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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브레히트 뒤러, 인간 뉘른베르크

뒤러하우스, 그리고 다시 성 요한 묘지

by Total Eclipse






다시 성벽의 안쪽으로 들어가야 한다. 알브레히트 뒤러가 살던 곳에서 독일 르네상스 대가의 흔적을 뒤집어쓴 뒤에야 그가 누워있는 묘지 앞에 설 자신감이 들 것 같아서다. 뒤러 하우스만큼 깔끔하게 정리된 예술가의 고택이 또 있을까. 알브레히트 뒤러 하우스는 뉘른베르크에 온 김에 들러야 할 옵션이 아니라 이 도시에서 놓쳐서는 안 될 핵심이다. 몽환적인 성곽도시는 여행자에게 발길 가는 대로 서성일 것을 요구하지만, 적어도 이곳만큼은 강제로 이끌고 들어갈 태세다. 뒤러가 태어난 1471년은 자유제국도시 뉘른베르크의 위세가 절정으로 치달았던 시절. 근세의 뼈아픈 기억들은 제쳐두라고, 대신 찬란했던 그때를 보여주겠노라고 이 도시는 방문자들을 잡아끌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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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브레히트 뒤러 하우스


뒤러 하우스는 성의 북서쪽 입구로 들어오면 지척이다. 당대의 최고 미술가로서 이미 명성이 높았던 1509년, 38세의 나이에 뒤러가 구입한 이 저택은 오늘날에도 위세가 당당하다. 건물의 아랫부분과 윗부분의 재질이 다른 것처럼 보여 혹시 중수된 것은 아닌가 했지만, 옛 그림을 보니 지금 건물 높이 그대로다. 심지어 3,4층 창호 밑의 갈색 장식 또한 덧칠을 했을지라도 당시의 모습과 흡사하다.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는 뒤러 하우스는 도시의 호시절과 운명을 공유한 알브레히트 뒤러의 성공 신화를 두 말할 필요 없이 재현하고 있다.

뮌헨의 알테 피나코테크에 원본이 전시된「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이 관람객을 압박하는 1층을 지나면, 2층부터는 뒤러 하우스의 구조 자체에 집중하게 된다. 1828년 미술관으로 거듭난 이후에 어느 정도의 리모델링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뒤러가 사용하던 거실과 방, 주방과 작업실을 둘러보면, 전시된 그의 작품보다 일상에서의 그의 동선이 눈앞에 그려진다. 이쪽에서 작업을 하고 저쪽에서 식사한 후 쉬었겠구나. 독일 르네상스의 구현자, 셀럽 알브레히트의 삶이 드라마가 되어 재생된다. 뒤러 하우스 2층에는 체험을 위한 판화 인쇄기도 있어, 판화의 대가이기도 했던 뒤러의 당시 제작 과정을 상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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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0_123828.jpg 넋 놓고 바라볼 정도로 인상적이었던 뒤러 하우스의 창문
20240820_124720.jpg 워크숍 룸에 있는 판화 인쇄기


금세공의 장인이었던 알브레히트 뒤러의 아버지는 뉘른베르크에서 황실의 주문을 받을 정도로 성공한 인물이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뒤러는 금 세공인의 아들이었으니 이건 은유법으로 끝날 성질이 아니다. 금박을 입힌 수저를 정말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렇게 부러울 데가! 그림에 재능을 보인 아들에게 도시 최고의 화가를 스승으로 붙여주었을 만큼, 뒤러의 집안은 그의 뒤를 든든하게 받쳐주었다. 배경을 다소 확장해 보면 발흥하는 세공업의 도시 뉘른베르크가 뒤러를 낳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셀 수 없는 명작을 자랑하는 알브레히트 뒤러. 이왕 그의 집에 왔으니 유명세 탓에 논란거리마저 생긴 작품 두 점만 겉핥아보기로 한다.

뒤러자화상.jpeg 「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 」 1500년 67 × 49cm


우선 뒤러 하우스 초입에서 관람객들을 바라보던 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이다. 미술사적으로도 충격적인 가치를 지닌 작품이어서 이미 여러 해석들이 나온 터지만, 그 충격을 다시 한번 받아보려 한다. 앞 글에 실린 자화상도 보았지만, 알브레히트 뒤러는 '자화상'이라는 장르를 개척한 화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교화나 귀족들의 초상화로 자웅을 겨루던 시대의 화풍에서 과감히 박차고 나온 탓에 뒤러는 자아도취, 그러니까 자뻑에 빠진 나르시시스트로 규정되기도 했다. "왜 네 얼굴을 그리는 건데?" 나아가 이처럼 오만해 보이도록 정면을 응시하는 자화상을 남겼으니 당대의 비난은 듣지 않아도 뻔하다. "어디서 건방지게..."

그림의 모델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 얼굴이 예수의 그것과 닮았다는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이목구비는 심하게 왜곡할 수 없을지라도, 탄력 있게 늘어진 머리와 부의 상징인 모피코트는 어느 정도 연출이 가능했을 테고, 여유 있게 잡아 쥔 오른손의 구도는 화가의 신성한 자신감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장치였을 것이다. 놓치기 쉬운 것은 얼굴 양쪽에 있다. 감상자의 시선에서 뒤러의 왼쪽에 있는 시그니처를 보자. 알브레히트 뒤러의 약자 A와 D의 조합에 그림이 제작된 1500년이 서명 위에 놓였다. 뻔하기도 하고 흉내내기도 어렵지 않은 형식이다. 후대의 해석은 이와 달리 장엄하다. 서명의 A와 D는 그의 이름을 나타내는 동시에 Anno Domini, 그러니까 B.C. 에 이어 서기를 나타내는 '신의 해'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신성시하는 대범함. 이번에는 오른편에 그가 적은 문장이다. 해석하면 이런 뜻이다. "그리하여 나, 뉘른베르크의 알브레히트 뒤러는 28세의 나이에 내 초상을 본디 혈색대로 그렸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나의 모습을 정확하게 묘사했으니, 그런 내 형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위엄을 느껴보시라 하는 자신감의 발현이 아닐까. 꾸준히 신앙의 예술을 다룬 그였지만, 독일 르네상스의 구현자답게 신의 존재를 인간의 모습에서 찾으려 했던 파격도 우리는 간파할 수 있는 것이다.

