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다이스
이번겨울은 따뜻한 남쪽나라에서 지냈다. 11월 중순부터 3월 중순까지 4개월 중 3개월을 동남아에서 지냈다. 겨울이 시작되던 11월 중순 치앙마이로 가서 한 달을 보내고 12월 중순 귀국하여 서울에서 한 달을 보냈다. 금년 1월 다시 쿠알라룸푸르로가서 한 달을 보낸후 나트랑으로 가서 한 달을 보내고 3월 귀국했다.
66년간을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덥게 살았는데 이번 겨울은 더운 곳에서 살았다. 젊은 시절 미국과 일본에서 1년씩 산적도 있었지만 두 곳도 겨울은 한국과 비슷하게 추워서 더운 겨울은 이번이 처음이다. 12월 중순부터 한 달간 한국에 있었기 때문에 추운 겨울과 더운 겨울의 차이를 더욱 극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첫째 몸이 건강해졌다.
12월 중순 더운 치앙마이에서 추운 서울에 도착하니 바로 몸에 이상이 왔다. 습한 곳에서 건조한 곳으로 오니 피부건조증이 나타났다. 언제부터인가 겨울만 되면 피부건조증으로 고생했었는데 60 넘으면서 증세가 더 심해졌다. 전에는 가끔 가볍게 바디로션을 바르면 되었는데 이제는 매일 듬뿍 온몸에 발라야 할 정도로 피부건조증이 심해졌다. 발각질도 심해졌다. 바셀린을 바르지 않으면 발꿈치가 쩍쩍 벌어질 정도이다. 매일 아침 샤워 후에 바디로션 바르고 바셀린 바르는 게 중요 행사이다. 그러나 따뜻한 남쪽나라에 오니 피부건조증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가져간 바디로션과 바셀린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그대로 들고 귀국했다.
한국겨울의 건조한 날씨와 건조한 공기는 호흡기에도 영향을 미친다. 나이 들어가면서부터는 가습기 없이는 잠을 잘 수 없는 정도이다. 가습기를 켜도 목이 건조해져서 잠에서 깨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따뜻한 남쪽나라에 도착하니 가습기 없이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나이 60 넘어가면서 알레르기 비염이 나타났다. 노화로 면역력이 떨어지면 없던 병이 생긴다고 한다. 날씨가 서늘해지면 어김없이 콧물이 나고 재채기가 나온다. 목도 따가워진다. 여름한철 제외하고 봄, 가을, 겨울 에는 비염약을 먹어야 한다. 비상시를 대비해서 코에 뿌리는 스프레이를 항상 가지고 다닌다. 비염 검사에도 원인이 나오지 않는다. 찬 공기가 원인일 것으로 추정만 할 뿐이다. 원인을 모르니 완치할 방법은 없고 평생 비염약을 먹어야 한단다. 1월 중순 서울을 떠나면서 혹시나 해서 비염약 한 달 치를 가져왔다. 그러나 따뜻한 나라에 간 즉시 비염이 멈추었다. 두 달 동안 비염약 하나도 먹지 않았다.
작년 말 더운 치앙마이에서 한 달을 지내고 서울에 오니 갑자기 추웠다. 35도를 오르내리는 더위에서 갑자기 영하 10도로 떨어졌다. 귀국 후 1주일쯤 지나자 특별히 몸에 무리한 일이 없었는데도 팔이 지릿지릿한다. 1년 전 요가하다 무리해서 팔이 아팠던 증상이 또 나타났다. 당시 MRI 검사결과 목 디스크로 인해 팔이 아프다는 진단을 받았다. 한동안 약 먹고 물리치료받으면서 증상이 없어졌는데 또 목디스크 증상이 나타난 것이다. 다시 병원에 가서 약을 처방받고 물리치료를 받았다.
