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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얼 Mar 22. 2021

딜쿠샤: 고증과 박제 속 가상의 향수

장미를 쥘 때는 가시를 조심해야죠

전시 관람 직후 메모


지은 뒤 폐허로 더 오래 있었던 '기쁜 마음의 궁전'을 둘러보며, 그토록 지극한 순간들도 그리 오래는 가지 않음에 너무 실망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여기 깃들었던 피난민들의 삶도 기록으로 더해지면 좋겠다.





  지난 주에 딜쿠샤에 다녀왔다.


  주인들이었던 테일러 부부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는 건가 혼란스러웠던 첫 방문. 딜쿠샤에 대한 정보는 이미 웹 여기저기에 많이 소개되어 있어서, 이 글에서는 관람을 하고난 감상만 간략하게 정리할까 한다.


    딜쿠샤의 전시는 크게 세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독특한 건축과 복원 과정에 대한 통사 소개, 둘째는 이 집을 지은 테일러 가족의 국내 활동과 생애, 셋째는 독립운동과 관련된 활동 소개이다.

  우선 첫째, 그들만의 낭만을 정성스레 쌓아올린 집 안은 충실하게 복원은 되어 있다. 테일러 가문에서 유품으로 전해지던 내부 전경 사진과 부인 메리가 쓴 책 <호박 목걸이>의 묘사 등을 참고해, 아시아 각지에서 수집한 공예품과 미술품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내부 장식도 고증해냈다.


  다만 아쉬운 점은 관점의 부재이다. 문화재로 지정되어 복원된 딜쿠샤는 '역사전시관'이라는 새로운 기능을 부여 받아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 그러나 이 안의 전시는 딜쿠샤의 역사―즉 딜쿠샤와 관련된 인물들과 사건, 배경들―에 어떤 관점을 갖고 접근하고 있는 것인지 명확히 보여주지 않는다(정확히는, 관점이 없다기보다는, 관람객이 현대 한국사회 시민들이라는 전제가 누락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건축과 인물들에 대한 주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이 전시는 상당히 기묘한 화법을 구사한다. 딜쿠샤에 관한 역사에 대한 가치판단은 물론, 객관성이나 중립성까지도 한참 유보한 채로 전시를 구성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오직 이 공간이 지닌 드라마틱함을 사연 발굴과 디테일한 고증 구현을 통해 드러내는 데 심취해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런 특징은 테일러 부부와 그 후손들에 대해 소개하는 둘째 파트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테일러 가족이 우리 근대사의 면면들에 밀착되어 있는 인물들이라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 한 면은, 구한말부터 열강들에 의해 조선의 인적·물적 자원이 수탈되던 상황에 걸쳐져 있다. 앨버트 테일러는 대를 이어 조선에서 광산 사업을 벌였고, 그외에도 수입 물품 소매 등의 다양한 사업을 영위한 자산가였다. 딜쿠샤가 테일러 가족에게 소중한 집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은 그외에도 전국 각지에 서양식 별장을 지어놓고 휴가나 여행을 다녔다. 일본에서 만나 인도에서 결혼식을 올린 이 부부의 자유롭고 낭만적인 삶은 식민지 세계의 자원 수탈로 쌓은 부에 의해 뒷받침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조선에서 생활하는 동안의 모습이 기록된 흑백 사진들은 그저 아련한 정경처럼 전시되어 있다.

  조선의 자수 병풍과 청화백자, 일본의 게이샤 인물상이나 가키에몬 백자, 중국 도자기, 동물 조각 등을 오밀조밀 모아놓은 이들의 응접실도 그렇다. 이들이 멋지게 꾸며놓은 모습을 재현하고자 했다면, '세계를 유람한 커플이 서울 한복판에 구현한 환희의 궁전'이라는 동화적인 분위기만이 아닌, 오리엔탈리즘 취미에 심취한 자본가로서의 맥락도 드러냈어야 한다.

  특히 메리 테일러의 짐가방에 대한 설명 자료는 그 건조한 묘사가 내게는 약간 충격으로 와 닿을 정도였다. 아시아에서 사 모은 수집품이 얼마나 많았던지, 그는 귀국길에 나서기 전에 수집품을 챙긴 짐가방을 들고 옮겨보는 시뮬레이션까지 행했다. 배를 여러 번 갈아타는 여정에는 오늘날처럼 공항/항구에서 짐을 부치고 받는 시스템도 없었고, 전쟁 중이라 짐꾼을 부릴 수도 없었으므로 오로지 자기 힘으로 나를 수 있는 만큼만 짐을 반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시 한 번 짚어보지만 도대체 얼마나 가방이 크고 무거웠길래, 이 연습을 하는 과정에서 메리 테일러의 다리 정맥이 파열되는 사고가 발생하고 만다(!!). 그래서 결국 조그만 손가방에 몇 개의 수집품만 겨우 챙겨서 돌아가게 되었고, 딜쿠샤 전시에서는 그 손가방을 전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자료들은 '그들은 한국에서 보낸 시절의 기억을 애틋하게 간직했고, 기증까지 했다'는 온화한 어조로만 전시되어 있다. 마치 드라이브 안의 폴더들처럼 자료가 분류되고 정리되어 있는 것 같은 두 층의 방들을 오가는 동안 나는 몇 번이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셋째, 우리에게 익숙한 독립운동을 세계에 알리고 지원한 인물로서의 테일러를 비추는 부분. 앨버트 테일러가 3.1 운동 소식을 입수할 수 있었던 경위는 무척 재미있다. '인생은 운칠기삼'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만드는 기가 막힌 우연.


