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생(生)의 공간, 성 요한 묘지
여기 두 악당이 있다. 먼저 해리 포터 시리즈의 빌런, 볼드모트. 낮은 콧대가 무서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시전한 이 악당 마법사는 죽음에서 부활해 어둠을 장악하며 해리의 숙적이 된다. 슬리데린 가문의 어머니와 머글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고아원에 보내졌다고 하는데, 그가 무시무시한 악당이 되어가는 과정은 세상의 수많은 덕후들이 친절하게 설명을 해 줄 것이므로 과감히 생략하기로 한다.
흥미로운 건 그의 이름이다. 호크룩스를 만들기 위해 무수한 생명을 앗아간 볼드모트(Voldemort)는 작명부터 이기적이다. Voldemort를 프랑스어 Vol(날기, 비상)+ de + Mort(죽음, 시체)를 이어 붙인 이름으로 간주한다면, 그는 '죽음으로부터 날아오른 자', 곧 부활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짜증이 난다. 자기는 다시 살아나고서 남들은 거리낌 없이 죽여버리다니. 볼드모트에게 삶과 죽음은 그야말로 동전의 양면이다. 생과 사를 모두 겪어본 그는, 다시 다른 형태의 삶으로 재탄생할 존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접두어 'Mort'는 속세에서 더욱 끔찍하리니. 주택 담보 대출은 죽음(Mort)을 저당잡히는(Gage) 행위다. 목숨을 걸 각오가 없다면 함부로 받아야 할 것이 아니다.
절대 뒤지지 않는 마블의 악당, 타노스(Thanos)가 뒤를 잇는다. '손가락 튕기기'라는 말도 안 되게 수월한 신공으로 우주의 절반을 날려버린 이 덩치의 이름은, 불사(不死)의 뜻인 그리스어, 아타나시오스(Αθανάσιος)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세상의 반은 절멸시켜도 그만이고, 본인만 불로장생하면 된다는 것 아닌가. 그의 이름 역시 비난받아도 할 말이 없다. 타노스의 논리는 '죽어야 산다'는 것이다. 레밍이라는 종의 북유럽 쥐는 무리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면 스스로 물에 빠져 개체 수를 조절한다고 하는데, 인간을 비롯한 대다수의 생명체들에게선 자율로 개체 수 조절을 기대할 수 없으니 내가 죽일 수밖에 없다는 것. 인간도, 기계도, 쓰레기도, 열도 과잉인 지구의 현실은 개탄스럽지만 그렇다고 존재의 절반을 흔적도 없이 지워버리는 타노스는 용납될 수 없는 빌런이다.
뒤러의 묘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는 과정은 마치 네 자리 비밀번호를 0000부터 차례로 입력해 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유럽 미술사의 거목이 잠든 곳을 찾아내기가 이다지도 힘들다니. 어느 한 곳에 몰려있는 사람들이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교회가 보이는 구역으로 걸음을 옮기니 웃자란 나뭇가지를 잘라내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묘지 관리인임이 틀림없었다. 뒤러의 묘는 대관절 어디에 있는 건지, 실제보다 더 절박한 듯 연기를 해 가며 안내를 부탁했다.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따라오라는 몸짓. 성큼성큼 묘비들의 사잇길을 가로질러 공동묘지의 오른편으로 넘어갔다. 정작 뒤러의 묘지 근처에서는 그도 헷갈리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곧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석묘를 가리킨다. "여기예요."
반대편 구역의 묘지에 비해 오히려 꽃 장식이 초라하다. 독일의 국민화가가 누운 자리라고는 도무지 격이 맞지 않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영광의 전성기를 보내다 말년에 추락한 인물도 아니다. 뉘른베르크가 우러른 시대의 셀럽인데 이 정도 사후 대접이 맞는 것인가. 아니면 내 기준 자체가 특권주의로 가득 찬 선입견인 것인가.
