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큰길로는 다니지 않겠어

뮌헨 구시가의 북쪽 경계, 오데온 광장 부근

by Total Eclipse






뮌헨의 중심부로 들어간다. 인구 140만으로 독일 세 번째 규모의 대도시라 교통체증이란 걸 처음 경험한다. 크기에 비해서 안정되고 조용한 도시 뮌헨은 우리기 흔히 듣게 되는 '살기 좋은 도시 베스트 몇, 혹은 몇십' 안에 반드시 포함되는 명성을 자랑한다. 범죄율도 낮고 시민들의 문화적 수준도 평균을 한참 넘어선다. 비결은 단순하다. 도심 곳곳에 박물관이 포진해 있다. 아무 곳에나 카메라를 들이대도, 프레임 안에는 종류에 상관없이 박물관 하나는 반드시 들어와 있을 정도라면 과장일까. 과장 맞다. 하지만 그만큼 많다는 거다. 강성했던 바이에른 왕국의 자부심은 곳곳에서 배어 나온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인가. 별 다섯 개 급의 내공이 도시 전체에 깔려있다.

뮌헨이란 도시는 정확한 나이가 있다. 대부분의 유서 깊은 유럽 내 도시들처럼 5세기 중반, 30년 전쟁 이후... 뭐 이런 두루뭉술하고 희멀건한 간격을 사이에 끼고 발흥한 도시가 아니다. 바이에른 공 루트비히 1세가 1158년 도시에 시장과 다리를 건설했고, 바로 그 해가 공식적으로 뮌헨이 탄생한 해가 된 것이다. 주변 광산도시들에서 생산된 소금의 독점 유통권을 부여받은 뒤 시세는 날로 뻗어나가, 1506년 통일된 바이에른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18세기에는 합스부르크가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나 1806년 바이에른 신왕국의 수도로 부흥해, 근현대 뮌헨이 자랑하는 수많은 문화적 자산들을 창조하고 거둬들였다.

남고북저의 독일 지형은 뮌헨 부근에 빼어난 경관을 선사했다. 뮌헨을 진입하자마자 본 파란 하늘은 이례적인 것이 아니었는지, 바이에른 주의 공식 깃발은 독일 국기와는 분위기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바이에른 깃발.jpeg 바이에른 주의 깃발


파란 것은 하늘이요, 하얀색은 땅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내가 본 하늘의 색은 본디 바이에른 하늘의 그것과 같았다는 소리다. 푸른 지중해나 파란빛의 프로방스는 들어봤어도 푸른 독일이라니, 바이에른 주와 그 수도 뮌헨은 이 엄정한 나라에 깃털 같은 산소를 공급하는 지역인 것인가. 바이에른 주 체크무늬 깃발의 흔적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대표적인 로고 두 개만 보면 끝장이다.

bmw, 뮌헨로고.jpeg


BMW 로고, 그리고 김민재 선수가 활약 중인 전통의 강호 FC 바이에른 뮌헨의 로고에도 뮌헨의 하늘과 땅은 경쾌하게 정체를 드러낸다. 이쯤 되면 바이에른 주의 자긍심은 전방위적이라 할 수 있다.

어쩌다 도시의 역사에서 깃발과 무늬의 세계로 비약하고 말았다. 이렇게 된 김에 한 번의 확장만 보태보겠다. 마지막은 그리스의 국기다.

D8b4mBFnMTx.jpeg


군사정권이 들어선 1970년부터 5년 간은 진한 군청색 줄무늬의 국기가 채택되기도 했으나, 이후 그리스 국기의 파란색의 농도는 다시 옅어졌다. 왕국으로 독립한 그리스의 초대 국왕은 외지인인 오톤(1815~1868)이었는데, 그는 바이에른의 왕, 루트비히 1세의 차남이었다. 비록 쿠데타로 축출된 비운의 왕이었지만, 그리스 왕국의 설립과 동시에 스며든 바이에른의 푸른 정신이 그리스의 정체성으로 이식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색채와 무늬의 지정학도 연구해 볼 가치가 충분하다. 재미도 있으니까.


다시 여정을 잇는다. 시내 북쪽에 자리한 거대 공원 영국정원의 남서쪽 모퉁이에는 바이에른 정부의 주요 부처가 주위를 호위하는 오데온 광장(Odeonsplatz)이 있다. 관광객들의 원픽인 남쪽 마리엔 광장에 비해 썰렁한 모습을 연출하기도 하지만, 옥토버페스트의 행렬의 출발점인 이곳은 뮌헨 시민들에게 더 친숙한 열린 공간이다. 광장을 북으로 바라보고 있는 펠트헤른할레(Feldherrnhalle)는 루트비히 1세가 바이에른 군대를 찬양하기 위해 만든 건축물인데, 한때 히틀러에 의해 나치 기념관으로 변질된 오욕의 역사를 지녔다. 정작 구미가 당기는 것은 펠트헤른힐레의 뒤편, 뒤르케버거가세(Drückebergergasse)라는 골목길의 사연이다. 기세가 등등하던 히틀러의 시대. 나치의 행사가 밥 먹듯 벌어지던 펠트헤른할레 부근에서 일반시민들은 나치를 보면 나치식 경례를 올려붙여야 했다. 뮌헨사람들의 스트레스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오데온 광장을 오고 가던 시민들은 큰길을 마다하고 자연스레 나치의 군대를 만날 확률이 적은 좁은 길로 다니곤 했는데, 가장 가깝고도 효율적인 길이 광장의 끝을 접하고 있는 뒤르케버거 가세였다. 뒤르케버거(Drückeberger)는 도피자, 기피자라는 의미. 결국 뒤르케버거가세는 나치를 피해 시민들이 일부러 돌아가 유명해진 샛길이다.

