 나를 불편하게 한다는 말은 얼마나 잔인한가. 우리가 그렇게 잔인하다.”(p.43)     


  트라우마의 자리에 질병을 대입해 보면 어떨까. 타인의 고통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는 말은 잔인한 말이다. 우리는 잔인해지지 않기 위해 계속 공부해야 한다. 불편할지언정 정확하게 보고, 자꾸 읽고, 계속 들으며 또 생각해야 한다. 고통에 고통을 더하지 않으려면. 누군가 홀로 자신만의 터널을 지나고 있을 때, 그를 인도해주는 빛은 되지 못할지라도 어둠의 일부는 되지 않아야 한다. 신형철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글을 마무리 짓는다.     


  “계속 공부해야 한다. 누군가의 터널 속 어둠의 일부가 되지 않기 위해서.”(p.44)



# 본 독후감은 저자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은 후 작성되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오류와 마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