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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tal Eclipse Jul 23. 2024

진격의 거탑

-횡성군&평창군






  배꼽이 동그스름해졌다. 넉넉해 보이겠지 무심한 척 해도 각이 없어지는 몸이 원망스럽다. 나잇살이라 해도 툭 튀어나온 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무절제. 게으름. 사실 그 정도까진 아닌데. 

 이래선 안되겠다 싶다. 봄날의 강력한 황사가 어제 극강의 기세를 떨쳤지만 오늘은 그나마 덜하다고 한다. 일요일인 내일은 모래 섞인 비가 내릴 거라는 예보가 있으니, 오늘 나가야겠다.  

 영동고속도로를 달려 횡성으로 간다. 명품 한우로만 기억되기에는 억울하다. 횡성의 매력은 한량이 없다. 뼛속 시린 겨울을 나고 녹색의 계절을 맞기 전 거쳐야 하는 황색 시간의 움츠림. 본디 색을 사진에 담지 못해 아쉽고 또 아쉽지만 이것 또한 강원도의 본질인 것을. 횡성 호숫길을 걸으며 답답한 모든 것을 수장시켜야겠다. 통통해진 뱃살과 동그스름해진 배꼽과도 작별을 고할 것이다. 가장 완벽한 도형이 원이라고 하지만 신체 부위에 한해서 원형은 곧 죄악이다.    


 횡성군 갑천면에 있는 횡성호는 횡성댐이 만들어지며 조성된 인공호수다. 다도해의 해안선이 꾸불거려 매혹적이듯 호수와 접한 호숫길이 굽이치며 이어지는 까닭에 풍경의 변화도 다채롭다. 시선의 방향이 동서남북으로 사정없이 이동한다. 오전 10시도 되기 전이라 한산하다. 낮은 구름이 회색 하늘 밑으로 스며들어 자연이 만들 수 있는 가장 차분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멜랑콜리한 하늘은 호수 위에도 하나 더. 멀리 보이는 산맥의 갈색 실루엣은 3월이 봄인지 가을인지를 의심하게 한다.  

 호평 일색인 호숫길 5구간을 택해 발자국을 남긴다. 총 6개 코스 중 서울의 지하철 2호선처럼 유일하게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구간이라고 한다. 적적한 분위기가 한몫했겠지만 멍청한 눈으로 호수를 응시해야 하는 지점이 곳곳에 나타난다. 수몰돼 가라앉아 있는 것들의 속내인가. 얄팍하지만 절대 관통할 수 없는 외로움이 수면에 코팅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멈춰 선 곳들이 자꾸 쌓이니 운동효과는 떨어지기 마련이다. 매몰차게 돌아서야겠다. 다시 발걸음이 빨라진다.

   

횡성호숫길 5구간


 잰걸음으로 5구간을 완주해 출발점으로 돌아왔다. 쨍한 하늘을 배경으로도 호수는 탄성을 자아낼 경치를 선물하겠지만 오늘 같은 회색의 분위기도 몽환적이라 마음에 든다. 칼로리를 소모하며 횡성의 심상까지 담아갈 수 있는 맞춤한 산책코스임에 틀림없다. 

 차에 올라 송글하게 맺힌 이마의 땀을 훔친 뒤 심호흡을 해 본다. 이제 거인들을 만나러 가야 하니까. 일찍 길을 나선 덕에 호숫길 주파는 물론이고 굴곡진 강원의 산간마을을 탐색할 수 있게 됐다. 조금은 더 살을 뺄  수 있겠다. 차로 15분 만에 횡성군 청일면 행정복지센터에 도착했다.

횡성군 청일면 행정복지센터


 횡성군에서 가장 먼저, 용감무쌍하게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려 철탑에 항거를 선언한 청일면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아담한 마을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아름다운 청일면의 더 아름다운 주민들은 수년 전부터 이곳 행정복지센터의 외벽에 송전선로 건설 반대 현수막을 내걸고 거탑의 위압에 정면으로 맞섰다. 

