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루의 밤
올라간 길을 다시 걸어 내려와 오르골당으로 돌아왔다. 여기부터가 진짜 오타루의 유명한 상점거리였다. 핼러윈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호박 가득한 광장 건너편에 오르골당이 있었다. 오타루 오르골당 건물은 약 100여 년 전 어떤 미곡상이 지은 본사였다고 한다. 오르골당 상점은 건물보다는 이전에 개업했지만 이후 이 건물을 매입하여 오르골이 가득한 곳으로 만들었다. 음악을 저장하고 재생할 방법이 없었던 그 옛날에 스위스의 시계장인이 당시 막 개발된 태엽장치를 이용하여 금속 편을 튕겨 소리를 내는 장치를 고안했다고 한다. 이후 네덜란드로 전해진 이 물건은 orgel이라고 불렸는데 이것이 일본으로 건너와 오루고루가 되어 지금까지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아니 왜 오르게루가 아니고?) "옛날 사람에겐 오르골은 귀한 물건이라는 인식인데 요즘 사람들에겐 신기하고 값싼 장난감이라는 인식입니다."는 오르골당 관계자의 인터뷰를 어디서 본 기억이 난다. 축음기도 없던 옛날 분들에게 오르골은 귀하고 값비싼 물건이었겠지만 현대인들에겐 중국산이라면 싸게는 2,3천 원이면 구입할 수 있는 장난감이다. 하지만 그런 오르골이라도 사람들의 환상을 자극할 수 있다면 다시 값비싼 물건이 될 수 있다. 오르골당에 들어가는 순간 5천 종 8만여 점의 오르골에 압도된다. 특히 형광등이 아닌 주황색 백열등으로 실내를 밝히고 있어 공간이 아늑하고 따사로운 느낌을 주는데 거기서 이미 오르골당이 주는 환상은 시작된다. 여기저기서 마음껏 만져볼 수 있도록 진열된 오르골들이 내는 소리가 마치 아기들이 갖고 노는 장난감의 자장가처럼 들려오면서 마음이 말랑해진다. 그리고 각종 장식이 태엽으로 빙글빙글 돌면서 만들어내는 비일상의 풍경 속에서 관광객은 자연스럽게 지갑을 열게 되는 것이다. 오르골의 가격은 저렴한 것도 한국돈으로 몇만 원씩은 하는 데다 비싼 것들은 백만 원대까지도 올라가기 때문에 숫자 0을 잘못 센다면 큰 낭패를 볼 수 있다. (어머! 이렇게 예쁜데 10,000원밖에 안 해!! 아니 다시 보니 10,000엔이네??)
오르골당 2층과 3층에는 만질 수 없는 고급품이나 캐릭터상품 등이 있고, 오르골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오래된 기기들을 구경할 수도 있다. 지금은 고정된 원통을 굴려 짧은 음악을 재생하는 정도로만 생산되지만 옛날에는 긴 원판을 이용해 길게 재생되기도 했고 원판을 갈아가며 다른 노래를 들을 수도 있었던 모양이라 퍽 신기했다. 옛 오르골들의 소리를 들어볼 수 없었던 점은 조금 아쉬웠다. 오르골당 건물의 2,3층은 예전 건물의 구조가 그대로 남아있어 바닥도 나무바닥이었다. 걸을 때마다 삐그덕거리는 나무소리가 들려 조금 무섭기도 했다. 특히 3층으로 오르는 나무계단은 사람들이 많이 밟고 지나간 가운데 부분이 움푹 파여있어 세월을 느끼게 해 주었다. 건물 자체가 주는 예스러움에 오르골이라는 소품이 더해져 시간여행을 제대로 하는 기분이었다.
오르골당 건너편에는 작은 광장이 있었다. 핼러윈 호박인 '잭 오 랜턴' 장식이 커다랗게 광장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사람이 들어가서 호박에 먹히는 장면을 연출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나도 들어가서 잡혀먹는 사진을 찍히고 싶었지만 홀로 여행자에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여행사진을 찍을 때 가끔 이렇게 아쉬울 때가 있다. 풍경 사진은 잔뜩인데 내 사진은 잘 없게 되는 것이다. 물론 누군가와 함께 갔어도 그 사람이 내 마음에 드는 내 사진을 찍을 능력이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그래서 언젠가는 사진을 잘 찍는 친구와 함께 여행을 가서 서로 품앗이하며 인생사진을 남기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 있다.(근데 내가 그사람보다 잘 못 찍으면?!?!)
