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스트 아레알의 대표선수, 알테 피나코테크
서너 살 때부터 그렸다. 백일 무렵부터의 빛바랜 사진들이 끈끈하게 달라붙어있는 초록색 사진첩의 속지는 한 아이가 괴발개발 그려 넣은, 그림과 상형문자 사이의 그 무언가 들로 가득했다. 엄마와 아빠가 집에 돌아오기 전, 딱히 할 것도 없었던 꼬마에게는 딱히 할 것이라고 말하기엔 너무나도 재미있었던 그림 그리기였다. 늠름하게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와 자동차 그림이 가장 많았고, 여섯 살 무렵부터는 로보트 태권브이를 위시한 공상과학만화의 캐릭터가 꼬마의 주된 습작이 되었다. 학교에 들어가서는 학급신문의 만화코너를 맡았고, 어른이 되어 돈이 생기면 인쇄하겠다는 마음을 먹으며 나만의 단행본 만화를 연습장 몇십 페이지에 걸쳐 채워 넣었다. 시간이 흘러 고 1 미술 데생 시간이 끝나고 나서는 미술부에 들어오라는 선생님의 권유도 있었지만, 그림이란 것은 그렇게까지 몰입할 대상이 더 이상 되지 못했다. 그때 미술부에 들어간 친구들의 실력은 일취월장. 어차피 난 예체능으로 대학 갈 게 아니니까 뭐. 숙련자의 초입도 맛보지 못한 채 태어난 곳으로 회귀하는 그림 세계의 연어 한 마리가 되었다.
사람 참 좀스럽다. 사회에서 미술을 전공한 사람을 만나면 어릴 때 그림 좀 그렸어요 하고 잘난 체할 계제가 안돼 다가가기 꺼려진다. 그렇다고 그림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을 만나면 잘난 체할 거리가 없어 다가가기 꺼려진다. 방 안에 혼자 엎드려 상상을 삐뚤빼뚤 이음선으로 창조하던 꼬마에게 있어 그림이란, 그것이 명화든 낙서든 상관없이 가슴 뛰는 결과물이고, 더 멋지게 완성할 수 있었으나 그러지 못했다는 허세의 상징이다.
독일 최고의 미술관을 섭렵해야 할 다 커버린 꼬마는 어찌 됐든 설레는 것이다.
알테 피나코테크(Alte Pinakothek). 1836년 비텔스바흐(Wittelsbach) 가문 출신 바이에른 공국의 왕, 루트비히 1세에 의해 준공된 미술관은 왕가의 수집품을 시작으로 수 세기에 걸친 유럽의 회화를 소장한 독일의 대표 예술 전시관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알브레히트 뒤러와 피테르 브뤼헐, 파울 루벤스와 렘브란트의 작품이 다수 전시되어 있어, 세계 6대 미술관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묵직한 존재감을 자랑한다. 미술관은 2차 세계대전의 폭격으로 반파의 피해를 입었으나 정밀한 복구공사로 1957년, 5년 만에 다시 문을 열고 관람객들을 맞았다. 알테(舊) 피나코테크가 14에서 18세기의 작품들을 보유하고 있다면, 쌍을 이루는 노이에(新) 피나코테크(Neue Pinakothek)는 18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의 명작들을 소장하고 있다. 노이에 피나코테크는 널따란 잔디밭을 사이에 두고 알테 피나코테크의 북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집트 미술관은 남쪽에 대칭이 되어 서 있다. 동쪽에서 이들 미술관 군(群)을 방어하는 듯한 피나코테크 데어 모데르네(Pinakothek der Moderne)는 노이에 피나코테크 전시품 이후의 현대 미술작품만을 취급하는 그야말로 '모던' 미술관이다. 수준 높은 미술관들의 연대는 영국정원의 남쪽 지구에 계획적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뮌헨 예술의 핵심인 이곳을 쿤스트 아레알(Kunstareal), 곧 예술지구라고 부른다.
평일 오후의 한산함에서 관람의 여유를 직감하지만 공기는 가볍지 않다. 목도할 명화들의 아우라가 번져 나왔다기에는 이 엄숙함이 너무 직관적이다. 검은색 정장과 타이 차림의 경비원들에게서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다. 어정쩡한 의무감이 아닌 얼음 같은 완고함이다. 시야에서 벗어나 보안과 감독을 서포트하는 게 아니라 보란 듯이 난 너희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자세다. 그들의 위치부터 노골적이다. 전시실로 올라가는 계단참 바로 아래에 미술관의 수호자들은 관람객들을 압박하며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것이다. 위압적이다. 이럴 필요까지 있을까. 있었다. 과거의 어느 어이없던 사건 이후로.