 필요한 곳에 전기를 보내려면 송전선로가 있어야 하고, 이 송전선로는 지중화되지 않는 이상 송전탑으로 꿰어져 수요처로 공급된다. 전기를 써야 먹고, 마시고, 놀고, 생산하고, 판매할 텐데, 그러니까 송전탑과 송전선로는 필요악이 아니던가. 도대체 뭐가 문제인가. 각자의 의견을 귀담아듣기 전에 이 마을을 지나는, 그리고 지나게 될지도 모를 전기 고속도로의 정체에 대해 정리가 필요하겠다.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를 우리나라 구석구석으로 보내는 주요 송전선로의 얽히고설킴. 하늘에서 송전선로만 투영해 바라보는 국토의 모습은 아마 이렇지 않을까.(제주로 가는 두 가닥의 선로는 해저를 통해 깔려있다.) '전력계통도'라고 하는 이 지도 위에 물론 지금은 더 많은 선분이 그어져 있을 것이다.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선들의 연결이다. 소비자가 쓰는 전기는 발전과 변전을 거쳐야 한다. 보라색 네모로 표시되어 있는 발전소는 제법 균질하게 분포돼 있는 것으로 보이나, 대규모의 발전용량을 자랑하는 발전소는 강원에서 경남으로 이어지는 동해안과 전남, 그리고 당진을 중심으로 한 충남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이들 거대 발전소에서 생산되는 전기는 송전선을 따라 주로 동에서 서, 남에서 북으로 흘러간다. 붉은 점으로 보이는 곳들은 변전소다. 발전소에서 막 나온 활어 같은 고전압 직류를 각 가정과 공장에서 직접 쓸 수 있는 적절한 전압과 전류로 가공해 나누어 주는 곳이다. 강원도 횡성과 평창, 그리고 홍천 주민들의 반발을 사고 있는 노선은 동해안에서 신가평을 내달리는 파란색 구간이다. 참 나, 색이 푸르니 청정하게 느껴질까 봐 겁난다. 경북 울진의 신한울 원전 1,2호기에서 생산된 전력과 강릉, 삼척에 있는 거대 화력발전소의 전력을 수도권으로 보내기 위한 정부의 핵심 노선이다. 765kv급 초고압 직류가 지나는 아우토반이다. 울진에서 신가평 변전소까지 230km 구간에 거대 철탑 440여 기를 꽂을 거라고 한다. 철탑들이 세워질 예정지인 경과지 주민들과의 합의도, 진통은 있지만 점차 마무리되고 있단다. 우리 국민들을 먹여 살리는 수도권의 제조공장에 전원을 공급해 줘야 마땅하며, 시대변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신설된 강원 동해안의 화력발전소도 어쨌든 먹고살아야 하니 송전선로를 보충하지 않고서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코어인 수도권에 전력이 더 필요하다면 더 공급해야 하겠지. 그게 잘못됐다는 게 아니다. 원거리 공급 방식이 문제다. 지금까지의 전기 공급이 너무나 많은 희생을 담보로 했다면 방향의 전환이 필요한데 시작하는 누군가가 없다. 수력, 풍력 같은 에너지의 발전 형태는 중요하지 않다. 아무리 깨끗한 과정을 거쳐 전기를 생산했어도, 그 전기를 서울로 보내려면 송전탑을 세워 선을 꿰매 이어야 하니까. 즉 에너지의 종류에 관계없이 생산지와 주요 소비지의 거리 자체가 문제라는 소리다. 다른 한 축의 심각함은 경과지 주민들의 입장이다. 첫째, 철탑과 선로가 지나는 지근거리 마을사람들에게 강력한 전류는 불편함 정도를 넘어 생사가 갈릴 수 있는 요소다. 송전탑이 지나는 길목에서 마을 주민들이 대거 암에 걸린 사례는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강력한 전자파 외에 다른 원인으론 설명할 수가 없다. 철탑 설치 전과 후, 질병 발생의 시작점이 극명하게 대비된 증거는 차고 넘친다. 어느 누가 우리나라 발전을 위해 그들에게 희생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 동네에 철탑이 서지 않게 해 주세요' 하는 외침을 님비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지금 이 시간에도 강원도 청정산골엔 765kv급 거대 송전탑들이 마을사람들을 내려다보며 강력한 전자파를 내뿜고 있다. 경과지와 선하지(고압선 아래의 토지)에 사는 주민들은 날이 궂을 때 전자파의 소음을 하소연한다. 습도가 높은 날, 황소개구리의 울음소리와 유사한 송전 소음에 시달린다. 심지어 창문이 흔들릴 정도의 진동까지 동반한다고 하니 상상을 뛰어넘는 강력함이다. 과장일까? 횡성군 공근면을 비롯한 전국의 철탑 경과지에 증인들이 널려 있다. 확인을 어떻게 하느냐는 시비에는 비웃음으로 답해주겠다. 인심 좋은 산골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주민센터에 모이는 것은 '살기' 위해서다. 그뿐인 것이다.  

