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색의 보석이 담긴 보석함, 삿포로의 야경
숙소가 교통편이 참 별로라는 생각이 다시금 드는 것이, 사철을 타러 가도 짧은 네 블록을 걸어야 했고 노면전차를 타러 가도 긴 다섯 블록을 걸어야 했다. 당연히 나 같은 뚜벅이에게 택시는 사치다. 택시 한번 탈 돈이면 소프트아이스크림을 수십 번은 더 먹을 수 있으니 말이다. 사철에 쓰는 돈도 아까워서 새벽마다 삿포로역까지 2.1km를 걸어 다닌 나였다. (돌아올 때도 걸어왔다) 여행지에서 분명 이것저것 잘 먹고 다녔는데 집에 와보니 4kg이 빠져있었다. 왠지 다리도 튼실해진 느낌이 건강을 회복한 기분이었다. 아무튼 또 한참을 걸어 노면전차에 탑승하고 로프웨이이리구치 정거장에서 하차했다. 목적지는 모이와야마 전망대였다.
홋카이도에는 3대 야경이 있다고 한다. 하코다테야마(하코다테), 텐구야마(오타루), 모이와야마(삿포로)의 야경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하코다테야마의 야경은 세계 3대 야경으로 꼽힐 정도로 아름답다고 한다. 텐구야마를 제외하고 남은 두 개의 야경을 보았는데 둘 다 끝내줬다. (그렇게 조사를 열심히 했는데 텐구야마 전망대를 왜 몰랐을까 아직도 의문이다.) 참고로 모이와야마의 야경은 일본 신 3대 야경에도 꼽히고 있다. 밴다이어그램으로 그려보면 일본에도 삿포로에도 한 발씩 걸치고 있는 셈이다. 참고로 일본 신 3대 야경에는 나가사키의 이나사야마 야경과 고베 롯코산 야경이 포함되는데, 이나사야마 전망대에 가봤던 나로서는 모이와야마가 훨씬 좋았다. (나가사키 미안해요.)
노면전차에서 하차해서 조금만 걸으면 전망대로 가는 셔틀버스를 탑승할 수 있다. 다만 버스 간격이 조금 긴 편이었다. 아직은 빛이 조금 남아있는 삿포로의 모습을 보고 싶었던 나는 마음이 급했다. 셔틀버스가 방금 출발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걸어서 이동하기로 마음먹었다. 걸어서 가지 못할 정도의 거리는 전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경사가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못한 판단이었다. 전망대로 가는 로프웨이 입구에 도착하자 숨이 턱에 차올랐다. 조명도 많지 않은 외진 산길을 슬쩍 오르니 꽤나 세련된 로프웨이 건물이 나를 반겼다. 숨을 잠시 고르고 다시 몇 층인가 건물을 올라 티켓을 구입하고 로프웨이에 몸을 실었다.
삿포로라는 도시를 조금 얕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생각한 홋카이도는 자연경관이 멋진 곳이고 눈이 많이 쌓이는, 노면전차가 딸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지나다니는 지방의 소도시(?!)라는 것이었다. 삿포로역이나 숙소가 있는 스스키노라는 번화가를 보면서도 '이 근방만 조금 발전되어 있고 큰 도시는 아니겠지'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실제로 시로이코이비토파크 주변도 낮은 건물이나 공장 정도가 띄엄띄엄 있는 한적한 마을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생각이 고정되어가고 있던 찰나였다. 로프웨이가 두둥실하고 떠오르자 점점 삿포로 시내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빼곡히 들어선 빌딩과 반짝이는 마천루가 지평선 끝까지 펼쳐져있는 것을 보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나중에 조사해 보니 홋카이도의 인구가 500만이고 그중 절반에 약간 못 미치는 200만 정도가 삿포로에 살고 있었다. 소도시라고 할 규모가 아니었던 것이다.
로프웨이에서 내려 케이블카로 갈아타고 조금 더 올라가니 비로소 모이와야마 전망대에 도착할 수 있었다.(참고로 우리나라에서 케이블카라고 부르는 매달려 가는 삭도를 일본에선 로프웨이라 하고, 하단 케이블을 이용해 선로를 따라 이동하는 것을 일본에선 케이블카라 한다.) 이제 슬슬 사람들이 야경을 보러 올라올까 말까 고민하는 시간이라서 그랬는지 아직 전망대에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산 너머로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어 멋진 노을이 펼쳐지고 있었고, 삿포로방향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삿포로역을 중심으로 몇 블록 정도는 높은 빌딩이 여러 가지 색색으로 빛나고 있어 주변의 낮은 주황색 가로등빛과 대조적으로 화려하게 보였다. 사진을 찍고 보니 마치 여러가지 큼직한 보석이 주황빛 작은 보석들 사이에 우뚝 솟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3대 야경이니 100선이니 하는 것들을 믿지 않았는데, 모이와야마의 야경에서는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낑낑거리며 삼각대를 들고 다녔던 결정은 감히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놓치고 싶지 않은 야경을 프레임에 담을 수 있었다.
