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에서 투루판 까지 시간여행
중앙아시아 3국을 여행하다 보니 곳곳이 과거 실크로드의 역사가 서려있다. 천산산맥과 파미르고원의 험준한 준령을 넘고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 부하라, 히바로 이어지는 사막길을 걸었던 상인들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이들은 천산산맥을 넘기 전 어디를 걸었을까? 궁금해진다. 실크로드가 번창했던 당나라 시절 시안을 떠난 상인들이 어떤 험난한 여정을 하고 천산산맥을 넘어 사마르칸트, 부하라, 히바를 거쳐 유럽으로 갈 수 있었는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중앙아시아 여행 중 중국 실크로드 여행을 신청했다. 이번에도 여행카페에서 진행하는 단체 배낭여행이다.
실크로드는 중국 시안을 출발하여 둔황까지 간 후 둔황에서 두 길로 갈라진다. 남쪽길은 타클라마칸 남쪽으로 가는 서역남로이고 북쪽길은 서역북로이다. 서역북로는 둔황에서 투루판까지 간 후 천산산맥 남쪽으로 가는 천산남로와 천산산맥 북쪽의 천산북로로 갈라진다. 전쟁등의 상황에 따라 루트가 폐쇄되기도 하는데 서역남로는 자주 폐쇄되어 천산남로 또는 천산북로가 주로 사용되었다. 당나라 시절 현장법사와 신라시대 혜초스님은 천산남로를 통해 인도를 오갔다.
이번 여행은 시안을 출발하여 둔황을 거쳐 천산남로와 북로가 갈라지는 투루판까지 이며 우루무치를 경유하여 다시 시안으로 돌아오는 코스이다. 현장법사와 혜초스님이 걸었다는 천산남로 쿠차와 카스가루가 궁금하긴 하지만 다음 기회로 미룬다.
시안에서 둔황까지는 몽골고원과 티베트고원 두 산맥의 중간을 지나는 하서회랑을 따라 1500킬로를 이동한다. 하서회랑은 중국역사에 자주 나오는 중요한 회랑이다. 중국에서 서역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며 북방유목민이 중국으로 들어오는 길이기도 해서 군사요새가 곳곳에 설치되었다. 과거 흉노족의 영토였는데 기원전 100년경 한무제가 점령한 후 중국영토가 되었으며 이후 실크로드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다. 한무제는 하서회랑 점령 후 둔황에 만리장성을 쌓고 양관과 옥문관을 설치하였으며 이 문을 통해 실크로드 상인들이 서역을 왕래하게 된다.
한나라 이후 중국의 흥망성쇠에 따라 하서회랑의 주인이 바뀌기도 했다. 중국본토가 안정되고 군사력이 강할 때는 중국이 하서회랑을 차지하였으나 중국이 불안정하고 주변국이 강해지면 하서회랑은 주변국으로 복속되었다. 하서회랑은 돌궐, 위구르, 토번, 서하, 몽고 등의 세력권이 되기도 했으나 실크로드 교역으로 얻는 수익이 컸으므로 어느 세력이 점령하던 실크로드 교역은 지속되었다.
실크로드는 무역뿐만 아니라 문화와 종교의 이동통로였다. 하서회랑을 통해 1세기 후한시대에 불교가 전파되었으며 이후 천년이상 하서회랑을 오가던 상인과 승려들에 의해 만들어진 불교유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대표적인 불교유적이 4세기부터 시작되었다는 둔황 막고굴이며 이외에도 많은 석굴사원이 하서회랑을 따라 분포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 전래된 불교는 지역의 세력판도에 따라 북방식불교, 티베트불교, 서하불교등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중국을 거쳐 한국과 일본에도 전파되는 등 불교전파의 통로였다.
