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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라거는 뮌헨이지

호프브로이하우스 암 플라츨

by Total Eclipse







체코에 이어서 독일. 그것도 세계를 대표하는 맥주도시가 여정에 잇따라 들어와 버렸다. 맥주를 중심에 놓고 짜인 동선이 결코 아닌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에일의 본고장인 저 위의 영국을 포함해 중, 동부 유럽 국가를 목적지로 설정한다면 언제든 받을 수 있는 오해다. 술이 싫다고 해서 맥주와 관계없는 도시만을 거치는 여정을 만드는 건 이 땅에서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각 도시의 피날레는 추모를 동반한 묘지탐방이기 때문에 화려한 라인업을 자랑하는 뮌헨의 맥주 명가를 다 돌아볼 여유는 사치다. 마리엔 광장과 원 플러스 원으로 묶여 여행자들의 선택을 받는 그곳. 그렇다면 호프프로이하우스가 답이다. 구 시청사 출구로 나와 직진을 한 뒤 왼쪽 골목을 따라 올라가면 사방에서 하나둘씩 걸어 나오는 사람들이 수렴하는 작은 공터가 있고, 두 눈에 힘을 주고 바라보면 진공청소기처럼 그들을 흡입하는 공간이 보인다. 호프브로이하우스의 입구다.

20240821_201054.jpg 뮌헨 호프브로이하우스와 왼편에 보이는 오를란도하우스


하나 둘 조명이 들어오는 거리에 호프브로이하우스는 침착한 직육면체로 앉아있다. 입구에서 왼쪽을 바라보면 독특한 양식의 건물을 확인할 수 있는데, 도시 최고의 맛집인 오를란도하우스다. 벨기에 출신 바이에른 궁정 악장 오를란도 디 라쏘의 거처가 있던 곳에 1900년 세운 르네상스풍의 건물로,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내, 외관을 자랑한다. 오를란도 하우스와 호프브로이하우스가 직각으로 감싸고 있는 이 구역은 뮌헨 구도심의 중심으로, 플라츨(Platzl)이라고 부른다. 오늘날에도 현지인과 외지인이 흥겨운 밤을 보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만남의 장이다.

조심할 게 있다. 구글맵에 '뮌헨 호프브로이하우스'라고 검색하면 플라츨에서 차로 20여 분 거리인 시 외곽의 지점을 먼저 안내하는 경우가 잦다. 마리엔 광장에서 호프브로이하우스를 찾는 것은 어려움이 없으나, 다른 장소에서 이곳을 찾아오려면 '호프브로이하우스 암 플라츨(Hofbräuhaus am Platzl)'을 입력해야 한다.


여행책자와 블로그, 영상과 방송에서 숱하게 소개된 맥주의 성지다. 가만히 있어도 세상의 상식이 되었다는 건 바이에른의 자부심이 이 회합의 공간에 그만큼 녹아있다는 소리다. 지금도 파사드의 상단 양쪽에는 'HB' 로고가 박힌 청백 무늬의 바이에른 깃발이 걸려 있다. 히틀러가 나치 창당을 선언하며 격정적 연설을 벌였고, 모차르트와 레닌이 단골로 삼은 현장이라는 건 이젠 무감각해질 정도의 역사가 되어버렸다. '들어간다'는 표현보다는 '입장한다'가 제격이다. 그래서 입장한다. 드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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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독일인이 과묵하다고 했나. 테이블마다 들려오는 선 굵은 독일어의 압력이 섞이고 또 엇갈려 어디에든 히틀러가 있는 듯하다. 이 정도 소음이라면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상대와의 대화가 가능할지조차 의문이다. 게다가 천장은 고딕 성당의 천장 양식인 반원형 볼트(vault) 구조로, 각자의 사연들은 반사에 반사를 거듭하며 홀 내부에 메아리친다. 취기 오른 주당들의 얼굴에서 열기마저 피어올라 내부 온도의 상승을 유발한다. 호프브로이하우스의 명물인 악단의 연주는 손님들의 소음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도저히 공존할 수 없을 것만 같은 토론과 연주가 물, 아니 맥주 흐르듯 이어진다. 당황스러운 건 나뿐이다.

