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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도 쓰는 보디빌더
Dec 05. 2019
"엄마, 대학 가면 빠진다며? 나 80kg 됐어"
현직 트레이너의 비만 흑역사
사춘기쯤 되면서 갑자기 살이 올랐다. 친구들은 놀려대는데, 엄마는 토실토실 이쁘다고 했다. 대학 가면 빠진다고, 안 되면 운동이라도 시켜준다고 했다. 사촌 언니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25kg을 뺐다며 나도 그렇게 될 거라고 자동응답기처럼 말했다. 엄마는 그 언니가 무언가를 먹으면 꼭 토하는 것도, 6시 이후론 물도 안 먹었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꼬마 때는 또래보다 키가 늘 10cm씩 컸고, 체중은 ‘평균 미달’이었다. 그러나 점점 키가 자라는 속도는 체중이 느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체중은 한 달에 4~5kg씩 늘어났고, 허벅지와 엉덩이는 살이 터져나갔다. 찢어진 상처가 아물 때 새살이 ‘불룩’ 튀어나오는 것처럼 허벅지와 엉덩이는 새빨간 튼 살로 메워졌다. 결국, 중3에 올라갈 때는 34인치 바지를 입게 되었다.
바지 치수가 그렇다고 해도, 고등학교 때까지는 60킬로 후반 대였는데, 대학교에 가면서 더욱 가파르게 체중이 늘었다. 갓 배운 술은 늘 모자랐고, 모자란 술을 채우기 위해 안주를 등에 업고 부어라 마셔라 했다. 내가 아니라 제아무리 말라깽이라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결국, 체중계는 나에게 ‘80’이라는 숫자를 보여줌으로써 다이어트를 강요했다. 하지만 나는 대학 가면 빠진다는 엄마 말을 여전히 무한 신뢰했고, 엄마는 비싼 운동등록비 앞에서 말이 없었다.
점점 맞는 옷이 없어졌다. 반강제적으로 원피스만 입었다. 엄마는 원피스만큼은 많이 사줬다. 아마 엄마의 가심ㅂ에 적합했던 거 같다. 나는 그런 내막을 전혀 모르고 열심히 원피스만 입었다. 나의 대학 새내기 시절 내 별명은 ‘원피스 꽃돼지’였다. 고등학교 때와 너무 달랐던 대학교 생활에 푹 빠져 그런 별명으로 불리는지도 몰랐던 시기였다. 대학교 첫여름 방학이 될 때쯤, 내 체중은 80kg을 조금씩 넘어가기 시작했다. 여름의 한 복판에 내 허벅지의 튼 살들은 자기들끼리 스치며 땀띠가 났다. 배는 D컵의 가슴보다 더 튀어나왔고, 화장실만 가도 땀이 흘러내렸다. 점점 내 몸이 버거워졌다. 조금만 걸어도 숨쉬기가 힘들어질 때 서야 상황의 심각함을 감지한 나는 엄마에게 한마디 했다.
“엄마, 대학 가면 빠진다며? 나 80kg 됐어.”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잔소리를 퍼부었다. 가만히 있으면 빠질 텐데 술을 맨날 먹어서 그렇다는 둥, 집에서 밥 안 먹고 밖에서 먹어서 그렇다는 둥 한참을 야단쳤다. 가만히 있는데 어떻게 살이 빠지냐고 따지자, 그러니까 나가서 걷기라도 하라며 등짝 스매싱을 날리고 나서야 잔소리는 멈췄다. 등짝을 맞은 것도 아프고, 운동을 안 끊어주는 것도 짜증 나고, 이래저래 억울했다. 나는 엄마 말만 철석같이 믿었는데, 엄마가 내 인생을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날이었다.
살은 좀 빼야겠고, 할 줄 아는 다이어트용 운동이 없었다. 해봤자 걷기나 줄넘기 정도였다. 줄넘기는 종아리에 알통 생길까 봐 무서워서 몸을 사리게 되고, 운동장 걷기는 지겹기 짝이 없었다. 엄마는 다이어트하라며 강제로 밥을 줄였고, 아빠는 등산을 권했다. 자꾸 걷고 움직이라고 했다. 다 내가 게으르고 많이 먹어서 그렇다고 했다. “그냥 운동 끊어줘.” 하면, 아빠는 여자애가 무슨 헬스냐 했고, 엄마는 시선을 피했다.
하도 구박을 받아서 그런지, 날이 더워 그런지, 방학이 끝날 때는 가까스로 79kg이 되었다. 도무지 운동을 시켜줄 마음이 없는 부모님 설득을 포기하고, 아르바이트라도 해서 PT를 받아볼까 했다. 하지만 학기가 시작하면서 어영부영 시간이 흘렀다. 다시 다이어트는 뒷전이 될 때쯤, 나는 한 남자를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