하서회랑 일대는 선사시대에 바다였다. 인도판이 유라시아판과 충돌하면서 솓아올라 육지가 된 까닭에 사암으로 구성되어있다. 사암은 풍화에 쉽게 침식이 되고 침식된 사암 속의 장석성분은 황토가 된다. 이러한 지질학적 특성 때문에 하서회랑 곳곳에는 풍화침식되어 이루어진 그랜드캐년 스타일의 계곡이 많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황하석림이며 이외에도 풍화에 침식되어 기이한 모습으로 깎여진 지형이 많아 신비로운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하서회랑의 지질학적 특성 때문에 석굴사원이 많다. 한국에서는 숲에서 나무를 베어 사찰을 만들고 부처님을 모셨지만 하서회랑은 스텝지역으로 나무가 부족하여 사암으로 형성된 부드러운 바위를 파고 석굴을 만들어 석굴 속에 부처님을 모신다. 이런 석굴사원은 천년이 넘는 동안 이곳저곳에 만들어졌으며 그중 둔황 막고굴, 맥적산 석굴, 백령사 석굴, 베제클리크 석굴은 하서회랑에 건설된 예술성 높은 역사유적이다.
하서회랑에는 각종 불교유적 외에도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로 인해 여러 세력이 각축하고 흥망성쇠 한 다양한 역사와 유적이 남아있다. 흉노족을 물리치고 하서회랑을 차지한 한무제가 설치한 만리장성, 양관, 옥문관을 비롯한 여러 유적이 있으며 현장법사가 찾았던 고창고성, 위그루 유민이 세운 고창회골, 기원전 2세기부터 있었다는 교하고성등 다양한 역사 유적이 있다.
또한 하서회랑에는 흥미진진한 역사 속의 얘기들도 많다. 당나라 시절 하서회랑 남쪽의 토번(지금의 티베트)과 북쪽의 위그루 제국과 함께 하서회랑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빈번했다. 당시의 토번에 패한 당태종은 문선공주를 토번왕에게 시집보내고 이때 함께 보낸 불경과 불상이 티베트불교의 원동력이 된다. 티베트에서는 지금도 문선공주가 1400년 전에 가져온 불상을 신성시하고 있다. 또한 위구르제국에게 하서회랑을 뺏기고 시안까지 약탈당한 역사 그리고 100년간 당을 위협하던 위구르제국이 망한 후 중앙아시아로 뿔뿔이 흩어진 위구르 유민들의 역사등이 흥미진진하다.
당현종과 양귀비 그리고 안녹산의 난 역시 하서회랑과 연결되는 이야기들이다. 7세기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 패한 후 보장왕을 비롯한 고구려인 20여만 명이 당나라로 끌려갔으며 그중 상당수가 하서회랑의 척박한 지역으로 배치되었다. 척박한 지형에서도 살아남은 고구려 유민인 고선지 장군은 파미르 고원을 넘어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까지 진출한 영웅이었다. 알프스를 넘은 한니발보다 천산산맥을 넘은 고선지 장군이 훨씬 더 어려운 작전을 수행했다고 한다. 고선지 장국은 하서회랑을 관할하는 안서도호부의 도호가 되었다가 나중 안녹산의 난에 처형되는 비운의 장군이기도 하다.
실크로드 시작점인 시안은 주나라를 포함해 진, 한, 당 등 1100년 동안 13개 왕조의 수도였다. 중국의 전성기 시절의 수도였던 만큼 ‘도시 전체가 지하 박물관’이라 할 정도로 유적이 풍부하며 시안 근처에는 진시황릉을 비롯한 많은 황제와 왕족들의 릉이 있어서 역사유적이 곳곳에 널려있다.
나의 실크로드 여행은 시안을 출발하여 하서회랑을 지나 투루판까지 가는 여정에 있는 모든 불교유적, 역사유적, 자연경관을 공부하고 눈으로 확인하고 느끼기 위함이다. 인천에서 시안으로 날아온 우리 일행은 3일간 시안에 머물면서 시안과 주변의 역사유적을 탐방했다.