그나마 빈자리가 없다. 여름밤 유명 맥줏집의 인기는 당연한 것이다. 홀 안쪽을 따라 걸아가니 왼편에 야외 테이블 공간이 보인다. 그래 이거지. 여기는 비어가르텐(Biergarten)이다! 정원이 딸린 맥줏집이 아니던가. 수다로 넘실대는 데시벨은 부질없다. 악기 소리와도 같은 온갖 대화들은 공기 속으로, 하늘로 둥실 떠가며 산화한다. 묵직한 음성은 깃털 같은 재잘거림으로 무게를 덜어낸다. 어둑해진 하늘에 점점이 박힌 땅 위의 노란 불빛은 일상을 천상으로 이끈다. 그럴 리 없겠지만 이 조명이 가스등이었다면 이런 종류의 가스라이팅은 얼마든 환영이다. 다부져 보이는 종업원을 붙잡고 빈자리를 점찍어줄 것을 간청한다. 금세 자리가 났다. 옥좌에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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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1_213347.jpg 호프브로이하우스의 비어가르텐


국영 맥주 양조장이라는 태생적 이점에도 불구하고 호프브로이하우스의 유명세는 단순하게 획득된 것이 아니다. 독일에서 맥주의 인기는 교역의 발달과 함께 했다. 12세기말 북유럽 주요 도시들은 한자동맹 연합을 형성해 해적으로부터 공동 대응하고 상호 면세 혜택을 부여해 상호 공존을 이루어냈는데, 연합의 최일선에는 뤼베크, 브레멘과 같은 북독일 도시들이 있었다. 16세기에 접어들어 맥주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자연스레 맥주 양조의 수준이 높아진 곳도 한자 동맹 소속 도시들이었고, 특히 아인베크(Einbeck)라는 소도시에서 생산된 강렬한 맛의 맥주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종교개혁에 단초가 되었던 보름스 제국회의를 앞두고 잔뜩 긴장한 마르틴 루터는 독한 아인베크 맥주를 단숨에 들이켜고 신성로마제국 황제 앞에서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따박따박 논박했다고 하는데, 루터 신드롬과 함께 아인베크 맥주의 인기도 덩달아 오른 것도 판매 급증의 요인이 되었다. 이런 상황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아인베크 맥주광, 바이에른 공국의 빌헬름 5세는 '돈 주고 사 먹느니 내가 만들어 먹겠어!' 정신으로 1591년 남독일의 궁정 양조장을 친히 만들었다. 아인베크의 명성을 따라잡기 위해 설립한 이곳이 호프브로이하우스의 모태로, 널리 알려진 왕관 그림의 로고는 이런 탄생 비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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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브로이하우스와 슈파텐 로고