  부인이 첫 아이를 낳은 날이 어떻게 딱 3월 1일이었고, 출산하고 입원한 병원이 딱 세브란스였고, 그런데 마침 딱 남편이 아내를 보러 왔을 때 병실 침상에서 독립선언서 뭉치가 발견된다. 그런데 그 남편은 조선에 오래 살아 외국인이지만 '오등은자에…'하는 그 독립선언서를 바로 읽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말에 능통했으며, 게다가 또 AP통신 특파원이어서 국제사회에 이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인물...일 확률을 구하시오. (10점)


  심지어 당시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인물이 '독립선언서를 세브란스에서 등사하고, 감시를 피하기 위해 침대에 숨겼다가 옮겼다'고 증언한 자료를 볼때, 관람객은 이 놀라운 우연이 썰 같은 게 아닌 팩트임을 체크하며 '현실이 이야기를 압도할 때'의 쾌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 '드라마틱한 감동'에 초점을 맞춘 전달 방식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게다가 이렇게 극적으로 3.1운동과 제암리 학살을 세계에 보도한 업적 역시 다른 주제의 내용들과 함께 그저 '수평적으로' 전시되어 있다. 저택 안의 방마다 소주제를 배치했지만, 가장 중요한 공간인 거실과 응접실은 메시지 없이 복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만약 이런 표현에 메시지가 있다면 결국 '이렇게 잘 해놓고 살았답니다'일 것이다).

  결국 '방'에 들어가 있는 나머지 주제들은 '방'이라는 하부 단위들로 병렬될 뿐이다. 해설사의 안내에 따르면 전시를 관람하는 동선도 특별히 정해져 있지 않으므로, 층에 의해 의미나 중요도가 구분되지도 않는다. 결국 딜쿠샤 전시는 '자료와 설명을 배치'해둔 것이지 '메시지를 전달'하지는 않는, 전시관이라기보다는 진열관에 가까운 형태로 완성되었다.


  그렇다면 이 공간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전달하고 있는 '복원'이라는 면도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 가장 아쉬웠던 면도 이 부분이다. 실제로 테일러 가족이 이 집에 산 기간은 몇 년에 불과하다. 그러나 딜쿠샤의 복원은 그 이후의 역사는 깨끗하게 지워지고 오직 테일러 가문의 기억에 의존한 '초기화'를 모델로 취했다. 딜쿠샤를 문화재로 지정하고 복원하는 사업은 서울시-문화재청-기재부 등이 함께 추진한 프로젝트였다는데, 과연 이게 우리 국민-서울시민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이라고 판단했던 걸까.

  2차대전 당시 일제에 의해 테일러 가족이 본국으로 추방된 뒤, 피난민과 부랑자가 깃들어 살던 시간을 이 전시에서는 '딜쿠샤를 온전하게 지키지 못한 부끄러운 역사'처럼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그때가 우리나라와 서울시의 역사에서 어떤 시기에 해당하는지, 관람객들에게 조금은 생각해볼 틈을 마련해주었어야 하지 않을까.




  전시관 안을 한 바퀴 돌아본 뒤에, 나는 권율 장군 집터께의 거대한 은행나무가 내다보이는 창 앞에 한참 서 있다 나왔다. 지금은 수령이 5백여 년에 달하는 보호수. 이 거목을 보고 매료된 테일러 부부는 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곳에 집을 짓기로 했다. 2000년대 초 김익상 교수도 '집 주변에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는 아들 브루스의 기억으로 딜쿠샤의 위치를 특정해냈다고 하니까, 저 은행나무는 백여 년 내내 딜쿠샤라는 존재의 단초가 되어 온 셈이다.

  아직 잎이 하나도 돋지 않았지만 그 거무스름한 나무가 유난히 생생해 보였던 건, 더러 잘리고 쪼개진 자리 위로 새로 자란 가지들이 보는 이로 하여금 그 나무가 견뎌온 시간을 되새기게 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근대에 대한 복고 열풍은 아직도 한참 더 끓어오를 모양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예쁜 곳', '옛날 느낌나는 포토 스팟'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나에게도 모더니즘에 대한 오랜 동경이 있다. 그러나 그 시대는 바로 일제강점기라는, 마음 한 켠이 찔리는 듯한 불편함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딱히 민족주의자가 아니지만, 역사란 때로 모든 사람들에게 제거되지 않는 가시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딜쿠샤는 경험도 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향수가 넘쳐나는 시대라는 걸 절감하게 만드는 곳이었다. 돌아갈 데 없는 이 맹렬한 그리움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다 놓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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