횡성과 평창 일대의 송전시설


 시디 신 레몬을 먹은 것마냥 몸서리가 쳐진다. 머리털이 쭈뼛쭈뼛. 사진에서도 전자파가 방출되는 것 같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 중 하나는 시골에서 송전탑 사진 찍기다. 어느 지방이라도 상관없다. 전국의 농촌과 산촌에 가서 주위로 고개를 돌려보자. 거리의 차이일 뿐이지 누에가 실을 뽑아내듯 색색의 송전탑이 전선을 잇고 있는 장면이 엄청나게 높은 확률로 보일 것이다. 강원의 미를 세심하게 포착해야 하는 평소와 다르게 무심하게 찍어 올린 사진들이다. 그러니 편하다고 좋아해야 할 일인지도 모르겠다. 횡성에서 평창으로 국도를 따라 달려가면 안 그래도 친숙한 송전탑이 진격의 거인이 되어 나를 따라오는 모습을 애니메이션만큼 연속된 프레임으로 즐길 수 있다. 강원 남부를 어슷 썰듯 신가평 변전소로 날카롭게 내달리는 전기의 칼날을 추적하기에 이보다 생생한 곳이 있을까.   


 배꼽이 확장될 나이, 제2의 인생은 제쳐두고 직장인으로서만 따진다면 서서히 은퇴의 압박이 감지될 때다. 그래서 자주 하는 다짐도 주로 노후에 관한 것들이다. 이런 노인이 '돼야지'가 아닌, 이런 늙은이는 '되지 말아야지' 류의 다짐. 진취적이지 못하다. 다짐마저 네거티브라니. 존경받는 노인으로 우러름을 받기보다는, 최악의 노년으로 손가락질은 받지 말자는 안전 제일주의의 발로다. 굳이 들춰내자면 이렇다. 첫째, 예민한 공간감각 유지.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나 혼잡한 거리를 걸을 때 수없이 겪었던 불쾌함의 기억 때문이다. 일상생활을 하는 내내 자신만의 반지름을 절대 사수하는 어르신들이 있다. 지하철 내부 등에 사람이 많아져 공간이 협소해지면 어떻게든 타인을 제치고 새로운 공간을 창조해 낸다. 홍해를 가르듯 날개처럼 펼쳐진 두 팔은 인파를 가르고 나아가며, 동시에 자신 주위의 보호막을 만들어낸다. 불굴의 의지는 러시아워를 불문하고  편안함을 보장한다. 공간(空間)을 공간(共間)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노년은 되지 말아야지. 그러기 위해서는 타인을 배려하는 공간감각의 지속적인 유지가 뒤따라야 한다. 두 번째 다짐은 관대한 시선의 조절. '나는 그렇지 않아'라고 누구나 호언장담하곤 하지만 기성세대를 훌쩍 넘어선 이들에겐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진화하는 문화의 양상이 마뜩잖아 그들만의 방식으로 대화하고 표현하는 MZ세대의 인간상을 매섭게 째려본다. 자신은 온화한 사람임이 분명한데 저들의 삶이 너무 요상하기 때문에 시선을 고정할 수밖에 없는 거라 변명하지만, 되레 분노와 불만 가득한 시선을 보내는 자신이 더 주목받고 있다는 걸 모르는가. 시선은 칼날과도 같다. 타인의 존재이유를 말살해 버리는 노인은 되지 말아야지. 세 번째는 음성 조절 능력이다. 공간감과 시선에 이은 소리 조절이니 결국 내 노년의 성패는 감각기관의 올바른 다스림에 달려 있는지도 모르겠다. 귀가 어두워지면(흔한 이 표현이 기가 막히다. 청각의 퇴화를 시각의 변화로 빗대고 있지 않은가.) 그럴 수밖에 없겠다고 이해해보려 해도 평정심을 유지하기 쉽지 않다. 심지어 장소와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고성능 스피커들은 나이 불문이다. 카페 한 구석에서 직장동료를 비난하는 한 남성의 목소리가 우렁차기 그지없다.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옆자리 어르신들의 지난 산행 에피소드는 극장에서 울리는 돌비 사운드로 착각할 정도다. 저 정도면 성악가가 되셨어도 좋았겠다. 점심을 먹고 맞는 잠시의 여유는 물거품이 되고 미간이 찌푸려진다. 그냥 회사로 빨리 들어가는 게 낫겠다 싶어 밖으로 나온다. 머플러를 떼고 천둥소리를 내며 달리는 개조된 승용차는 타인의 불쾌함을 담보로 도로 위를 질주한다. 청력이 퇴화하더라도 주위를 거슬리게 하는 시끄러운 노인은 되지 말아야지.   