오데온광장.jpeg 오데온 광장
Druckebergergasse-gog-1-1200.jpg 드뤼케버거가세


그게 왜 이제야 생각이 났을까. 서민들이 지배계급이나 군대를 피해 우회하며 유명해진 길은 멀리 유럽에서 찾을 필요가 없었다. 고관대작의 행차를 피해, 정확히 말하자면 높으신 분이 탄 말을 피하기 위해 돌아갔던 좁은 골목 일대, 서울 종로의 피맛골이 있지 않았던가. 나으리들께서 말을 타고 거리를 지나가는 동안 서민들은 고개를 내리 깔거나 바닥에 엎드려야 했으니 오죽 짜증이 났을까. 종로는 사대문 안 수도의 노른자.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고관대작들의 행렬이 오갔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자칫 큰 길로만 왕래하다가는 허리가 온전치 못할 것임을 직감한 서민들은 좁지만 마음 편한 뒷골목을 선호했다. 우리의 지체 높았던 양반들을 나치에 비교하는 게 아니고 그래서도 안되지만 장삼이사들이 육중한 예의의 무게에서 벗어나, 복작이되 사뿐한 걸음으로 지날 수 있었던 길이라는 점에서 두 통행로는 쌍둥이와도 같다. 종로 '피마(避馬)'의 골목과 뮌헨 '도피자'의 길은 자매결연이라도 맺어야 할 판이다. 서민들로만 북적였을 피맛골엔 자연히 선술집이나 저렴한 국밥집 등이 호황을 누렸을 테고, 그들의 노하우는 시대가 바뀌어도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종로 1가에서 3가에 걸쳐 남아있는 피맛골은 온통 가성비 최고의 맛집 천지다. 드뤼케버거가세에도 카페들이 밀집해 있지만 피맛골의 맛집들을 따라오기에는 역부족이 아닐까. 암, 그렇고말고다.

20200425_100124.jpg 종로 피맛골 입구


눈에 보이지 않는 구분선이 있다. 중국의 신장, 위구르 자치지구부터 '~스탄'으로 헤쳐 모일 수 있는 나라들은 한데 묶여 중앙아시아라 통칭한다. 보이지 않는 선은 이란과의 경계에 남북으로 그어져 중동과의 구별을 짓는다. TV의 쇼호스트는 체코와 헝가리, 오스트리아 핵심을 완전 정복한다며 동유럽 3개국 패키지 모객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오스트리아가 동유럽인지 중부 유럽인지 머릿속 지도에 내 나름의 선을 그어보며 별 소득 없는 의심만 키우고 있다. 때로는 눈에 보인다고도 할 수 있는 구분선도 있다. 뚜렷한 자연의 장벽은 그 모습 그대로 경계를 이룬다. 험준한 산맥이 가로놓여있다면 더 이상 확실한 벽은 없다. 시각적으로도 뚜렷하고 산맥의 이쪽과 저쪽은 기상이 다를 확률도 높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태백산맥을 기준으로 영동과 영서를 나누는 것처럼, 아니 훨씬 거대한 스케일로 유럽대륙은 알프스라는 대체 불가한 산맥이 상, 하를 가르고 있다. 그렇다고 알프스 이북을 북유럽으로, 이남을 남유럽으로 양분해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핀란드와 노르웨이를 위시한 진정한 북유럽이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중요한 것은 위치보다 내용이다. 지형과 날씨는 사람들의 기질을 형성해 왔고, 저마다의 기질은 각자의 문화예술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산맥의 북쪽에서 심오한 철학은 기악의 깊이를 더했고, 알프스의 남녘에선 시각예술에 스토리가 더해져 성악예술이 융성했다. 알프스 이남 문화예술의 거점을 이탈리아 로마가 차지해 왔다면 이북의 전진기지는 바이에른의 맹주, 뮌헨이었다. 세계 문화사의 우여곡절이 교차해 온 도시의 증거들은 차고 넘친다. 문화 도시의 사전탐색을 웬만큼 한 셈이니 이제는 그 속으로 파고들 차례다.

뺴놓을 수 없는 명화의 전당, 뮌헨이 보유한 세계 최고의 수장고가 지척이다. 발걸음이 빨라진다.

20240821_155241.jpg 뮌헨의 거리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