뒤러서명.jpeg 뒤러의 서명


이어서 수많은 수수께끼를 담았다고 하는 뒤러의 동판화 작품이다. 선(線)의 대가 다운 세밀한 표현이 보는 이를 압도하지만, 더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은 분석할 것이 가득한 그림 속 내용이다.

멜랑콜리아.jpeg 「멜랑콜리아 Ⅰ」 1514년 동판화 24.2 × 19.1cm


논란이 많은 이 그림에서 가장 먼저 시선이 간 곳은 오른쪽 상단의 빙고판 같은 정사각형이었다. 가로, 세로, 대각선으로 숫자를 합해 보았다. 예상대로였다. 합이 34로 모두 같아지도록 숫자를 채워 넣은 마방진이었다. 제일 위의 가로줄엔 뒤러 어머니의 사망일이 드러나 있고, 맨 아랫줄의 15, 14는 작품의 제작연도를 나타낸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어려울 것이 없는데, 화가는 왜 하필 마방진을 이용해 멜랑콜리를 표현했는지, 남은 각 줄의 숫자들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뒤러가 낸 퀴즈에 후세들은 머리를 싸매고 파헤쳐야 할 뿐이다. 숫자에서 그림 속 개별의 대상으로 넘어가면 다시 고민에 빠져야 한다. 제목인 멜랑콜리아를 펼치고 있는 박쥐는 도대체 뭐 하는 녀석인가. 진리의 탐구를 방해하는 상징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약을 올리듯 훼방을 놓아도 되는 것인지. 망치와 줄, 자 등의 도구는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 중의 일부분이라고 하며, 배경인 하늘에 떠 있는 무지개와 혜성은 기독교의 종말론적 세계관을 나타내는 거라고 한다. 아기 천사와 그 위에 있는 모래시계에도 심오한 상징이 숨어있을 것이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지끈거리는데 비밀을 알아내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 뒤러의 속셈이 바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기저기 수수께끼를 툭 던져 넣고 감상자의 심오한 해석을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그렇게 해석하는 감상자는 판화 속에서 날개 달린 여성으로 변환된다. 턱을 괴고 세상의 이치를 깨달으려 집중하는 모습이다. 이상한 것은 멜랑콜리라는 제목이다. 히포크라테스의 사성론(四性論) 이래 서구인들의 기질은 몸속 어느 체액이 우세하느냐에 따라 네 가지로 구분되었다. 혈액은 다혈질, 점액은 점액질, 노란 담즙은 담즙질, 그리고 검은 담즙은 우울질을 끌어낸다는 것이다. 동양에 사상체질이 있듯 무엇이든 분류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인류의 공통적 습관이다. 멜랑콜리라는 단어는 애초 Melan(검은)+Chole(담즙)에서 만들어진 정신 상태이기 때문에 그림 속 여성은 우울한 상태라야 한다. 세상의 비밀을 들추어내려면 우울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울해하지 않고도 진리 탐구는 가능해야 하는 것 아닌가. 창작의 고통은 예술가에게 우울함을 주입하고, 예술가는 우울함으로 무장해 바닥으로 가라앉을수록 진리의 접근에 유리하다는 표상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대부분의 그들은 고독한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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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성 요한 공동묘지다. 몇 번을 둘러봐도 시대의 거인 몇 명이 두각을 나타내며 점령하는 공간이 없다. 각각의 묘역이 점유하고 있는 땅뙈기는 공평하다. 묘지 전체를 소박하게 만드는 효과는 있으되 뒤러가 누워있는 곳은 어딘지 찾기가 쉽지 않다. 티치아노 등이 활약하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본좌, 베네치아의 스카우트 제의를 마다하고 고국으로 돌아온 알브레히트 뒤러는 숨을 거두는 날까지 화가로서 뿐만이 아니라 뉘른베르크 시청사 등의 도시계획 설계자로서도 자신의 고향에 막대한 기여를 했다. 생전에 본인이 고사했어도 위풍당당한 묘비를 노른자 구역에 세웠어야 할 것 같은데, 사방에 불거진 그 무엇이란 없다. 찬란했던 그의 묘지가 후대에 축소된 건지 모르겠지만 당대 유럽 최고의 화가를 모시는 뉘른베르크의 방식은 검박함 그 자체다.


단순무식한 이분법일 수도 있다. 그러나 태양이 찬란한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의 도시들에서 빛을 가지고 노는 회화의 마술사들이 나타났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하늘과 삭막한 겨울이 음울함을 만들어냈던 북유럽과 독일 등지에선 고뇌하는 철학자와 음악가가 다수 배출된 것이 사실이다. 남유럽의 총천연색은 공간의 예술을 창조했고, 북유럽의 우울은 고뇌하는 시간의 총합이 만들어낸 예술을 필요로 했다. 알브레히트 뒤러가 범 독일의 슈퍼스타가 된 까닭은 시간 예술의 중심에서 범접할 수 없는 공간 예술을 지휘했던 독보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평일 오전, 주택가에 위치한 성 요한 묘지는 고즈넉하다. 도와줄 사람이 없다면 어쩔 수 없다. 비석에 새겨진 독일어를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서라도 뒤러의 공간을 찾아내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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