동판에 새겨진 뒤러의 이름과 그의 서명은 여기가 그의 자리임을 오해의 소지 없이 입증하고 있다. 이 사람은 끝까지 뉘른베르크에 도움이 되고 있구나. 이 아름다운 도시에서 나고 죽어간 1인으로서, 퍼스트클래스를 고집하는 않는 일반 시민이 되어 누워 있는 거구나. 그의 묘지는 곧 뉘른베르크의 저력이었다.
쪼그려 앉아 뒤러의 묘를 한참 바라볼 때까지도 묘지 관리인은 옆자리를 지켰다. 이상한 느낌이다. 낯선 이가 곁을 지키고 있는 것이 조금도 부담스럽지 않았고, 그가 가지치기하던 곳으로 같이 되돌아가는 것도 그래야만 할 것 같은 자연스러움의 과정이었다. 그의 이름은 알렉스. 묘지를 탐방하러 왔다는 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변변치 않을 글로 풀어낼 거라는 오지랖도 넉넉한 웃음으로 받아주었다. 기행의 결과물을 어떻게든 그에게 전해주고 싶다. 인터넷이건 국제전화건 연락할 방법은 있을 것이다. 초록색 작업복을 입은 알렉스는 보라색 피부의 타노스보다 우월하다. 단정하고 경건한 공간의 창조자로서 그는 이 구역의 수호신이 되는 것이다. '아타나시오스', 본인의 불사를 원했던 타노스와 달리 알렉스는 묘지 아래에 잠든 뉘른베르크의 선인들에게 불사를 선물하고 있다. 이 역시 뉘른베르크의 저력인 것을.
2013년 독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묘지로 선정됐을 정도로 성 요한 묘지는 모든 요소들이 조화롭다. 석관 형식의 묘가 질서 있게 늘어서 있고 묘비의 장식은 제한적이나, 과하지 않은 꽃 장식은 악센트로서의 역할을 이보다 더 이상적으로 수행할 수 없을 지경이다. 과녁이 된 나치 정신의 심장부는 연합군에 의해 무참히 허물어졌지만 성 요한 묘지는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천운을 지닌 사후의 공간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16세기 초에 지어진 성 요한 교회는 나병 환자들을 위한 예배당의 기능을 수행했다고 한다. 애초에 이 묘지는 1395년 운영을 시작할 당시,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를 위한 공간이었으니 교회의 기능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페스트 등의 전염병이 가라앉으면서 성 요한 묘지는 일부 귀족들의 가족묘지화 되었다가 서서히 시민들의 공동묘지로 자리를 잡았다. 여유가 넘치지는 않아도, 지금도 성 요한 묘지는 뉘른베르크의 일등 시민을 위한 공간을 제공하는 중이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지척에 묻힐 이 도시의 후손들은, 그리고 누군가의 유족들은 다른 어느 도시의 장례와 비교해 봐도 커다란 안도와 위안을 받는 셈이 아닐까.
뉘른베르크의 미(美)는 결코 두루뭉술하지 않다. 찬란했던 시절의 가없는 영광과 나락으로 떨어졌던 전후(戰後)의 오욕이 날카로운 그래프가 되어 교차하고 있다. 서늘하고도 모난 것의 아름다움. 이 도시의 감춰진 매력을 들춰내는 것은 날이 선 칼에 베일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뜻이다. 어쩌면 이 제국도시에서 가장 온화한 아우라를 발산하고 있는 곳은 묘지인 이곳일지도 모른다. 일상의 곁에 자리한 성 요한 묘지는 진입과 진출의 순간에 느껴지는 모서리 따위는 없다. 생활의 공간과 추모의 공간에 떠 있는 공기는 균질하다. 경계란 없다. 그래서 이 죽은 자를 위한 터는 오히려 삶에 방점을 찍은,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장소가 아닐는지. 수많은 알렉스가 지켜온 추모의 공간은 도시의 한쪽에서 침착하게 빛나고 있다. 이제는 뉘른베르크를 떠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