목디스크 증상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쿠알라룸푸르 한달살이를 떠나게 되었다. 두 달 치 약을 처방받고 물리치료기까지 가지고 출국했다. 쿠알라룸푸르에 도착하고도 증상이 지속되어 매일 약을 먹고 물리치료기로 자가치료를 하면서 지냈다. 그런데 1주일쯤 지나지 증상이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2주일이 지나니 증상이 없어져 버렸다. 그리고 베트남에 와서도 아무런 증상이 없다.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따뜻한 날씨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추위로 몸이 긴장하여 디스크 증세가 나타났다가 따뜻한 날씨로 몸이 이완되니 증세가 사라진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손가락 관절염도 증세가 완화되었다. 증세가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완화되었다. 이 역시 따뜻한 날씨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60대 이상 남성 대부분은 전립선 문제로 야뇨증이 있다. 나 역시 야뇨증으로 인해 자다가 두 번 정도 화장실에 간다. 겨울철은 야뇨증이 심해져서 서너 번 깨는 경우도 있다. 화장실 다녀온 후 바로 잠이 들기도 하지만 어쩔 때는 잠이 안 와 고생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따뜻한 나라에 있으니 야뇨증이 없어졌다. 자다가 화장실을 한 번가거나 안 가거나 할 정도로 야뇨증이 없어졌다. 이것 역시 원인을 모르겠다. 저녁에 산책하면서 땀을 흘려서 그런 게 하닌가 추정할 뿐이다. 혹시 따뜻한 날씨가 몸의 전반적인 건강상태를 개선시켜서 야뇨증이 개선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두 달 해외살이 떠나면서 약을 한 보따리 들고 왔었다. 비염약, 목디스크약, 손가락 관절염약, 바셀린, 바디료숀, 감기약, 위장약 등등. 한국출국 전 매일 복용하던 비염약, 목디스크약, 손가락 관절염약은 따뜻한 나라 도착 후 한두 번 먹고 더 이상 먹지 않았으며 바디로션, 바셀린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겨울마다 연례행사였던 감기도 걸리지 않았다.
겨울이면 노인 사망률이 높아진다고 한다. 추운 날씨가 노인의 건강상태를 악화시켜서 일 것이다. 내 경우만 보더라도 겨울마다 고생했던 비염, 감기, 피부건조증이 없어졌고 야뇨증, 목디스크 증상이 완화되는 것을 보면 겨울철 추위와 건조한 날씨가 건강에 나쁜 것을 알 수 있다.
두 달간의 경험으로 섣불리 결론지을 수는 없겠지만 내 몸은 추운 겨울에 문제가 발생하고 날씨가 따뜻해지면 해결이 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앞으로 나의 삶에 큰 고려사항이 될 것이다. 서울에서 방을 따뜻하게 하고 가습기를 튼다고 해도 겨울철 질병이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따뜻한 남쪽나라에서 지내게 되면 겨울질병이 저절로 사라진다. 따뜻한 나라에서의 겨울은 내 몸을 건강하게 했다
둘째, 겨울을 동남아에서 보내는 동안 마음이 편안했다.
나는 반바지 두 개와 라운드 티 서너 개로 3개월을 보냈다. 샌들만을 신고 살았으며 운동할 때만 운동화에 양말을 신었다. 한국에서 가져간 옷 반 이상은 입어보지도 않았다. 옷을 차려입을 필요가 없으니 사는 게 편안하다. 면도도 일주일에 한두 번만 했다. 모자 쓰고 다니니 머리 빗지도 않는다. 반 자연인처럼 살았다. 외국이라 남의 이목을 살필 필요도 없다. 스트레스 제로이다.
필요한 물건도 없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필요한 것이 왜 그렇게 많았는지 이상할 지경이다. 10평 남짓한 숙소에 비치된 조그마한 냉장고, 간단한 취사용구, 조그마한 탁자만 있어도 아무런 불편함이 없다. 그야말로 미니멀 라이프이며 법정스님이 말씀하신 무소유이다. 내 거 아무것도 없다. 반바지 두 개, 헐렁한 티 서너 개만 있으면 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고 행복하다. 노트북 컴퓨터와 폰만 있으면 더 이상 필요 없다.
아무런 걱정이나 부족함이 없이 편안하고 즐겁게 살 수 있는 곳을 지상낙원 또는 파라다이스 라고 한다. 파라다이스는 살아있는 동안에는 갈 수 없는 곳이라고 여겨서 죽은 다음에라도 가보려고 종교를 갖기도 한다. 나에게는 지난겨울이 바로 파라다이스였다. 아무런 걱정이 없었고 부족함이 없었고 편안하고 즐거웠다. 노트북과 폰을 친구 삼아 고독을 즐겼다. 물가가 저렴해서 한국보다 생활비도 덜 들었다. 앞으로도 겨울마다 따뜻한 남쪽나라에서 파라다이스를 즐길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