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도시 뉘른베르크 ③
오르내림이 있고 강이 흐르는 성곽도시는 매력이 터진다. 발바닥은 오르막에서 앞꿈치에, 내리막에선 뒤꿈치에 무게 중심을 두고 중력에 브레이크를 건다. 페그니츠강의 묵직한 흐름과 중세의 다리를 관찰하는 두 눈의 초점은 오락가락이다. 소시지의 향기는 후각을 붙잡고, 몇 개 국어인지 모를 각국의 언어들은 공기 중에 떠돌아, 알아듣지도 못하는 내 귀는 어설픈 통역사 노릇을 하려 한다. 뉘른베르크는 스스로 차분할 뿐이고 이방인의 오감은 작동을 도무지 멈출 수가 없다. 이 모든 감각이 몸에 새겨져 끝내 기억될 것인가. 방전이 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정신은 집중하고 신체가 열일을 해야 할 시간이다. 꼭꼭 씹는 걸음으로 물줄기를 따라가 문제의 다리를 마주친다. 그래 여기다.
조엘 헤링톤의 <뉘른베르크의 사형집행인>이란 범상치 않은 책을 읽고 나니, 프란츠 슈미트(Franz schmidt, 1555~1634)라는 한 사형집행인에게서 한동안 벗어나지 못했다. 애당초 주인공의 직업부터 거슬렸던 거다. 사포로 살갗을 미는 느낌. 유럽 망나니가 주인공인데, 심지어 그의 일기를 고증해 집필된 책이다. 일기를 쓰는 사형집행인이라. 뉘른베르크의 사법 기능이 유럽 도시들의 전범이었다는 역사적 사실도 프란츠가 냉정하게 남긴 기록들에 의존하는 바가 크다. 포털에서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동명의 오스트리아의 작곡가가 압도적으로 등장할 것이다. 그러나 뉘른베르크에서 침잠해야 할 이름은 사형집행인인 프란츠 슈미트다.
입지전적인 사형집행인. 무수한 사연이 담긴 한 인간을 묘사하는 말이다. 프란츠 슈미트는 역시 사형집행인이었던 아버지를 두었다. 우리의 노비와 망나니가 그러했듯, 프란츠는 대를 이을 확률이 높은 신분을 운명으로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슈미트 집안의 억울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아버지 하인리히 슈미트가 느닷없이 사형집행인이 된 유일한 죄는 사형 현장을 지켜보고 있던 구경꾼이었다는 것. 당시에는 사형집행인이 집행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을 경우엔 재판관이 즉석에서 지목하는 사람이 사형을 대신 집행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날벼락같은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프란츠의 아버지는 그렇게 몸소 사형을 집행하게 되었고, 집행인으로서의 능력이 충분하다고 판단한 의회의 결정으로 그 길로 공식 사형집행인이 된 것이다.
하인리히 슈미트는 강인했다. 자의로 바꾸지 못할 직업이라면 이 분야에서 최고가 되자. 사형 기계가 된 그는 갓 청소년이 된 아들을 처형 현장에 데리고 다녔을 뿐 아니라 그에게 각종 사형 기술을 기초부터 가르치며 넘사벽 사형집행인으로의 성장을 도왔다. 사형은 유럽 전역에서 널리 행했던 사법적 처벌이었다. 참수형에서 교수형, 화형과 능지형 등 죽을 죄도 그 경중에 따라 처형 방식이 다양했기 때문에, 사형집행인은 그야말로 전방위적인 프로 킬러가 되었어야 했다. 어느 누가 사형의 달인이라는 소문이 나면 부유한 도시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는 일이 잦았으니, 어차피 사형집행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면 최고가 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프란츠의 아버지 하인리히는 일찍부터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프란츠 슈미트는 아버지의 기대에 걸맞게 프로가 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마이스터(Meister)'의 지위에 올랐다. 아, 약간은 놀라는 독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렇다. 견습공-숙련공-마이스터로 이어지는 유럽의 장인 키우기 전통은 사형집행인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형집행인들이 수공업의 장인들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는 건 물론 아니다. 접촉과 대화마저 꺼릴 정도로 사람들에게서 멸시받았던 신분임엔 틀림없었지만, 길드까지 조직했던 집행인들 사이에서는 부러움을 받고,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표식으로서 마이스터라는 칭호가 따라붙었던 것이다.
사형을 선고받은 죄수들 중 그나마 가장 가벼운 죄를 지은 경우에 행해진 방식은 참수였다. 여러 차례 목을 내리쳐 간신히 죄수의 목숨을 끊은 집행인에게는 구경꾼들의 돌팔매질이 일상이었고, 백이면 백 단칼에 깔끔한 죽음을 언도하는 집행인들만이 마이스터로서의 자격이 주어졌다. 죄수들은 다른 사형 방식에 비해 고통이 덜한 참수형을 간청하며 뇌물까지 바치곤 했다니, 죽음의 구형은 징역의 구형보다도 날카로운 것이었다.