왁자지껄하게 사진을 찍는 학생들을 뒤로하고 광장을 넘어서면 그 유명한 르타오 본점 건물이 있다. 르타오는 오타루의 유명한 디저트 전문점이다. 치즈케이크가 가장 유명하다고 하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디저트들을 판매한다. 내가 사전조사를 위해 유튜브영상을 보면서 정말 귀에 인이 박히게 들은 것이 "르타오는 오타루를 거꾸로 한 것입니다."는 것이다. 르타오 이름을 정할 때 오타루 이름을 거꾸로 붙인 것이라고 한다. 유명 디저트점 이름의 유래치고는 조금 귀엽다고 할까.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열심히 언급하고 있고 결국엔 나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네이밍이 인지도에 주는 영향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나도 서울에 "울서 디저트카페"를 창업해 볼까?) 르타오 본점 2층에는 찻집처럼 운영하는 곳이 있어 차와 함께 한두 가지 케이크를 동시에 맛볼 수 있어 인기가 좋다고 했다. 나도 가보려고 했는데 엄청난 대기인원에 포기하고 말았다. 사실 치즈케이크도 못 먹고 왔는데 조금 아쉽긴 하다. 한국 백화점에 입점해 있다고 하던데 한번 방문해볼까 싶다.
아무튼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자 줄을 서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치즈+우유 믹스소프트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그렇게 나는 인생에서 가장 맛있는 소프트아이스크림을 찾게 되고 말았다. 가까운 곳이었다면 좋았으련만. 어찌 홋카이도같이 먼 곳에 있단 말이오. 이는 마치 견우와 직녀의 이별과도 같이 느껴진다. 적절한 치즈향, 고소한 우유맛에 콘 자체에서도 커피 향이 나는듯한 은은한 맛이 느껴졌다. 앞으로 오타루를 찾는 사람들에겐 무조건 이 아이스크림을 추천하기로 마음먹었다.
르타오 본점 건물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상층 종탑까지 올라갈 수 있게 되어있었다. 종탑에 작은 종이 매달려있기도 하고 주변보다 아주 약간 더 높아서 오타루 상점거리를 조망하기에 꽤 괜찮은 곳이다. 오르는 사람이 많은 편도 아니었어서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었다. 다만 같은 시간에 올랐던 분들이 종을 너무 세게 쳐서 귀청이 떨어질 뻔했다. 작은 종이지만 소리가 꽤나 크니 울릴 때는 조금 살살 울려보는 게 어떨까 싶다.
홋카이도는 설탕의 원료 중 하나인 사탕무가 재배되는 곳이라고 한다. 참고로 오키나와에선 사탕수수가 재배되므로 냉온대에서 재배되는 사탕무와 열대지방에서 재배되는 사탕수수 모두를 재배할 수 있는 흔치 않은 나라가 일본이다. 아무튼 홋카이도의 설탕은 특산물로 꽤 유명한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스위트(일본에서 단 맛의 디저트를 일컫는 말)가 상당히 발달해 있다. (물론 홋카이도가 유제품이 발달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앞서 방문했던 시로이코이비토도 그렇고, 공항에 가면 꼭 사 오는 로이스 초콜릿의 산지도 홋카이도다.
오타루에는 유명한 곳이 세 곳이나 있는데 앞에 소개한 르타오 이외에도 롯카테이, 키타카로라는 디저트 전문점도 유명하다. 키타카로에서는 내 취향의 디저트를 발견하지 못했는데 롯카테이에서는 제일 많이 팔리는 제품으로 "마루세이 버터샌드"를 추천하고 있어 맛이나 보고자 하나를 집어 들었다. 나중에 숙소에서 먹어본 바로는 너무 달았다는 것이 솔직한 평이다. 부드럽게 구운 쿠키 사이에 건포도가 박힌 버터크림이 들어있는데 약간 느끼하달까 싶은 데다 과하게 달았다. 그래서 귀국하던 날 신치토세공항 면세점에서 고민고민하다가 다른 선물과 함께 버터샌드 5개들이 한 상자를 더 사다 어머니께 드렸다. 드리면서 "엄청 달아서 맛없을 수도 있는데 맛이나 보시라고 사 왔다."라고 주의를 드렸다. 나중에 어머니가 이모에게 두 개를 드렸고, 그것을 이모와 이모부가 하나씩 나누어 드셨다고 한다. 그리고 세분 다 너무 맛있었다고(빈 말씀은 절대 아니었다.)하셔서 취향이 이렇게까지 갈릴 수도 있구나 싶었다. (내가 먹어보라고 줬던 다른 사람은 나와 똑같은 반응이었으니 나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인터넷에서 사전조사를 하면서 인생 디저트라고 하는 분들도 많이 계셨어서 내가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 수도 있고, 나는 상온에서 먹었는데 어머니는 냉장하여 드셨다고 해서 보관방법의 차이일수도 있겠다 싶었다. 무엇이 되었든 직접 먹어보고 판단하는 것이 최고다. 남의 이야기만 듣고 사거나 사지 않거나 하지는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오타루의 상점거리를 한참 구경하면서 천천히 걷다 보니 다시 운하가 나왔다.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있어 무슨 일인가 가보니 합창단 같은 분들이 노래를 하고 있었다. 