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루의 낮
기차역으로 오타루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선구자들이 남긴 팁은 "미나미오타루역"에서 내려서 "오타루"역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관람하라는 것이다. 오타루역에는 관광객들이 많이 내리는 데다 모두 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우르르 몰려다니게 되어 호젓한 관광이 힘든 반면에 미나미오타루역에서는 사람도 많이 내리지 않고 무더기 관광객과는 반대로 움직이게 되어 여유로운 관광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굿찬에서 갈아탄 열차의 종점이 오타루역이었던 관계로 그냥 오타루역에서 관광을 시작하게 되었다. 다행히 사람이 많이 들어오는 시간은 아니었는지 내리는 사람도 많지 않았고 전반적으로 한산한 분위기였다. 비수기 홋카이도가 나에게 축복을 내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역 앞으로 나오니 쭉 뻗은 도로 너머로 푸른 바다가 넘실거렸다. 아직은 오타루 특유의 분위기를 느낄만한 부분은 없는 작은 도심지일 뿐이었다.
역에서 나오자마자 좌측으로 "삼각시장"이라고 쓰인 새빨간 간판이 보였다. 역 주차장에서 계단을 타고 올라가는 곳에 입구 하나가 있을 뿐인 시장이라 눈에 잘 띄지 않을 위험이 있었는데 "나를 좀 봐줘요!"라고 강하게 주장하는 간판 덕분에 시선을 강탈당했다. 해산물이 유명한 홋카이도에서도 해산물을 '가득'린 덮밥을 파는 것으로 유명한 곳이다. 방송에도 몇 번 나왔던 것으로 아는데 생각보다 입구가 보잘것없어서 놀랐다.
안에 들어가니 신선한 비린내음이 풍겨왔고 입구 근처엔 건어물 등 오미야게(선물용 지방 특산물)를 파는 가게가 있었다. 길게 뻗은 복도를 계속 따라 들어가니 해산물덮밥을 파는 곳들이 늘어서있었다. 이 시장에서 유명한 음식은 바로 삼색덮밥(三色丼산쇼쿠동)이다. 해산물 3종을 밥그릇 위에 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얹어서 파는 덮밥이다. 해산물덮밥(海鮮丼카이센동)이 너무 흔해서 특색을 부여하고자 만든 음식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연어알, 성게알, 게살, 연어, 참치 등 원하는 해산물이 듬뿍 올라간 화려한 덮밥이 시선을 확 잡아 끈다. 가격이 보통 한 그릇에 최소 2만 원 이상 하고 비싸게는 5만 원까지도 하는데 '그래도 여행기분 내려면 한 번 먹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내가 좀 더 여유 있는 여행자였다면 경험 삼아한 그릇 해봤겠지만 나는 아직 가성비가 중요한 사람이라서 차마 손이 가지 않았다. (화려하긴 했지만 밥그릇이 작기도 했고.) 언젠가 주머니사정이 넉넉해지면 먹어볼 리스트로 마음속 노트에 적어두었다.(노트가 미어터지는 중이다.) 다른 곳에서 보지 못한 호객행위가 상당하지만 그렇다고 강제적이진 않아서 적당히 사람 사는 내음을 느끼게 했다.
참고로 여행기를 작성하면서 알게 된 丼(우물 정 의 이체자)의 유래가 꽤나 재미나서 여기에 남겨본다. 丼는 아주 오래전에는 우물정(井) 자와 혼용되어 쓰이기도 했던 한자인데 "우물에 무언가 떨어져서 나는 소리 '담'"으로 발음되기도 했다. (중학교 때 丼라는 글자가 "퐁당 퐁"이라는 한자라고 말씀해 주신 한자선생님의 우스갯소리가 완전한 우스갯소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물정(井) 자가 우물을 의미하는 한자로 굳어지면서 가운데 점이 들어간 한자인 丼는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다 일본에서 돈부리의 (돈) 자를 표기하기 위해 발음이 같았던 丼을 차용했다고 한다. 이후 우물이라는 의미는 완전히 사라지고 이제는 돈부리를 의미하는 한자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심지어 중국으로 역수출되어 중화권에서도 丼는 돈부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삼각시장을 구경한 후 오타루역 정면으로 난 길을 따라 운하를 향해 걸었다. 가는 길에 폐선된 기찻길인 테미야 선이 있었다. 일본에선 3번째, 홋카이도에선 최초로 개통된 철도가 지나던 길인데 현재는 운행하지 않고 기찻길만 남아있다고 한다. 봄여름에는 잔디도 좀 있고, 겨울에는 오타루눈축제를 위해 잘 꾸며져 점등도 된다고 하는데 가을엔 딱히 볼 것이 없다는 느낌이었다. 이따금씩 커플들이 선로에서 손을 마주 잡고 걸어가는 등의 모습이 보였다. 나 홀로 여행객인 나에겐 그저 부러운 풍경일 뿐이다. 조케따이쒸.
