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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의 엔진

BMW 벨트와 박물관

by Total Eclipse






중세에서 현재로 넘어오는 일은 월담 후 착지하는 충격과도 같다. 이런 비유는 월담을 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성 바깥의 주거지조차 제국도시의 보호막이 덮인 듯한 뉘른베르크를 벗어나 고속도로에 오르게 되면 모든 것이 먹먹하다. 꿈에서 막 깨어난 호접몽의 상태. 나는 나비가 아닌 게 확실하니 운전에 집중해야 한다. 정남향으로 뻗은 도로를 한 시간쯤 달려 자동차 회사 아우디의 도시, 잉골슈타트(Ingolstadt)를 지나면 머지않아 뮌헨(München)으로의 진입을 알리는 이정표가 보인다. 이렇게 북쪽에서 뮌헨으로 들어갈 거라면 올림피아파크 부근을 보고 가는 게 낫다. 검은 9월단의 이스라엘 선수 납치 사건인 뮌헨 참사로 얼룩졌던 1972년 뮌헨 올림픽의 시설들이 모여 있는 곳. 시대는 바뀌었다. 이제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은 이곳에서 올림픽의 화석보다 BMW 박물관을 순례하는 것을 선호한다. 슈투트가르트가 메르세데스 벤츠, 잉골슈타트가 아우디라면, 뮌헨은 말할 것도 없는 BMW의 도시다. 자동차 마니아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굴지의 대기업이 조성한 자동차의 성전은 이미 뮌헨의 전통 관광 명소가 되어버린지 오래니까.

도시와 묘지 기행이 시작된 뒤 가장 화창한 날씨다. 남독일의 우수는 찾을 수 없고, 지중해에서 흘러온 듯한 통쾌한 하늘빛이 흰 구름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그 하늘 아래 자리 잡은 BMW 벨트(Welt)와 뮤지엄은 생경함과 이질감의 오브제다. 과거에 집착할 수밖에 없게 되는 유럽 여행 중인데 난데없이 미래의 도시가 들이닥친 느낌이다. 날씨마저 도시의 전환을 말해주는 장치가 되고 있다. 뉘른베르크는 회색의 비장미였고, 뮌헨의 첫인사는 화려함이다. 그래, 어차피 무수한 과거의 유산을 마주쳐야 할 거라면 지금은 유럽의 현재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 역사는 그다음이다. 차에서 내린 방문객의 두 다리는 각각 전륜과 후륜 구동이 되어 박자를 맞춰 앞으로 나아간다.

20240821_142337.jpg BMW 벨트


다리는 두 동의 건물을 잇는다. 먼저 2007년 개장한 BMW 벨트(Welt=World)는 오스트리아 건축사무소가 지은 미래형 디자인의 작품이다. BMW가 자랑하는 신차의 라인업이 고급스럽게 전시되어 있을뿐더러 고객이 주문한 차를 드라마틱하게 인도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신차 전시와 판매가 이루어지는 곳이라 입장료는 없지만, 공짜인 눈호강은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원래 살 생각 없는 사람들이 더 꼼꼼히 구경하는 건 국룰이다. 망설임이 조금이라도 있는 현지인들이라면 BMW 벨트라는 공간이 주는 지름신의 강림이 치명적일 수도 있다. 특정 장소가 구매욕을 자극하는 정도에 점수가 있다면, 이곳은 그냥 벡 점 만점이다. 그러니 조심하세요들.

구조물을 감싸는 은색 커브의 매끄러운 연결은 첨단을 상징한다. BMW 벨트를 지은 건축사무소의 또 다른 작품 중 하나가 부산 해운대에 있는 영화의 전당이라고 하는데, 두 건물을 사진으로 비교해 보면 이 업체가 추구하는 건축의 질감과 선형, 그리고 전체적인 콘셉트가 어느 정도 짐작은 간다.