메인 가수가 한 분 따로 있고 뒤에는 코러스를 선 모양새였는데 노래가 상당히 프로페셔널했다. 왠지 때 이른 크리스마스 노래같이 들려서 교회에서 나오신 분들이 아닐까 싶기도 했는데, 일본의 기독교 인구는 총인구의 1%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대대적인 행사를 하는 모습은 잘 본 적이 없다. 특히나 크리스마스가 2달이나 남은 이 시점엔 더더욱 그렇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공연이었고 무슨 노랜지도 알지 못했지만 시원한 가창력에 한참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공연이 끝나면 사람들이 한꺼번에 움직일 것 같아서 중간에 먼저 이동했다. 운하의 한쪽으로 난 산책로를 천천히 따라 걸으면서 잔잔하게 흐르는 운하를 구경하고 있자니 마음이 평온해졌다. 예전에는 가스등만 켜두어서 은은하고 따스한 느낌이 돌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파란색 LED가 추가로 설치되어 상당히 인공적인 느낌이 난다. 화려함은 더해졌지만 로맨틱함이 부족해졌달까. 과한 것과 모자란 것은 모두 좋지 않다고 하는 말을 알 것 같았다. 산책로 반대편의 옛 창고건물들에는 음식점이나 술집들이 들어섰는데 이따금씩 난 창문으로 보이는 내부 모습이 따스하고 아늑해 보였다. (성냥팔이 소녀의 마음이 나와 같았을까...) 이 또한 바깥의 파란색 LED 덕분에 추운 기분이 들어서 상대적으로 밝은 백열등 조명을 설치한 실내가 그렇게 보였던 것은 아닐까 싶다. 붉은 담쟁이덩굴이 뒤덮은 벽면이 그 운치를 더했다. 다만 산책로에는 삼삼오오 커플과 가족단위 여행객이 가득이라 혼자 다니는 나의 설 곳이 참 마땅치 않았다.
처음 오타루역에 도착해서 곧장 걸어 만났던 오타루운하의 다리에 도착했다. 아직도 사람들이 그 다리에서 오타루운하의 야경을 촬영하고 있었다. 나도 그렇게 오타루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고 돌아가려고 하는데 오타루역까지 도로가 쭉 뻗어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고생고생하며 들고 다닌 삼각대를 한번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리개를 바짝 조이고 셔터스피드를 길게 잡아 장노출 사진을 찍으니 가로등과 신호등이 예쁜 빛 갈라짐을 보여주었고 오르내리는 차량들이 도로에 궤적을 그려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요놈은 뭐 하는 놈인가"하는 표정으로 흘끗거리며 지나갔지만, 남들과 다른 사진을 찍기 위해선 그런 시선쯤은 견뎌내야 한다. 최후의 체력까지 장렬하게 불사 지른 나는 오타루역까지 간신히 기어올라가 도착한 열차에 곧바로 몸을 실었다. 좀 더 넉넉하게 쉬고 싶었는데 야속한 열차는 30분 만에 나를 삿포로역에 내려주었다.
아침부터 일정에 쫓겨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한 나는 저녁이라도 본격적으로 먹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삿포로역의 상가인 에스타 10층에는 "라면공화국"이라는 라멘 집합소가 있다. 8개의 매장이 한 곳에 모여 레트로한 테마로 꾸며놓은 곳으로 관광객뿐 아니라 현지인들도 많이 찾는 곳이라고 한다. 신치토세 공항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라멘 도장"이라는 라멘가게들이 운영되고 있고, 예전에 갔던 후쿠오카에 "라멘 스타디움"이라는 곳도 있었어서 나름 일본의 전통 있는 영업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유튜브 어디에선가 추천한 가게가 있었는데 기억에서 깔끔하게 지워져 있던 관계로 사람이 없을 것 같은 구석진 가게에 들어갔다. 하지만 8개 가게는 모두 인기가 있었던 관계로 구석진 곳에도 사람은 많았다. 내가 들어간 곳은 "미소노"라는 곳이었는데 계란이 한알 다 들어가고 토핑이 푸짐한 것이 특징이었다. 생맥주 한 잔을 시켜 먼저 들이키고 있자니 따끈따끈한 라멘이 나왔다. 내가 좋아하는 반숙 계란이 반 갈라 동동 떠있었고 고기와 목이버섯, 파가 듬뿍 올려져 있었다. 다른 재료는 사실 무엇인지 모르는데 그저 기억나는 것은 맛있게 먹었다는 것이다. 생맥주도 맛있는데 라멘국물도 맛있어서 물배가 차올랐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전투적으로 먹어치우고 밖으로 나오니 배가 출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물배라서 그래도 금방 소화가 될 거라며 숙소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완전히 파김치가 된 나는 샤워를 하고 들어와 또 기절하듯 잠들었다. 여행지에서 자꾸 기절하는 걸 보면 확실히 나도 체력이 많이 죽기는 했구나 싶었다. 9박 10일로 돌아다녀도 기절까지는 하지 않았는데. 흐르는 시간 먹어가는 나이를 실감하게 하는 게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