철도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오타루 운하 플라자가 나온다. 현대식 건물들을 지나 갑자기 나타나는 넓은 공간에 큼직한 벽돌로 지어진 오래된 느낌의 건물에 조금 위화감을 느꼈는데, 예전에 운영하던 창고건물을 리모델링해서 현재 관광안내소 등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안에 들어가면 오미야게를 파는 작은 가게와 각종 관광 팸플릿을 비치한 곳이 나오고, 관광안내소의 사람들이 방문하는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한쪽 벽면에는 유리잔을 피라미드처럼 세워놓아 계속 색이 변하는 조명을 설치하여 눈길을 끌고 있었다. 왠지 겨울에 보면 더 아련한 느낌을 줄 것 같은 장식이었다. 홋카이도가 눈의 도시라는 나의 편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운하 플라자는 영화 "러브레터"에도 등장하는 곳이라고 한다. 예전에 영화를 봤던 기억은 있는데 장소 같은 것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애초에 그 영화를 보면서 "저 장소에 가봐야겠어."라고 생각할 만큼 일본여행에 열망이 있던 시절도 아니긴 하다. 홋카이도에 오기 전에 러브레터를 다시 한번 보면서 예습을 할까 싶었는데 애초에 내가 좋아하는 영화도 아니었어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포기했었다. (내 감성은 이제 건어물이 된 듯하다.) 이제는 홋카이도에 다녀왔기 때문에 영화를 보면 아는 장소들이 눈에 들어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엔 미루지 말고 한번 더 봐야겠다.
운하박물관을 나와 그 뒤로 쭉 늘어서있는 창고군을 더 둘러보았다. 각종 공방들이 있는 곳이었다. 오타루의 또 하나의 명물이 유리공예이기 때문에 대부분 유리공예와 관련된 시설들이 많이 있었다. 나도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부엉이장식을 하나 사드릴까 싶어 유심히 보았는데 정교한 것은 너무 비싸고 간단한 것은 너무 볼품이 없었다. 극과 극이었다. 다른 곳에서 그 중간즈음의 무언가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그냥 구경만 하다 나왔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여기서 사는 게 제일 무난했지 않았나 싶다.
다시 운하박물관 쪽으로 돌아와서 길을 건너니 드디어 그 유명한 오타루 운하를 만날 수 있었다. 오타루 운하 풍경의 특징은 바로 클래식함이다. 시멘트로 발라 마무리한 운하가 아니라 깎은 돌을 맞물려 쌓아 울퉁불퉁하게 만든 운하와 산책로를 중심으로 한 쪽엔 붉은 벽돌을 사용해 레트로한 느낌을 주는 창고 등이 있고 반대쪽엔 도로와 각종 호텔 및 음식점 등이 있는 풍경이다. 마치 대항해시대의 리스본 같은 항구도시 느낌을 풍긴다. (물론 그 느낌은 내가 대항해시대 게임에서 경험한 것 정도가 바탕이지만) 운하를 오가며 관광을 할 수 있는 배는 모터보트긴 해도 옛날 배와 같은 디자인으로 만들어져서 분위기를 크게 해치지 않는 느낌이었다.
오타루운하는 물길을 파내서 만든 운하가 아니라 이미 바다이던 곳을 운하공간을 남겨놓고 그 건너편을 매립하여 지금의 형태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총연장은 1km가 넘고 깊이는 2.5미터 정도인데 사실 예전에 존폐의 위기가 한번 있었다. 일본 패전 후 오타루항이 재정비되어 메인 항구의 역할을 맡게 되자 운하가 필요 없게 되어 방치되었다. 그 와중에 오타루항까지 물류를 운반하는 도로가 너무 협소하다는 의견이 있어 오타루운하를 메우자는 의견이 나왔는데 지역 주민들의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현재 관광지로 사용되는 곳들에는 이렇게 주민 반대로 개발이 무산되어 살아남은 곳이 꽤 많다. 유후인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토론 끝에 북쪽 운하는 그대로 두기로 하고 남쪽운하는 폭을 줄여 도로를 넓히는데 썼다고 한다. 현재 우리가 오타루 운하라고 하면 생각나는 대표적인 이미지는 이때 줄어든 남쪽 운하다. 이렇게 살려둔 운하가 오타루에 연 천만의 관광객이 찾게 하는데 일조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나라의 개발일색인 분위기도 조금 더 생각해 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싶은 부분이다.
