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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tal Eclipse Sep 03. 2020

12 행복하자, 남쪽에서  -서귀포 이중섭 거리~새연교

모든 곳의 어떤 것들








 생각해 봤습니다.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게, 기억만 따라서.

 20년 가까이 살아온 제주입니다. 얼마 전 사회조사 질문지를 받아 들고 '제주에의 적응' 부문 항목의 답을 적으려는 순간, 무언가 잘못됐음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자격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습니다. '적응' 관련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는 대상은 불과 입도 몇 년차 이하인 주민들에 한정된 것이었습니다.  

 제주에 온 지 그쯤 되면 본토박이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는데 과연 그렇게 살고 있는 건지... 설문에 답을 하다가 엉뚱하게 자신을 되돌아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뭐라고, 꼭 무엇을 '해야' 진정한 제주도민이 되는 건 아닌 듯하더군요. 그저 이 제주라는 땅과 제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나와 더불어 자연스러워지면 그때가 바로 진정한 도민이 된 순간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어디든 자연스러워지는 단계를 넘어 곪아버린 익숙함이 타성으로 바뀔 때면 자리를 박차고 떠나는 삶을 반복했는데, 또 못된 습관이 나올까 봐 초조해하면서도 가슴속에 박혀있는 제주의 이미지를 한 컷씩 정리해 보고 싶었습니다.   

 한 곳에 오래 살아온 사람들이 그렇듯 이제는 꼭 필요한 곳만 찾습니다. 간혹 순수하게 제주를 느껴보려 도심에서 벗어나도 예전과는 다른 풍경들이 토박이화 된 나를 맞습니다. 시내 한복판에 있을 법한 세련된 건물이 4.3의 공포가 서린 시골의 땅에 들어서 있습니다. 제주 대지의 역사를 모르는 사람이 봐도 도무지 밸런스가 맞지 않는 배경과 건물의 부조화입니다. 안타깝고 당혹스러워하는 척하는 것도 잠시, 뜨거운 날씨 핑계를 대며 아이스커피를 찾아 그 괴상하리만치 세련된 건물 안으로 들어갑니다. 자존심이 상합니다.   

 그래서 생각해 봤습니다, 신제주권만 벗어나도 가슴이 쿵쾅거리던 초보 제주도민 시절을 떠올리면서 말이죠.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게, 그때 신참의 심장을 뛰게 했던 공간은 어디였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그토록 보여주고 싶었던 제주의 일부는 어디였는지. 

 순수했던 만큼 전형적이었던 코스가 있었습니다.


   서귀포시 이중섭 거리


 코스의 출발점입니다. 제주 올레 6코스의 일부이기도 하고 서귀포 작가의 산책길 출발점이기도 한 이중섭 거리지요. 관념 속의 여러 길들이 중첩되는 흔치 않은 공간입니다. 그러고 보니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동선을 따라 각자의 '작은 올레길'도 무수히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997년에 조성된 거리니 벌써 이십몇 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공예품과 기념품 가게들, 카페들이 내리막길 양옆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예전에 비해 크게 바뀐 것 없는 분위기라 더 반갑습니다. 이렇듯 시작을 내리막으로 선택하면 경쾌할 따름입니다. 더구나 바다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이중섭 거리의 보행은 들뜨기 마련입니다. 삼사십 미터쯤 내려가다 보면 깜찍한 가게들의 연속이 뚝 끊어집니다. 로마나 아테네의 상점가를 지나다 뜬금없이 유적을 마주친 느낌이랄까요, 이중섭 거리 중간쯤에 담쟁이넝쿨이 역사를 말해주는 회색 건물이 있습니다.    


   

 1963년 개관해 1999년 문을 닫은 서귀포 관광극장입니다. 60년이 되어가는 건물이니 늘어진 담쟁이가 자연스럽습니다. 서귀포시 최초의 극장이었으며 지역 행사장으로서도 기능을 했던 시민 종합 문화공간이었다고 하는군요. 겉모습을 보고 신기해하면서도 들어가길 망설이는 분들이 보입니다. 아니, 들어갈 수 없는 곳이려니 생각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어떤 질문이든 친절히 답해 주실 해설사가 계시거든요, 들어가십시오.

