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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죄에서 안식으로

낙인의 장소와 추모의 공간

by Total Eclipse






누가 슬픔은 시간이 지나면 줄어든다고 했나. 엄혹한 한파 속 고드름 창끝에 찔린 자상(刺傷)은 아물어 갈지 몰라도, 흘러온 시간은 아픔의 층을 두텁게 쌓아만 간다. 회상하는 과정엔 뭉근한 슬픔과 먹먹한 아픔이 땔감으로 쓰인다. 예각으로 찔린 상처 대신 둔각으로 얻어맞은 피멍이, 전진하는 시간의 걸음과 비례해 전신으로 퍼져 나갈 뿐이다.

뉘른베르크 성곽의 서쪽은 그래서 인구 50만 도시의 고통과 수치가 배어있는 방위가 된다. 악마의 사랑을 독차지한 비운의 도시. 이름마저 서늘한 뉘른베르크에서는 죄가 없는 도시의 아픔을 지켜본 후에야 영면의 공간을 넘어갈 자격이 있는 것이다. 지하철에서 내려 전범 재판기념관은 순식간이다. 개관은 십여 분 남았고, 입구 부근엔 십여 명의 방문객들이 이미 도열해 있다. 그들의 몸짓에서 설렘이 느껴지는데 그 설렘이란 초조함이 빚어낸 설렘이고, 단죄를 목도하려는 설렘이다. 밝은 설렘이 가진 심장의 박동과는 근본부터 다르다.

20240821_090017.jpg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기념관 앞


1945년부터 1년 여에 걸쳐 전범들의 공판이 치러진 현장이다. 2차 대전의 승전국인 미국, 영국, 소련과 프랑스는 범죄자의 소추, 처벌권을 가지고 판사와 검사들을 지정한 뒤 뉘른베르크에 재판소를 개설했다. 승전국이 판결을 맡게 되었으니 결과가 중요한 건 아니었다. 공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드러난 범죄의 전모와 피고인으로 참석한 24명 전범들의 변명이 세계적인 관심거리였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아돌프 히틀러와 요제프 괴벨스는 자연히 피소될 수 없었는데, 만약 이들이 재판정에 들어왔다면 어떤 주장을 펼쳤을지 상상해 본다. <나의 투쟁(Mein Kampf)> 속편을 집필하는 것처럼 히틀러는 일말의 죄책감 없이 당당하게 자기 변론을 했을까. 나치의 선전장관이란 직책에 걸맞게 괴벨스는 자기만의 논리로 판사들을 이해시키려 달변을 자랑했을까.

연합국 대표들이 뉘른베르크를 재판 장소로 결정한 데에는 도시를 단죄하겠다는 의도가 다분했다. 뉘른베르크는 나치의 전신,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발상지이자 전당대회가 열렸던 현장으로서, 게르만 문화가 생생히 보존되었다는 이유로 히틀러가 유난히 사랑했던 도시이기도 하다. 뉘른베르크에서는 1933년부터 1938년까지 나치의 집회가 무려 여섯 차례나 열렸고, 유대인들의 권리를 박탈하는 '뉘른베르크 법'이 통과되었다. 전쟁 중 이 도시는 연합국의 집중포화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전쟁 후에는 괴물을 키워낸 악마의 소굴이라는 딱지가 붙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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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1_092640.jpg 전범재판이 열렸던 재판정과 전시공간


24명의 피고인들에게는 교수형, 종신형, 10년 형 등이 선고되었다. 재판에서는 크게 피고인의 주장을 바탕으로 한 세 가지의 쟁점이 있었다. 첫째, 전쟁범죄에 대한 처벌법도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이들을 단죄하느냐의 여부. 그러나 재판부는 침략전쟁은 무조건 국제법을 위반한다는 1928년 파리에서의 켈로그-브리앙 조약을 근거로 들었다. 두 번째, 독일 정부와 별도로 전쟁을 수행한 개인 역시 형사책임을 져야 하는지 여부였다. 이 역시 재판부는 국제법의 조항을 들어 침략을 저지른 당사자들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 마지막은 군의 지휘체계에 의해 상급자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 주장하는 경우에도 형사 책임이 있는지 여부. 다시 말해 아돌프 아이히만에게서 한나 아렌트가 유추해 낸 '악의 평범성'에 대한 쟁점이었다.("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밝힌 아이히만의 재판은 1961년 예루살렘에서 열렸다.) 재판부는 범죄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상황에서 하급자는 명령을 따를지 말지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 형사책임이 존재한다고 판시함으로써 단죄의 틀을 완성했다.


당시의 재판정을 둘러보는 방문자들은 한마디 말도 없이 한참을 앉아만 있었다. 생각보다 넓지 않은 공간이 사색을 더 불러일으킨 걸까. 성당이나 교회에서보다 그들의 묵언수행은 길었다. 전쟁의 비극을 돌이켰다기보다는 전 세계가 주목한 변론 대 변론의 긴장감이 스며든 것만 같았다. 재판정의 공기는 흐르지 않고 군데군데 엉켜서 밀랍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무언가 목에 걸려 얕은 숨을 들이쉬기 벅차다. 어깨를 들어 올려 큰 숨을 들이마셔야 호흡이 가능할 듯한 공간. 전범 재판기념관에서는 수 십 바늘을 꿰맨 뉘른베르크의 흉터가 생생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서 묘지로 이동하면 자연스러운 것인가. 처벌에 이어지는 무덤은 쇳소리가 나는 기계의 끼임이다. 뉘른베르크 도심 한 복판의 묘지에선 차라리 평온할 것만 같다. 사자(死者)들의 공간에서 안식을 찾아야겠다.

20240820_105258.jpg 뉘른베르크 성 요한 묘지


여행의 두 번째 공동묘지다. 전범 재판기념관에서 도보로 15분 거리에 성 요한 묘지(St.Johannisfriedhof)가 있다. 죽은 자들을 위한 묘지의 기능을 넘어 산 자들을 위한 도심 공원의 인상이다. 비셰흐라드가 엄숙함이라면 여기는 다독임이다. 묘지가 없었더라면 뉘른베르크 시민들은 큰 위안거리가 사라진 셈일 것이다. 무게를 잡지 않는 공원형 공동묘지는 중소도시와 찰떡같이 어울린다. 장르별 위인들의 집합처로 구획이 나뉘어 정형화된 묘지는 대도시에서라야 아우라를 맘껏 내뿜을 수 있다. 시내 한 복판에 작은 불꽃놀이를 펼치듯 조성된 공원형 묘지는 밥을 먹으러 가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불현듯 들르면 되는 것이다. 묘지는 목적지로 가는 지름길의 중간 기착지가 될 수도 있고, 피로해진 눈을 쉬게 할 수 있는 오후의 정원도 될 수 있다. 잘 생각해 보자. 도시계획이란 막중한 것이고, 우리나라의 작은 도시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잘 조성한 묘지 하나, 열 센트럴파크 안 부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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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성 요한 묘지에서는 큰 산을 하나 넘어야 한다. 호젓한 묘지의 감상은 그다음이다. 15세기말에서 16세기 초 유럽의 미술을 평정한 거물이 이곳에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곧 뉘른베르크고 뉘른베르크가 곧 그다. 누운 자리마저 소박한 화가의 이름은 바로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 그가 한뎃잠을 자고 있는 듯한 묘석 앞에서 시간과 공간을 되돌린다. 되돌린 시간이 다시 현재에 도착했을 때, 그때서야 성 요한 묘지는 남아있는 무수한 감성을 허락할 것이다.

그를 만나러 간다.

뒤러.jpeg 알브레히트 뒤러 「자화상」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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