운하길을 따라 쭉 걸었는데 아무리 가도 사진과 영상에서 본 그 거리가 나오지 않았다. 왼쪽으로는 공장의 커다란 신식 사일로들이 서있었고 오른쪽으로도 간간히 이름 모를 음식점들이 나오는 특색 없는 풍경이 계속되었다.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의심이 슬슬 들면서 다시 돌아가야 되나 생각을 하던 찰나 마침내 익히 보았던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오타루 오르골당이었다. 개화기 서양풍 건물의 외관에 자연스럽게 옥빛 녹이 슨 청동지붕, 중앙의 간판 부분엔 "오타루오르고루당"이라고 쓰여있었고 그 앞으로 증기시계가 있었다. 워낙에 널리 알려진 곳이라 바로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일단 스미요시신사를 봐야 하는 일정 때문에 잠시 뒤로 미루어두었다. 건물 내부는 시간이 지나도 조명빛으로 똑같지만 신사의 낮풍경은 시간이 지나면 사진에 담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번 여행은 사진촬영에 초점이 많이 맞춰져 있었다. 인스타그램에 그동안 찍은 사진들을 하나둘씩 올리면서 팔로워가 늘어났고 그러면서 사진 찍는 재미를 오랜만에 다시 느끼고 있던 차에 오게 된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장비도 욕심을 부려 많이 챙겨 들고 다녔고 풍경이 좋다는 곳들도 미리 알아보았다. 눈에 담는 여행도 중요하지만 결국 그 여행을 제대로 추억하기 위해서는 사진과 기록이 필요하다. 물론 좋은 사진을 찍어 사람들의 호응을 얻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다. 나는 관종인지도 모르겠다.
오르골당에서 남들 모두 걷는 상점거리방향으로 걷지 않고 미나미오타루역이 있는 방향으로 올라갔다. 한참을 걸어 역에 도착했는데 그만큼을 더 걸어야 스미요시신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꽤나 힘든 여정이었는데 중간에 만난 작은 서점 하나가 나의 기분을 따스하게 만들어주었다. 요즘엔 보기 힘든 동네의 작은 서점이었다. 서점 주인이 좋다고 생각하는 책을 따로 모아 전시한 것 같았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창문에 장식한 아기자기한 종이장식들이 귀여웠다. 일이 끝나면 접어서 가게 안에 들여놓을 접이식 목제입간판이 가게 밖에 서있었는데 직접 그린 듯한 색색의 글씨가 예뻤다. 가게가 작아 많은 책을 보유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보고 싶은 책이 있는 동네 주민은 서점 주인에게 무슨무슨 책을 구해달라고 이야기를 하고, 며칠의 즐거운 기다림 후엔 그 책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정감 있는 우리네 옛 동네서점의 풍경이 그려졌다. 택배에 익숙해진 지금은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가고 싶지 않기도 하지만 그립고 반갑기는 한 그런 과거의 풍경이 그 서점에 있었다.
잠시 옛 추억에 젖어있다가 조금 더 걸어가니 스미요시신사의 모습이 보였다. 이 신사는 오타루를 찾는 사람들도 대부분 모르고 지나치는 곳 중에 하나다. 일단 신사 자체가 엄청 크거나 하지 않고 상점가가 발달한 것도 아닌 데다 주요 관광지에서 거리가 좀 있기 때문에 당일치기 방문객들은 혹여 알더라도 방문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내 생각엔 풍경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 방문해 볼 만한 곳이다. 오타루 앞바다가 있는 곳까지 한 번에 뻗은 도로와, 그 도로의 연장선상에 있는 높은 단에 놓인 신사의 풍경이 꽤나 드라마틱했다. 가을이라 신사까지 난 길 좌우로 심은 나무에 노랗고 붉은 물이 들어있었고 조금씩 떨어지고 있는 낙엽들이 정취를 더했다. 개인적으로는 중간을 가로지르는 전선만 없다면 더욱 드라마틱한 풍경이 될 것 같은데, 신사가 사진사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니 그저 아쉬움만 남을 뿐이다. 배가 고파서 그랬을까 이상하게 자꾸 스시요미(sushi yummy - 스시 맛있엉) 신사로 생각되어서 참 헷갈렸던 기억이다.
신사 앞까지 놓인 계단을 모두 오르고 나니 숨이 찼다. 아무 데나 앉았다가 이따금씩 방문하는 참배객의 손가락질을 받을까 봐 서서 돌아다니며 숨을 골랐다. 우리가 한국에 온 일본인을 알아차리듯, 일본인들도 한국인 관광객을 한 번에 알아차린다. 예를 들면 남자가 투블럭컷에 뿔테안경을 쓰면 거의 대부분 한국인이라고 한다.(난데?) 나도 돌아다니면서 말도 붙이기 전에 한국말로 인사를 받은 적이 많다. 전형적인 한국인인 모양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행실에 신경을 써서 한국인의 친절함과 올바름을 각인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멋진 한국인이 되기 위해 아무 데나 앉지 않고 서서 숨을 돌린 것이다.
심호흡으로 정신을 좀 되찾자 오타루 앞바다까지 이어진 길이 눈에 들어왔다. 아래서 본모습도 멋지고 위에서 내려다 본모습도 멋져서 올라온 보람이 있었다. 조용한 신사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곧게 뻗은 길 너머로 넘실거리는 푸른 바다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