 네거티브한 다짐은 그 나름대로 지켜나갈 이유가 있다. 그러나 아직도 길고 긴 여생을 '되지 말아야지'의 준칙으로만 살아간다면 얼마나 움츠러드는 삶이 될 것인가. 안 그래도 수축의 계절인 노년. 다시 확장의 계절로 역전시키기 위해서는 '돼야지'의 패기가 필요하다. 관건은 그렇다면 '누구'처럼 돼야 하는 것인가이다.

                        

   2005년부터 오랜 시간 송전탑 반대 투쟁을 해 온 경남 밀양 어르신들  


 마을에 닥친 비극에 저항해 왔다는 까닭으로 이 분들을 모범 삼으려 하니 죄송함을 금할 길이 없다. 남의 슬픔을 이용해 먹으려는 못된 심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본받을 건 본받고 넘어가야 한다.  

 울진에서 생산한 전기를 수도권으로 보내기 위해 한전은 신고리~북경남 송전선로 건설사업에 착수했다. 자신들의 논, 밭 한가운데 765kv 초고압 송전탑이 들어선다는 게 납득이 되지 않았지만 밀양의 노인들은 먼저 정부와 한전이 대화로 다가서기를 원했다. 나랏일이라면 따라야 한다는 착한 어르신들이었다. 단지 강력한 전기의 흐름 아래에서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망가질 마을의 모습은 무엇으로 땜질을 할 것인지 진지한 설명을 듣고 싶었을 뿐이었다. 지금도 밀양 어르신들은 보상금 더 받아내려고 저런다는, 속 모르는 증오의 눈길을 받을 때 가슴속에서 천불이 난다고 한다. 얼마를 더 받으면 건설을 반대하지 않겠다가 아니라 원래 살던 대로 살게 해 달라는 외침일 뿐인데도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았다. 내 땅과 내 건강의 손해는 그렇다 치더라도 정작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정부의 마을 갈라치기였다. 사유지에 송전시설을 세워야 하기 때문에 주민들과의 합의는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그 과정의 비겁함이 경남이나 강원이나 판박이다. 해당 마을에서 송전탑과 송전선으로 인한 피해가 가장 덜할 것으로 예상되는 곳의 주민들 다수에게 먼저 합의서를 받아낸다. 100명 중 90명의 서명을 받아낸 후 합의가 가장 까다로워 보이는 선하지와 경과지 주민들을 찾아가는 식이다. 뻔하지 않은가. "다들 동의했는데 할머니 댁 때문에 국가사업도 못하게 생겼습니다." 그나마 내용을 제대로 알려주고 서명을 받은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헸다. "나랏일에 찬성한다는 글이니 여기에 서명하시면 돼요." 이 말 한마디면 무사통과가 다반사였다. 시골 어르신들의 순박함을 악용한 파렴치한 짓거리 아닌가. 마을회관에 노인들을 모아놓고 안마기구를 사기판매하는 일당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공공연한 매수다. 합의서에 일찍 서명할수록 보상금을 더 챙겨주겠다는 것. 깃발을 꽂아놓고 준비~~ 땅! 경주를 시키는 거다. 하루라도 늦게 서명하면 옆집보다 보상을 덜 받게 되니 우리가 먼저 달려가야 한다. 이 정도면 비인간성의 끝판이다. 발전자본주의 극단의 비정함이 평화로운 시골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던 것이다. 입지선정위원회에 마땅히 참여해야 할 경과지 마을 주민들이 배제된 것은 그나마 애교스러운 것일지도.      