빌헬름 5세의 아들 막시밀리안 1세는 호프브로이하우스 맥주의 품질을 본 궤도에 올려놓았지만 궁정 양조장으로서의 기능은 오래가지 못해 민간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그 후에도 뮌헨의 대표 양조장들은 지속적으로 품질 개량 노력을 이어가 호프브로이하우스의 인기 역시 꾸준히 유지되었다. 그중에도 1397년 설립된 슈파텐(Spaten) 양조장은 뮌헨 맥주를 획기적으로 개선해, 호프브로이를 비롯한 바이에른 대표 양조장들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촉매가 되었다. 19세기 초 슈파텐의 운영자였던 제들마이어 1세와 그의 아들 2세는 보관이 수월치 않은 상면 발효주인 에일 대신 발효통 바닥의 효모를 이용해 발효하는 하면 발효주 개발에 성공했다. 뮌헨에서 탄생한 하면 발효 맥주는 발전을 거듭한 냉장과 냉동기술을 바탕으로, 낮은 온도에서 장기간 보관이 가능하게 되었다. 맥주 도시들의 경쟁은 살벌했다. 뮌헨이 급부상한 시점에 체코의 플젠도 시원하고 맑은 하면 맥주 개발에 힘을 쏟고 있었고, 바이에른의 맥주 명인 요제프 그롤(Joseph Groll)을 영입해 뮌헨의 효모를 첨가한 하면 맥주 개발에 성공했다. 플젠의 새로운 맥주는 월등한 청량감과 투명한 황금색으로 찬사를 받았는데, 미네랄 등이 들어있지 않은 플젠 지방의 연수(軟水)가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었다. 밥이든 술이든 결국은 물이 좋아야 하는 법이다. 플젠은 이 뛰어난 하면 발효주를 필스너로 명명했고, 유럽 대륙은 필스너 열풍 속으로 휘몰아쳤다. 황금빛 필스너 우르켈의 탄생은 이처럼 역동적이었다.

뮌헨 양조업계로서는 통탄할 일이었다. 하면 발효 맥주의 제조 기술의 본거지임에도 유명세는 체코의 플젠이란 도시에 빼앗겨 버렸으니. 뒤늦게 치고 올라간 뮌헨의 양조장들은 개선된 하면 발효 맥주를 잇따라 만들어냈지만 필스너(Pilsner)의 명성은 이미 플젠의 것이 되었다. '라거(Larger)'라는 명칭이 등장한 것은 이 때다. 에일 맥주에 비해 오래, 그리고 신선하게 보관 가능하다는 특징으로 독일어 '저장하다, 눕히다(Lagern)'의 어간을 취해 작명한 라거 맥주는 그러니까 체코의 필스너에 대항한 독일의 하면 발효 맥주인 셈이었다. 뮌헨에서 필스너 대신 어쩔 수 없이 작명한 라거는 전 세계 맥주시장을 석권하는 하면 맥주의 별칭이 된 지 오래다. 이런 걸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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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브로이 오리지널과 슈바인 학센


자만시(自挽詩)라는 장르가 있다. 타인의 죽음을 애도하고 넋을 위로하는 장송곡인 만가(挽歌)나 만시(挽詩)를 초월해,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애도하며 살아온 날들의 감회를 담은 시문학이다. 망자가 된 자신이 화자가 되어 생전의 자신을 아우른다는 점에서 공상의 문학이라고 분류하기도 한다. 본인의 삶을 과대평가하거나 지나치게 우수에 젖어 스스로를 비운의 주인공으로 묘사한 시도 적지 않았으나 타인의 추모 만가에 기대지 않고 자신의 삶을 자신이 평가하고 정리할 수 있었던, 폄훼할 수 없는 창작물이기도 했다.

자만시의 전범으로 추앙되어 온 작품은 귀거래사의 스타, 도연명(365~427)이 지은 <의만가사(擬挽歌辭)>다. 후대가 집중적으로 리메이크한 대목은 3수 중 그의 첫 번째 수의 일부분이다.


천년만년 지난 후 누가 영화와 치욕을 알겠느냐

다만 한스럽기는 세상에 있을 때

만족스럽게 술 마시지 못한 일이네.


千秋萬歲後 誰知榮與辱

但恨在世時 飮酒不得足


한국인이어서 어쩔 수 없는 독일 돼지족발 맛의 허전함을 상쾌한 뮌헨 정통 라거의 목 넘김으로 보상받는다. 도연명의 문장력이 수십 번 태어나 연마를 해도 따라갈 수 없을 경지라면, 그의 자만시에 나와있는 '음주부득족'의 후회라도 나는 하지 않으려 한다. 내일은 다시 이승과 저승이 교차하는 공간을 찾는 날이다. 바이에른의 영롱한 별빛과 찬란한 맥주의 금빛으로 농밀해지는 어둠을 맞고 또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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