프란츠 슈미트는 아버지보다 더 강인했다. 마이스터의 자리에 오른 그는 의회와 시민들의 신임을 받아 뉘른베르크의 공식 의사 자격과 시민권을 획득했고 (이름난 사형집행인들은 긴 세월 인체를 다뤄온 경험을 바탕으로 간혹 외과의사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사형집행인의 굴레를 후세에 물려주지 않기 위해 십 수년간 의회를 간절히 설득한 끝에 그의 자식들을 뉘른베르크의 떳떳한 상류층 인사로 만들었다. 억울했던 인생의 대역전! 프란츠가 이루어낸 또 하나의 성과는 성곽 내 거처를 허가받았다는 것이다. 사형 집행은 성벽의 바깥, 남쪽의 처형장에서 이루어졌고 통상 사형집행인의 집은 성벽의 바로 바깥 지점에 있었지만, 프란츠 슈미트와 그 가족은 시민들의 인정을 토대로 성곽 내 페그니츠 강변에 보금자리를 둘 수 있었다. 가문을 덮친 아버지 하인리히 대의 불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프란츠 슈미트의 유산은 가문의 명예를 회복시켰고, 처벌로서의 사형의 역사가 기록된 그의 일기는 번성했던 제국도시, 뉘른베르크의 내밀한 영광을 재현시킬 수 있었다.
중세 이래 수백 년간 이어진 유럽의 사형집행의 역사에는 씻을 수 없는 오점이 얼룩져 있다. 마녀사냥으로 대표되는 무지와 몽매의 콜라보는 우리가 현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축복된 일인지 깨닫게도 한다. 그러나 다시 돌아보면, 앞서간 제국도시들은 각 시대가 처했던 환경에 맞는 최적의 사법체계를 갖추고 죄형법정주의를 추상같이 적용했다는 것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한다. 상공업으로 번성했던 뉘른베르크는 경제 수준에 부끄럼이 없는 행정과 사법 시스템을 안착시켜 놓아 요즘으로 치면 각국에서 선진지 견학을 밥 먹듯 오는, 잘 나가는 문명도시였던 것이다. 프란츠 슈미트라는 개인의 의지가 전제되긴 했으나, 천대받던 사형집행인의 집안을 떳떳한 의사의 가문으로 승격시켜 준 이 도시의 품격은 허투루 형성되지 않았다. 나치의 발흥과 2차 세계대전 발발의 둥지로 기억되는 후대의 따가운 시선을 뉘른베르크는 일말의 상상도 하지 못했을 터다. 잊지 말자. 도시는 죄가 없다.
사형집행의 장인뿐 아니라 수공예 장인들로 북적였던 뉘른베르크는 남쪽 성벽의 경계 부근에 수공예인의 거리를 조성했다. 기념품으로 구입할 수 있는 공예품 가게들과 레스토랑들이 탑 안쪽으로 움푹 들어간 골목길에 말발굽 형태로 늘어서 있다. 성내에는 세계적으로 이름난 장난감 박물관도 있으니 뉘른베르크 장인들의 섬세한 손길을 확인해 보아도 좋을 일이다. 이곳의 공식 독일어 명칭은 'Handwerkerhof Nürnberg'. 독일어 'Hof'는 '광장', '뜰', '장소', '저택, 궁정', '농가'의 뜻이고, 그 앞에 오는 단어에 따라서 수많은 '장소'의 성격이 규정되고 명명된다. 독일어권 국가들에서 시도 때도 없이 보게 되는 Bahnhof는 Bahn(철로) + hof로 기차역을 뜻하고, 메멘토 모리의 정신으로 앞으로도 연신 마주치게 될 Friedhof는 Friede(안식) + hof의 결과인 묘지다. 수공예인의 '광장'으로 부르기엔 협소하고, '뜰'이라고 하기엔 경계가 불분명한 이 명백한 관광지는 그저 '거리' 정도로 명명하는 것이 적당할 거라고, 실없는 한국인은 Hof 집에 앉아 Hof를 마시며 중얼거렸더랬다.
바로 길 건너는 중앙역이다. 그러니까 환상 속에서 속세로 빠져나가는 길목이 여기라는 거다. 해는 지고, 잔은 비었는데 경계를 넘어가기 싫은 것이다. 성곽도시의 바닥은 가로등의 조명을 받아 도시의 윤슬을 그린다. 마지막 한 사람이 될 때까지 뉘른베르크의 영광 안에 머무르리라.
오던 길을 거슬러 제국도시의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