 승산이 없었던 싸움은 승산이 없었다. 밀양시 부북면, 상동면, 산외면, 단장면의 어르신들은 전사가 되었다. 그냥 이대로 살게 해 달라는 말을 했을 뿐인데, 자신들도 모르게 데모나 해 대는 노망 난 할배, 할매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한데 모여 이대로는 못 살겠다 외치면 진압대가 들이닥쳤다. 용역,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는 것은 일상이 되어버렸고, 결국 이치우, 유한숙 어르신은 사무치는 억울함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목숨까지 바친 항의에도 불구하고 승산이 없었던 싸움은 끝내 승산이 없었다. 거대한 철탑이 들어서고, 마을은 찬성과 반대 주민들로 싹둑 갈라져버렸다.     

 아대로 끝인 걸까? '돼야지!'의 모범인 밀양 어르신들은 10년 싸움의 패배가 무색하게 민주시민의 워너비가 되어 있었다. 정당한 싸움에 힘을 보태려 전국의 뜻있는 사람들이 밀양을 찾아 용기를 나누었고, 이제 밀양의 할배,할매들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같은 처지에 놓인 마을 주민들과 아픔을 공유한다. 강원도 횡성과 평창, 홍천의 신가평 송선선로 경과지는 이들 '탈 송전탑 원정대'의 필수 답사코스가 되었다. 이미 거대한 송전탑들이 산속에 묻혀있어 경관이 훼손된 곳들이다. 생채기가 난 곳에 더 큰 철탑을 꽂으려 하니 어떻게 보고만 있을 것인가. 횡성군 공근면과 청일면, 평창군 봉평면을 찾은 밀양의 원정대는 다시 기나긴 싸움을 앞둔 강원도 산골의 주민들과 연대를 약속했고, 몸소 겪은 정부와의 투쟁 노하우를 전수했다. 거짓에 승복하지 않는다. 금전의 유혹에도 끄떡없다. 옳은 일에 분연히 일어난다. 도움이 필요한 곳에 손길을 내민다. 이것이 정의라는 가르침을 국민들에게 한 수 가르친다. 이런 노년이라면 마땅히 '돼야지'의 모델 그 자체가 아닐까.    

동해안에는 대규모 화력 발전소들이 들어서 있다. 사진은 강릉 안인진리의 에코파워 부근


 이대로는 못 살겠다는 각오와 밀양 할배,할매들의 선례는 제2, 제3의 탈 송전탑 특공대를 탄생시켰다. 홍천군 송전탑반대위원회는 애초 밀실에서 진행된 입지선정위원회의 무효를 촉구하며 한 뜻이 되었고, 전국 지자체 중 가장 많은 85개의 765kv 송전탑이 꽂혀 있는 횡성군의 송전탑반대대책위는 한전이 산사태 위험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을 추가 경과지역으로 선정한 것에 대해 지극히 정당한 반대운동에 나섰다. 평창군은 뉴스타파 보도에 등장한 한전의 내부 문건 속 내용 - 지역주민의 인식을 "먼저 합의하면 피해에서 이익"으로 개선함으로써 (중략) 적기에 추진될 수 있도록 우선 합의된 마을에 대한 인센티브 지급 - 의 실행으로 상처를 받았다. 돈으로 마을을 갈라치기하려는 시도에 주민들은 분개하며 떨쳐 일어났다. 때로는 '강원도 송전탑반대대책위'의 이름으로 이들은 한데 모여 정부의 신가평 송전선로 사업 반대에 목소리를 합쳤다.   