부산 영화의전당.jpeg 부산 영화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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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1_140337.jpg BMW 벨트의 내부


높은 천장고로 뻥 뚫린 내부는 속이 다 시원하다. 몰려온 자동차 마니아들이 결코 적지 않은데 답답하지 않은 공간감이다. 진심으로 신차의 내부를 살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모든 전시차들의 운전대를 잡아보겠다는 의지로 좌충우돌하는 꼬마들을 뒤쫓는 부모들도 보인다. 전시장을 둘러보니 오늘의 벨트에서도 몇 건의 신차 계약은 성사될 분위기다. 같은 BMW 영업사원이라도 본사 벨트점 소속 직원들은 자신감이 충만해 있지 않을까.

비즈니스의 현장을 서성이다 보니 프라하와 뉘른베르크의 고적함은 먼 옛날의 감상인 것만 같다.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린 뒤 외부로 나와 다리를 건넌다. 다리는 BMW의 현재와 과거를 잇는다. 이번엔 박물관이다.

20240821_142319.jpg BMW 본사와 박물관


사진 왼쪽의 긴 원통형 건물은 BMW 본사 사옥이다. 자동차 실린더 4개를 모아놓은 형상이다. 자못 현대적으로 보이지만 1972년에 완공되었으니 오십을 훌쩍 넘긴 초로의 건물이다. 박물관은 지면에서 살짝 들린 듯 반원형으로 지어진 오른쪽 건축물이다. 1973년 완공 후 관람객을 받다가 2002년부터 무려 6년 간의 대규모 리노베이션을 마친 뒤, 2008년 엄청난 수준의 전시 공간으로 거듭 태어났다. 판매장이 아니라서 당연히 인당 2만 원가량의 입장료는 내야 한다. 주제별 섹션으로 나뉜 각각의 공간은 놓칠 것이 없다. BMW 브랜드의 역사 안내는 기본이다. 비행기 엔진 제조사로 시작했던 곳답게, 초창기의 대형 엔진들이 관람객들을 압도하며 전시되어 있다. BMW는 'Bayerische Motoren Werke'의 축약. 굳이 자동차라고 못 박지 않은 '바이에른 모터 공장'을 브랜드 명으로 쓰고 있다. 시리즈별 자동차 전시는 물론이고, 경주용 자동차, 마니아들의 가슴에 스파크를 튀게 할 일군의 모터사이클은 보무도 당당하다. BMW고 벤츠고 아우디고, 한 번도 소유해 본 적 없는 내가 뭐 얻을 게 있다고 이런 안내를 하고 있나 모르겠다. 매장에 책을 들고 가 보여주면 할인이라도 해 줄 것인가. 턱도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내가 타는 국산차도 훌륭하다. 다만 조금 더 힘이 센 녀석으로 언젠가 업그레이드할 수 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열심히 출근해야 한다. 힘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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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1_151040.jpg 박물관에 전시된 BMW 모터사이클과 자동차


현재처럼 보이는 과거, 혹은 과거를 가장한 현재를 공간에서 재현하는 것은 박물관의 덕목이다. BMW 박물관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도약의 과거는 깔끔하게 포장되어 관람자들의 눈앞에 놓여있고, 영광스러운 현대의 기술은 실시간으로 제조사의 빛나는 역사가 되고 있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여행을 하고 있지만, 어떤 곳과 비해봐도 생을 찬미하는 공간 속으로 들어와 있는 것이다. 가속페달을 밟는 동시에 차는 전방으로, 미래로 튀어나간다. 불과 두어 세기 전이었다면 현재와 많은 미래의 합이 소요됐을 먼 거리로의 이동은, 이제 압축될 대로 되어버린 찰나의 시간이면 충분하다. 시간이 절약되고 거리가 단축될수록 생은 도약하고 한없이 자라난다. 느려지는 것의, 죽어가는 것의 가치는 여기 찬미된 속도의 소굴에서 잊히고 무시되어야 한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솜사탕 기계의 내부처럼 삿되고 허무한 감정들은 원심분리되어 끄트머리로 내쳐진다. 때로는 이런 여정도 필요하다. 단단하게 뭉쳐진 솜사탕은 곧 서서히 부서지고 흩어질 테니까.

독일 바이에른 산업의 심장부에서 예술의 심장부로 가는 길은 순식간이다. 넘치는 엔진의 힘이 더디 가는 시간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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