시안은 역사유적이 수없이 많다. 세계 4대 고도(古都)가 로마, 아테네, 카이로, 시안이라고 한다. 이 4개 도시는 도시전체가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할 수 있으며 도시 외곽에는 지도층의 릉과 별장들이 있어서 역사유적이 넘쳐난다. 3일에 걸쳐 시안성벽, 종루, 고루, 대안탑, 소안탑, 산시성박물관, 화청지, 진지황릉, 병마용갱 등을 둘러보고 하루는 시안에서 100킬로 정도 떨어진 화산을 트래킹 했다. 화산은 중국 5대 명산 중 하나이다. 높이는 2200미터로 그리 높지 않으나 산세가 험하고 아름답다. 케이블카로 2000미터 부근까지 올라간 다음 트래킹을 하므로 어렵지 않게 트래킹 할 수 있었다.
시안에서 4박 후 열차를 타고 하서회랑을 따나 천수(텐수이)로 이동했다. 천수는 과거 실크로드의 핵심 거점도시였으며 현재 인구 350만의 대도시이다. 인근에 맥적산 석굴사원이 있으며 350만의 대도시답게 고층빌딩이 즐비한 현대화된 도시이다. 시내를 관통하는 황하의 지류가 있으며 강변에 공원이 잘 정비되어 있고 야간 분수쇼가 아주 볼만하다.
천수 1박 후 기차로 란저우로 향했다. 차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차츰 스텝지역으로 변한다. 천수까지는 강수량이 풍부해서 산림이 우거졌으나 란저우에 가까워질수록 산에 나무가 보이지 않는다. 차츰 강수량이 적어지고 토질이 척박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란저우는 기원전 2세기 실크로드가 열리면서부터 줄곧 중국과 서역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다. 내륙 한가운데 길고 험한 산악 사이에 도시가 길쭉하게 형성되어서 천혜의 요새와 다름없었다.
란저우는 인구 140만 명이며 도시 중간으로 황하가 지나간다. 황하 건너편에는 원나라의 쿠빌라이칸이 만들었다는 백탑사가 있어서 황하와 도시전체를 조망할 수 있으며 황하강변을 따라 공원이 잘 조성되어 있다. 란저우 박물관은 하서회랑 지역의 과거와 실크로드 관련 역사적인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으며 유물 중 천마도는 후한시대 유물로서 세계적인 걸작이다. 란저우를 관통하는 황하에는 많은 지류가 있으며 북쪽 지류에는 황하석림이 남쪽 지류에는 병령사 석림과 석굴이 있다.
란저우 3박 후 다시 기차로 장예로 이동했다. 장예로 가는 길은 높이 3500미터의 챠렌산맥을 넘게 된다. 기차가 줄곧 고도를 높이더니 이윽고 3300미터라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차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차츰 사막지역으로 변한다. 장예에 가까워질수록 산과 들판에 나무가 보이지 않는다. 황량한 산 경사면에 나무를 심고 열심히 물을 뿌리고 있다. 사막화를 방지하기 위해 정부에서 노력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장예는 인구 130만이며 한나라 이후 실크로드의 요충지였으며 하서회랑의 중심지이다. 강수량이 연간 130밀리에 불과한 사막지대이지만 오아시스로 인해 실크로드 상인들이 모였던 거점도시였다. 이를 반영하듯 장예에는 중국최대의 와불이 모셔져 있는 대불사가 있으며 마르코폴로가 대불사 와불을 보고 감동받아 여기서 3년을 머물렀다고 한다. 장예는 지질학적으로 1억 년 전 커다란 호수가 융기되어 만들어진 지역이다. 호수가 융기되고 수천만 년 동안 풍화침식되어 멋들어진 모습을 보이는 칠채산과 단하 지질공원이 있으며 인근에 마제산 석굴사원이 있다.
장예에서 2박 후 야간열차를 타고 둔황으로 이동했다. 야간열차는 3층으로 되어 있고 남녀구분이 없다. 맨 위층에 배정받았는데 화장실 오르내릴 때마다 곤욕을 치렀다. 차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사막이나 다름없다. 산에 나무는 보이지 않고 들판에도 가끔 덤불만 보일뿐이다. 이러한 척박한 곳이 실크로드였다고 하니 당시 대상들의 고초가 눈에 선하다. 문득 잠이 들었고 깨어보니 둔황역이다.