 사진 속 갈등의 증거처럼 동해안에 지어진 화력발전소 주변 마을 역시 삶과 환경 이슈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신가평 송전선로에 더해 강릉과 삼척에서 생산하는 전력을 보낼 별도의 송전시설 설치 소식으로 주민들과 발전소 사이 첨예한 대립이 생겨나는 중이다. 악순환인 것이다. 수도권으로 보낼 전력이 필요해 발전소를 세운다. 송전시설에 문제가 생겨 발전소의 전기를 보낼 수 없게 될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서 통상 발전량에 비해 넉넉한 용량의 송전탑과 송전선을 설치한다. 그러다 보니 발전 용량을 더 키워도 될 것 같은 거다. 이참에 발전소를 하나 더 짓는다. 어라? 대형 발전소가 하나 더 들어서니 이번엔 여유가 있다고 믿었던 송전선로에 부하가 걸린다. 발전소 입장에서는 기껏 발전한 전기를 보낼 수 없으니 손해가 막심하다. 정부를 설득해 고전압의 송전탑을 추가로 꽂기로 한다. 


 언제까지 죽음의 사이클을 반복할 것인가. 


   


 

 전자파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고압의 전류를 보내는 송전탑일수록 높게 설치한다. 우리 국토에는 154kv, 345kv, 그리고 765kv의 송전탑이 서 있는데 154kv급의 높이는 33미터, 345kv는 50미터, 그리고 765kv급 송전탑은 무려 100미터에 육박하는 위용을 자랑한다. 철탑의 바로 아래에선 형광등을 들고만 있어도 불이 들어온다고 한다. 765kv급 초대형 거인 아래에서는 몇 개의 형광등이 환하게 밝혀질지 전자파 침투를 각오하고라도 실험을 해 보고 싶다. 이대로라면 신가평 송전선로 구간에 440여 개의 거인들이 우뚝 설 것이고, 거의 모든 강원도 땅에서 형광등 실험을 해 볼 수 있는 기회는 그만큼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까마득히 꽂힌 위풍당당한 철탑들은 전력 만능사회가 자축을 위해 준비한 케이크 위의 초들인가. 이대로 축하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 대안이 뭐냐고?


 그건 나나 경과지 주민들이 생각해 낼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에너지 발전, 수급계획을 세우는 정부의 몫이다. 그러나 할 일 가득한 정부의 입장을 고려해 봐도 대안이 없는 건 아닌 듯하다. 수년 전 국회를 통과한 '분산에너지 활성화 특별법'에 답이 있지 않을까 갸웃거려 본다. 핵심은 '분산'이다. 전기가 필요한 곳에 발전소를 두는 미래의 청사진이다. 여기서의 발전소는 물론 거대한 화로가 펄펄 끓는 재래식 발전소는 아닐 것이다. 엄청난 전기의 수요처인 도심에 어찌 그런 곳이 들어설 수 있겠는가. 에너지 업계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연료전지'를 이용하면 소규모 지역 단위의 발전이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건건지 속 채워진 화학물질에서 전기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방식이 아닌, 연료와 산소의 지속적 공급으로 물 흐르듯 전기를 생산해 낼 수 있는 시스템을 연료전지라고 한다. 잠깐 동안이지만 자동차의 시동을 끈 직후 창문 올리는 버튼을 누르면 정상적으로 기능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수도꼭지를 잠가도 잠깐은 남은 물방울이 듣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과 전기 모두 흐름인 것이다. 흐름 자체를 생산하고 저장하며 연료를 태우지 않는 화학반응을 원리로 하는 연료전지 발전은 기술적으로 시간문제일 뿐이다. 정부의 의지와 산업계의 협조가 전제조건이긴 하지만. 문제는 그 전제조건이 가장 깨기 힘든 바윗덩어리라는 것이다. 귀촌한 아재의 괜한 공명심일 수도 있다. 다만 뻔하디 뻔한 오해는 받기 싫다. 대한민국의 중심인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괜한 미운털을 박는 것이 아니고, 산 좋고 물 좋은 강원도에 산다는 이유로 지방은 털끝만큼도 희생을 못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단지 지금의 상황과 앞으로의 국가 계획에 따른다면 서울과 거리가 먼 지역은 에너지 공급지의 쓸모로 존재하게 될 확률이 높다는 뜻이다. 정부는 조만간 지역별 차등 전기요금제를 도입하겠다고 한다. 강원, 부산, 충남 등 전력을 많이 생산하는 곳의 주민들은 저렴한 전기요금을 납부하고, 외부로부터 전기를 끌어다 쓰는 지역은 끌어다 쓰는 비용을 추가해 상대적으로 비싼 전기요금을 부담하게 하겠다는 계획이다. 계산은 단순하다. 2024년 현재 강원도의 전력자급률은 195%에 달한다. 도민들이 쓸 만큼의 전력보다 두 배 가까이 더 생산하는 셈이니 남는 전력을 수도권으로 보내고, 보낸 양만큼 저렴하게 공급받게 되는 것이다. 장기적으로 본다면 이것 역시 국가 차원에선 손해라 할 수 있다. 제조업 뿐 아니라 전기를 많이 먹는 IT업계 등도 원가 부담이 가중되면서 경쟁력이 약화될 가능성이 크고, 수도권의 소비자들은 무슨 죄로 두 배나 비싼 전기를 써야 한다는 말인가. 결국 가까운 미래에는 연료전지를 활용해 지역별로 소규모 그리드 발전소를 갖추는 방안이 모두가 위너가 되는 지름길이 아닐까.  