삿포로의 밤은 과연 만만치 않았다. 바람막이 하나만 입고 버티고 있자니 차가워진 공기며 바람이 슬슬 뼛속으로 파고들려 애쓰고 있었다. 둘둘 짝지은 연인들이 올라와 사랑의 종을 울렸고, 삼삼오오 친구들끼리 놀러 온 경우도 많이 보였다. 왠지 혼자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고 싶은 풍경도 충분히 보았겠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토산품점을 이리저리 구경하고 있자니 검은색 귀인지 팔인지를 하고 있는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모이와야마의 캐릭터였던 것 같다. 2022년 10월에 방문할 당시에는 잘 몰랐던 점인데 2023년이 사실 검은 토끼의 해란다. 이제와 여행기를 쓰며 사진을 다시 보고 있자니 왠지 검은 토끼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 같다. 당시에 캐릭터를 보았을 땐 뭐 이리 기괴한 것이 다 있나 하는 생각밖엔 없었지만.
올라갈 땐 대기 없이 수월하게 올라왔는데, 어느새 전망대에 사람이 많이 올라와있었던 모양이다. 내려갈 때는 줄을 한참 서고도 한 팀을 먼저 보낸 뒤에서야 내려갈 수 있었다. 오늘의 목표했던 곳들을 모두 방문하고 나자 쌓여있던 피로가 본격적으로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사실 전날부터 한숨도 자지 못하고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것 아닌가. 약간의 흥분상태로 피로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긴장이 조금 풀렸던 듯싶다. 나름 비워둔 가방이 다시 묵직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전망대를 내려와 건물 앞으로 나가니 셔틀버스에 사람들을 태우고 있었다. 한 사람만 더 타시라고 하는데 내 앞에 있는 두 명이 일행이었는지 다음에 타겠다고 했다. 그러면 내가 타면 되겠구나 하면서 앞으로 나서려는 찰나 뒤에 있던 웬 인간이 앞으로 훌쩍 뛰어가 버스에 탑승했다. 그리고 곧이어 버스가 문을 닫고 출발해 버렸다. 한 동안 경험해 본 적 없는 새치기에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벙쪄있다가 하릴없이 다시 노면전차가 있는 곳까지 터덜터덜 걸어갔다. 황당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앞의 두 사람과 나까지를 일행이라고 생각한 내 뒷사람의 오해였지 않나 싶기도 하다. 여행에서 기분 나쁜 일이 종종 생길 수 있지만 계속 마음에 담아두는 것은 내 손해인 것 같다. 피곤은 했지만 너무 마음 쓰지 않기로 했다.
중간에 저녁 먹을 시간이 없어 슬슬 배가 고파지던 차에 노면전차에서 하차해 숙소로 이동하려는 와중에 어디서 많이 보던 간판이 눈에 띄었다. 삿포로에 가면 꼭 들러보라는 유명 맛집 '라면 신겐'이었다. 줄 서서 밥 먹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시간이 되면 가봐야지 정도로 생각했던 곳인데 나도 모르게 그 근처를 지나가게 되자 슬쩍 욕심이 났다. 일부러 지나가면서 보니 밖에까지는 줄을 서있지 않았는데 실내에 사람이 좀 앉아있었다. 다음에도 이 정도 줄이면 기다려 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은 몸이 피곤해서 앉아서 기다리고 할 체력이 없어 그냥 지나쳤다. 앞서 유바리멜론 이야기 때도 그렇지만, 눈에 띄고 기회가 있을 때 먹어야 한다. 내가 다음날 저곳을 다시 찾았을 때는 가게 바깥까지 줄이 용트림을 하고 있었고, 나는 라멘신겐의 맛을 아직도 궁금해만 하고 있다.
편의점에서 가볍게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사서 숙소에 들어갔다. 뜨끈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니 다시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어진 것 같았다. 호로요이 한 캔을 마시며 나에게 허락된 한 칸 침대에 몸을 뉘었다. 오늘 당겨 쓴 일정 덕분에 비어버린 내일 오전 계획을 세우기 위해 태블릿을 펼쳤다. 그렇게 배에 태블릿을 올린 채로 기절하듯 잠들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