둔황은 기원전 117년 한 무제가 건설했으며, 한나라와 당나라 시절에 중국과 서역을 연결하는 실크로드의 거점 지역이었다. 이곳은 실크로드의 남쪽 길과 북쪽 길이 만나는 곳이므로 교역에서 매우 중요했으며,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지점이다. 몇 세기 동안 서역으로 불교 경전을 구하는 불교 승려들이나 많은 순례자가 이곳을 지나갔고, 그 과정에서 막고굴이라는 동굴 불교 유적을 이룩했다.
둔황은 실크로드의 보고이다. 1,000년에 걸쳐 불교 예술이 발달해 온 과정을 여실히 보여 주는 막고굴이 있고 인근에는 또 다른 석굴사원인 서천불동이 있다. 고운 모래산인 명사산과 수천 년간 마르지 않았다는 월아천이 신비한 모습을 보여주며 낙타를 타고 주변을 돌아다니는 관광객들 마저 과거의 대상을 보는 듯 과거로 빠져들게 한다. 한나라 시절 건설한 만리장성과 국경검문소였던 양관과 옥문관이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그 흔적을 보여준다. 양관과 옥문관에 서서 밖을 쳐다보면 망망대해 사막으로 들어서서 터벅터벅 걸어가는 실크로드 상인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둔황 2박 후 열차 편으로 투루판으로 이동했다. 차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완전한 사막이다. 산이고 들판이고 아무것도 없다 돌과 모래뿐이다. 이런 삭막한 곳에도 가끔 오아시스가 나타나 사람들이 거주한다는 게 신기하다.
투루판은 사막 한가운데 있는 오아시스 형태의 도시이다. 천산의 남북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이며 북쪽으로 우루무치를 지나 중앙아시아를 통과하는 분기점이다. 오아시스로 인해서 과거부터 도시국가가 형성되었으며 실크로드의 핵심거점 도시였다. 한대(BC 206~AD 220)에 교하고성을 중심으로 차사왕국이 있었으나 450년 고창국이 이곳을 합병하고, 수도를 고창고성으로 옮겼다. 640년 당나라가 고창을 점령하고 서주를 설치했으며 8세기 후반 토번의 땅이 되었다가 9세기에 위구르족들이 옮겨와 살았다. 이들을 역사상 '고창회골'이라고 한다.
당나라 시절 현장법사가 둔황의 옥문관을 통과하여 이곳에 있던 고창고성에 도착했다. 당시 고창국의 융숭한 접대를 받고 많은 선물과 추천서를 받아 인도로 가서 공부하고 10여 년 후 불경을 가지고 당나라와 돌아와 번역함으로써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불교 발전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이러한 내용은 명나라시절 서유기라는 소설로도 만들어졌다. 서유기에 나오는 화염산은 고창고성 부근의 산으로 해 질 무렵이면 햇빛과 황톳빛이 어우러져 흡사 불타는 듯이 보인다고 해서 화염산이라 불리었다.
투루판의 기후는 매우 무덥다. 내가 여행했던 6월 말 낮기온이 45도 이상이었으며 밤 12시에도 40도 이상이었다. 그런 무더위에도 노천식당에서 더운 음식을 먹고 있는 현지인을 보니 인간의 적응력이 대단함을 느낀다. 이 지역 인간들의 더위에 대한 저항력과 지하에 구멍을 내서 만든 감아정으로 물을 퍼올려 농사를 지었으며 현대의 투르판은 포도농사로 성공적인 자립을 하고 있다.
투르판에 머무르는 3일간 교하고성, 고창고성을 둘러보고 남북조시대에 건설된 베제클리크 천불동과 토욕구 천불동을 들렀으며 화염산, 포도원, 아스타나 고분군과 지하수로인 카레즈와 왕족들의 거주지등을 탐방했다.
투루판 3박 후 다시 열차로 우루무치로 향했다. 우루무치는 350만 명의 인구를 가진 신장위구르 자치구 수도이다. 3세기 한나라가 멸망하면서 중국은 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했다. 7세기 당나라 때 재정복하였으나, 8세기 중엽 당나라가 멸망한 후로는 천 년간 유목민들의 터전이 되었다. 이때 실크로드를 통해 이슬람교가 들어와 뿌리내렸다. 18세기 청나라가 병합하면서 다시 중국 영토의 일부가 되었지만, 지금까지 민족 갈등의 골이 깊다.