미술관의 흑역사는 1988년 4월에 기록되었다. 어색한 움직임으로 전시실을 배회하고 있던 수상한 차림의 한 관람객. 뒤러의 명작「파움가르트너 제단화」앞에 자리 잡은 그는 돌연 감추고 있던 병 속의 염산을 그림 위에 뿌렸다. 경비원의 제지는 한참 늦었고, 녹아내린 제단화는 독일 예술계의 수치가 되어버렸다. 훼손된 뒤러의 제단화는 전문 복원가가 감쪽같이 망가진 자국을 없애 다시 관람객들에게 돌려놓을 수 있었지만, 세계 미술사를 통틀어 비교불가할 이날의 천인공노할 테러는 결코 망각될 수 없었다. 마이스터의 전통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독일인들은 이를 악물었다. 미술관 내의 모든 그림을 방탄유리로 감싸고, 유리 앞 20센티미터까지 관람객이 근접하면 비상벨이 울리는 동시에 출입구가 차단되는 시스템을 완비한 후 1998년 다시 개관했다.
뉘른베르크 성 카타리나 교회의 제단에 걸려있던 이 뒤러의 명작은 막시밀리안 1세의 요청으로 뮌헨으로 옮겨졌다. 가운데 패널화에서 보이듯 예수 탄생을 주제로 한 작품이지만, 성인으로 묘사되는 양쪽 패널화의 인물들은 이 그림을 주문한 파움가르트너가(家) 사람들을 묘사한 거라고 한다. 전화위복. 어쩌면 이 작품 덕분에 알테 피나코테크의 모든 그림들은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환경에 놓였는지도 모른다. 동료의 안위를 기도하며 스스로 염산의 제단에 오른 「파움가르트너 제단화 」. 아, 숭고한 희생의 아이콘이여!
몇몇 진품들을 멀찍이서, 그리고 가까이서 감상하자. 단 안전거리 20센티미터는 지켜야 한다.
어디에서건 보았을 명화들이 단순하면서도 연속적인 전시실 내부를 따라 파도치듯 목격된다. 400년이라는 기나긴 유럽 회화 황금기의 대표작들이 망막에 차례로 맺혀 정신 차리기가 힘들 정도다. 눈동자가 두 개였기에 망정이지 잠자리와 같았다면 진즉에 어지럼증으로 후송되었을 것이다. 글과 사진을 통해서도 현기증은 유발될 수 있기에 알트도르퍼의 작품 하나만 따로 떼어 보기로 한다.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의 군대와 격돌했던 이수스 전투(B.C.333)를 묘사한 대작이다. 사람 한 명 한 명을 섬세하게 그려 넣었고, 그들의 집합인 양측의 군대는 사행천인 양 커다란 굽이를 치며 한데 뒤엉키며 섞이고 있다. 원경엔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떠 있는 듯한 바다는 하늘과 맞닿아 보이는 홍해다. 그림의 좌측 하단부 세 마리의 백마가 끄는 마차에는 다리우스 3세가 타고 있는데, 알렉산더 군대에 쫓겨 도망치는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우측 하단의 형형색색 군기(軍旗)를 자세히 관찰하면 각각의 문장(紋章)들이 세밀화 수준으로 박혀있다. 사람 키만 한 이 그림은 멀리서 원근과 고저를 파악하며 넉넉하게 바라보아도 예술이고, 돋보기를 꺼내 들고 인물과 배경을 확대해 봐도 명작이다. 물론 근접 시 비상벨의 알람은 각오해야겠지만.
이거 어디 신경 쓰여서 그림 감상이나 하겠어? 안전거리 노이로제라도 걸릴 판이다. 그러나 안심해도 되겠다. 관람객이 그림에 몰입돼 머리가 줌-인 기능을 발동하면 근처에 있는 경비원이 먼저 다가와 주의를 준다. 나무라는 식의 주의가 아니라 늘 벌어지는 일이라 대수롭지 않지만 이해하세요, 어쩌겠어요 식의 주의다. 알람 직전의 타이밍을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말을 걸어주니, 웬만해선 나 때문에 소동이 벌어질 일은 없다. 여유 있고 넉넉하게 감상의 산책을 즐기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노이로제(Neurose, 신경증)는 독일어다.
알테 피나코테크 건축의 개성은 전시실 바깥, 계단실에서 드러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직이 주는 질량감과 깊이감은 순간 낯선 긴장을 불러일으키다가도 이내 침잠하는 감상의 고귀함으로 승화한다.
미술관의 창문 바깥은 초록이다. 초록과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각각의 창틀은 명화의 프레임으로 기능하는 셈이다. 지나간 작품을 쥐고 있는 틀이 아닌 오늘날의 뮌헨을 담은 산뜻한 액자. 얼른 차원을 뛰어넘어 초록의 카펫 위로 합류하고 싶었다. 수집이 덕목이 되어 세워진 예술의 보고 앞마당엔 바이에른의 쉼이 깔려 있었다. 팍팍한 삶은 어디에서나 공통된 것이지만 일상과 예술이 나란히 걸어가는 풍경은 썩 보기 좋았다. 쿤스트 아레알의 존재는 오직 뮌헨만의 축복이다.
살짝 부러운 마음은 취기로 다스려야 한다. 뮌헨 여행의 시그니처 무대를 밟아본 뒤 목을 축이면 제격이겠다. 맥주광까지는 아니어도 이 도시에서 맥주를 빠뜨리는 것은 죄악이니까. 마침 알테 피나코테크의 뒤로 해가 비스듬히 넘어가고 있다. 날씨도 시간도 빛깔도 안성맞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