 되지 말아야 할 노인상을 나름 정립해 놓은 것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 되지 않기 위해 정신을 똑바로 차릴 것이다. 다만 뱉어놓은 다짐 속 주워 담아야 할 게 있다. 좁디좁은 속을 반성해야 한다. 노년에 닿지 않아 아직도 익지 못한 열매라 혜량해 주시기를.

 두 팔로 인파를 밀치고 나아가는 노인들. 감히 내가 겪어보지 못한 삶의 풍파를 거쳤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과 가족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 최소한의 방어막이 필요했을 것이고, 단칸방에서의 쪽잠이 집 밖에서도 재현되지 않도록 숨 쉴 여유가 간절했을 것이다. 

 낯선 것에 대한 시선의 고정. 자신의 삶을 쥐고 흔들었던 사회의 지배논리에 긁힐 대로 긁힌 어르신들이다. 일탈을 하고 싶어도, 현실을 바꾸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던 그들에게, 생경한 사회의 변화는 공포 이전의 까무러침. 혀를 끌끌 차며 바라보는 시선에는 생존의 방식이 탑재되어 있다. 

 서툰 음성 조절 능력의 부재. 귀가 어두워져도 남을 배려해 소리를 작게 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바람은 치기 어린 자만이다. 신체기관이 급격히 퇴화되어 가는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한 건방짐이다. 아들 딸 굶게 하지 않겠다고 자기 말을 아끼고 남의 말만 듣고 살았던 일생의 후반부에서, 그나마 이젠 내 말 좀 확실히 들어달라는 애절한 외침이 아닌가.  


 거미줄처럼 강원도를 꿰고 있는 송전선을 추적하자니 당연하게도 걷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쪽 철탑들이 산등성이를 가로지르겠지 하며 송전선로를 따라 차를 몰다 보면 어느새 반대편에서 765KV급 거탑들이 위용을 드러낸다. 발견하기 까다로웠으면 좋겠는데 거인들은 너무나도 쉽게 시야에 등장한다. 진격의 거인도, 진격의 거탑도 사람들에게는 목숨을 주문하는 공포의 대상이다. 순간 소름이 끼쳐 마을 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소름이 끼치는 것도 전자파의 영향일까. 횡성과 평창, 그리고 홍천군은 이렇게 철탑이 배경이 되어선 안될 곳이다. 그래서 미안하기 짝이 없다. 넘치는 명소들을 소개해도 모자랄 판에 전깃줄의 연속을 보여주고 있다니. 용서해 주십시오. 닥쳐온 신가평 송전선로의 진격을 그려보자니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횡성호수를 걸었기에 칼로리 소모량이 흡족할 줄 알았다. 웬걸. 점심을 사 먹고 나서는 차 안에 앉아있던 시간이 필요 이상으로 많았다. 끊길 줄 모르는 전기의 흐름을 따라 달려가자니 방법이 없었다는 변명을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배꼽이 더 동그래졌다. 완벽한 원이다. 


 거인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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