주요 볼거리는 시내에 있는 홍산공원, 대바자르, 박물관이 있고 시외 한 시간 거리의 남산목장과 천산천지가 있다. 이중 남산목장과 천산천지는 트래킹 코스이기도 하다. 우루무치는 신장위구르 자치주로서 지금도 일부 과격파들이 독립을 주장하며 테러사건이 발생한다. 그래서인지 시내에서도 검문검색이 철저하다. 다른 도시에서는 여권을 가지고 다니지 않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지만 우루무치에서는 반드시 여권을 소지하고 있어야 한다. 시장에서도 검색대가 설치되어 조그마한 가방이나 백팩도 검색을 하고 군데군데 군이 총을 들고 경계근무를 서기도 해서 조금 살벌한 느낌이 든다.
우리 일행은 우루무치에서 2박 후 베이징을 거쳐 인천으로 귀국했다
이번 20일간의 실크로드 여행은 매우 흥분되고 보람 있는 여행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책을 읽으면서 상상 속으로만 생각했던 곳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다는 것은 가슴 떨리는 일이다. 10여 년 전 이집트 피라미드를 봤을 때와 20여 년 전 그랜드 캐년을 봤을 때 그런 느낌이었다. 수천 년 전 만들어진 건축물들이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있고 주변 환경 역시 수천 년 전 그대로라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냉난방 시설이 완비된 지금도 살아가기 어려운 척박한 곳에서 그 오래전에 그런 시설을 만들고 사람들이 살았다는 게 신기할 뿐이다.
유럽의 화려한 역사유적 역시 설렘을 주지만 수천 년 역사유적 바로 옆에 현대식 건물이 들어차 있어서 박물관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둔황과 투루판에서 본 역사유적들은 비록 건물은 긴 세월에 무너져 내려 흔적만 남아 있지만 척박한 주변환경은 수천 년 전과 그대로여서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그 당시로 온 것처럼 느껴진다. 둔황에서의 양관과 옥문관 그리고 투루판에서의 교하고성과 고창고성 그리고 석굴사원을 봤을 때의 찌릿한 감동은 평생 가슴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도시에 있는 화려한 유적보다는 오지에 남겨져있는 유적들이 훨씬 울림이 크다는 것을 느꼈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발버둥 치면서 살아갔던 우리의 선배인류들 그리고 그들이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살아간 흔적을 보고 느끼는 것이 훨씬 큰 감동을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러 번의 패키지여행으로 인류의 화려한 역사유적은 웬만큼 돌아봤으나 오지에 남겨져서 관심을 못 받는 유적은 나 역시 별 관심이 없었다. 이번 여행을 통해 세계 구석구석 오지에 숨어있는 역사유적을 찾아 선배인류들의 살았던 당시의 숨소리를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번 여행에서 중국에 대한 나의 인식이 바뀌었다. 과거 중국을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중국은 형편없는 나라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내 눈으로 확인한 중국은 내가 들었던 과거의 중국이 아니었다. 내가 방문했던 도시 일곱 개 모두가 한국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는 현대적인 도시였으며 호텔, 식당, 화장실 모든 것이 한국에 떨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의 행동 역시 나쁘지 않았다. 식당, 택시운전사등 수시로 만나는 중국인들은 대부분이 친절하고 양심적이었다. 중국인들은 인성이 엉터일 것이라는 내 생각은 잘못이었다. 내가 중국에 대해 과거에 들었던 부정적인 얘기들이 사실이었다면 중국은 최근 몇십 년 사이에 엄청난 내적, 외적 발전을 이룬 것이다. 이러한 발전이 계속된다면 경제적으로도 우리나라를 뛰어넘는 강국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이다. 중국에서 한 달 살기 하면서 중국을 다시 한번 꼼꼼히 살펴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