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성격 까다롭고 예민한 강박주의자들에 관하여
읽기 전에.
제목에서 느껴지 듯 철저히 내 머리에서 정리된 사고임을 미리 말씀드리며...
자신의 그림을 묻는 질문에 이처럼 답해 화제가
된 프랑스 화가 앙드레 브라질리에.
어쩌면 그림의 가치,
혹은 예술의 가치를 논하기 위해서였을지 모르겠으나
그렇다면,
나는 결국 이 문제가
어떤 까다로운 강박주의자들인
문과생들을 힘들게 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말'을 다루는 영역의 강사로 일하고 있으며
이는 나에게 '말'에 관해 일정정도의
‘전문성'을 요구한다.
전문성이라는 것은 '비전문적인 것'과의
구분이 명확할 때 비로소 그 의미가 확실해진다.
그래서 열심히 , 혹은 매우 예외 없이
나에게 배운 모든 것을 말의 영역에서 적용하려고 하면
반드시 마찰이 일어난다.
말은 경우의 수가 많기 때문이다.
이과의 학문을 결과 값에 관한 앞뒤가
명확한 학문이라고 정의한다면
문과의 학문은 많은 부분에서
보통 ~하다는 평균 내지는
보편, 다수의 학문인 경우가 많다.
우리가 흔히 푸는 수능 문제에서도
수리영역은
꼭 다섯 가지 중 답이 하나만 나와야 하는데
문과의 언어영역은
가장 유사한 근사한 것을 골라야 하는 것을 봐도 그렇다.
물론 더 깊이 들어간다면
답이 명확했다는 '과학'에서도
시대에 따라 그 패러다임이 바뀌며
소위 정답이란 것이 없어짐에도 불구하고
이공계 영역에서의 답은 어찌 보면 진리,
내지는 정답 명확함, 전문성
눈에 보이는 확실한 것에 가깝고
반대로 문과의 영역에서인 특히 내가 다루는 '말'은
어떤 부분에서는 애매모호함, 비 전문성, 그럴 수 있음으로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해서 말의 전문성 내지는 명확함
이공계에서의 수학의 탄생과 유사하게
우리의 깐깐하고도 꼼꼼한,
이러한 부분을 쉬이 넘어갈 수 없었던
나 같은 몇몇 문과생들은
'실체'가 잡히는 것으로 '철학'을 세운 것이 아닐까라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명확하게 설명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인간'에게 늘 갈증으로 있어 왔던 것 같다.
그것을 증명하기 어려운 과거엔 신으로
그것을 조금씩 증명해 내기 시작해 냈을 시기부터는
근대 과학으로
그 경계 어딘가에 있는 지금은 애매함으로
현대예술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영역에서 전문성을 발휘해야 하는 나는
누구나 다루는 말을 깊이 공부할수록
여러 가지 말의 기술 속에 담긴 진심을
진정 사람이 갖고 있는 '감정'과 '진심' 외의 것들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
영화 컨택트( 2016, arrival)는
난데없이 인간과 조우한 외계인과의 이야기에서
흔히 하는 것처럼 외계인의 지구침공 내지는 외계인과 인간의 전투가 아닌
외계인과 인간의 '소통' 즉, 말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경험은 꼭 우리가 우주까지 나가지? 않아도
조금 부족한 영어를 갖고 있다면 외국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경험이다.
서툴지만 모르는 사람끼리 돕겠다는 마음이 모이면
그것이 소통이 되고
언어가 달라도 의사전달이 되며 진심이 통하는
경험 말이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영역인
'진심'과 '소통'에서
아직까지 나는 더 그럴듯한 철학적 단어를 찾지 못했다.
내 지식의 한계와 앎의 부족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을 다루는 진심과 소통에서
그럴듯한 말보다는 사실은 솔직한 말,
더 쉬운 말보다
정답에 가까운 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해서 아직 자기소개를 할 때
상대가 나에 대해 TMI(너무 많은 정보)로
알지 않으면서도 자기소개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항상 이 너무 많은, 혹은 상대적으로 많은 정보 때문에
다른 사람이 아닌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관심은 말의 시작이다.
다시 돌아와서.
어떤 사람이 말을 잘하는 사람 같냐고 묻는다면
난 언제나
'서툴러도 진심이 드러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고 늘 답한다.
오래 이 직업을 한 사람이 할만한
답변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 어느 그럴듯한 수사학도, 비유도, 화술도
상대가 가지고 오는 진심의 무게에 비견하면
그 차이를 명확히 알 수 있다.
어떤 깐깐 쟁이 철학자들이 그 옛날부터
이 보편의 학문을
진리로 정립하고자 노력했지만
말의 영역은 어쩔 수 없이
아직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운가 보다.
그것을 보여줘야 하는 단계에 오다 보니
조금 우습지만 답이 있는 공부를 하는
이공계생들이 부럽다.
뇌과학 책을 보다 보면
많은 부분 이것을 현대에는 '뇌의 작용'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노력이 많다고 느껴진다.
뇌의 어떤 부분이 각성되면
그것이 우리 '마음'의 상태가 된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그렇게 명확한 부분이었다면
아니, 사실은 그렇게 명확한 부분이었으면 해서
내가 '언어병리학' 공부를 시작한 것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기계가 아니고
어디가 활성화되면 어디가 그에 따라 정확히 작동하고 결과물을 도출해 내는
프로세스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말'은 더 어려운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것일지 모르겠다.
때문에 나는 친구가 준 90대 시골 할머니들의
일기장을 보면서
또 훌쩍이고
이보다 말을 잘할 수 없다고 느낀다.
할머님들의 일기장을 보며
이를 기술적으로 설명할 자신이 없어진다.
어설프면서도 솔직하지 못한
내 일기장을 마무리 하노라면.
사실 나역시 이부분에 대해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어 이 글을 쓰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그럴듯한 말로 가리어져 있지만
오늘10년만에 난데없이 나타난 이유없는 ‘불안’은
내 일에서
또한 내 삶에서 ‘실체’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해주었다.
나는 명확하게 잡히는 것을 찾았던 것 같다.
이 불안앞에 온기로 직접 잡아줄 손이 필요했던 것이다.
진심은 이토록 힘이 세며
설명하기 어렵고
이것을 말로 하라니
앞으로도 어려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