 극장의 로비에 해당하는 넓지 않은 구역을 넘어가면 인상적인 광경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판타지 영화 속에서 허름한 건물에 들어갔다가 마법의 세계를 맞닥뜨리는 느낌이랄까요, 겉과 속이 딴판입니다. 하늘이 뚫려 무한한 공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무 벤치가 있는 곳이 예전 극장 좌석의 위치였고요, 정면의 돌벽이 스크린이 있었던 곳입니다. 담쟁이가 정확히 벽의 절반을 덮은 모습입니다. 무엇보다 태풍으로 날아간 지붕을 보수하지 않고 그대로 둔 것이 오히려 신화적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때문에 비나 눈이 내릴 때 곤혹스럽긴 하겠지만 주말에는 시민들에게 개방되는 공연장으로 변신한다고 하니 그것 참 운치 있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남국의 별빛 아래 반짝이는 조명, 완벽하지 못해 더 아름다울 아마추어 밴드의 노래와 음악소리, 기가 막힐 것 같지 않으신지요.

 더 가까이 무대를 향해 가니 3년이 되어가는 그날의 모습이 눈앞에 겹쳐집니다.



 와... 벽면이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계절도 다릅니다만 당쟁이의 기세가 대단했군요. 2018년 초가을에 시작해 142일간 이어진 전무후무한 파업기간 중 하루였습니다. 서귀포 작가의 산책길을 걸으며 시민들에게 파업의 정당성을 알리고 국민의 방송으로 돌려놓을 것을 다짐하는 시간이었는데요, 매서운 겨울바람에 두 볼이 얼얼했지만 가슴만은 뜨거웠던 날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천장이 없는 고대의 건물 같은 모습에 조합원들이 놀라워했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극장을 나오니 땀이 많이 나지 않는 체질인데도 이마와 팔뚝에 땀이 맺히기 시작합니다. 평소에도 꽤 많은 관광객들이 보이는 곳이지만 휴가철임에도 불구하고 거리에는 그다지 많은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지나치게 끓는 날씨에 다들 실내로 들어가셨나 싶기도 합니다. 저도 그곳으로 들어갔습니다. 네 번째 방문이었고요, 코로나 시국인지라 예약은 필수였습니다.


  이중섭 미술관


 네, 이중섭 거리가 존재하는 이유, 이중섭 미술관입니다. 이번에 소개해 드리는 코스가 초보 제주도민 시절 서울에서 온 친구나 손님들을 이끌었던 길이지만 당시엔 미술관까지 안내하지는 않았습니다. 정착 후 몇 년이 지난 뒤부터 잊을만하면 찾던 곳이었지요. 부잣집 막내아들에서 피난민으로, 가난한 예술가로 살다가 명예를 드높이는 기회를 잡는가 싶었지만 결국 깊은 좌절과 병치레로 40이라는 짧은 인생을 살다 간 대한민국 슈퍼스타 미술가, 그분을 찾아 다시 오게 되었습니다.

 김환기, 박수근과 더불어 자랑스럽게 부를 이름입니다. 이.중.섭. 각각 1913,1914,1916년 생이니 동시대를 살아온 황금시대 트리오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일제강점기와 6.25의 참화를 겪은 고난의 시기를 거쳤음에도 오히려 굴곡의 역사가 그들의 창작에 불을 지폈을까요. 절절한 시대의 아픔의 산물을 우리는 너무 편하게 감상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를 일입니다.  

 남녘의 바다를 향해 서 있는 이중섭 미술관의 상징성에 비해 이중섭과 그의 가족이 제주에 머물렀던 기간은 인생에서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쟁이 터진 후 함경도 원산에 어머니를 남긴 채 부산으로 피난을 왔고, 포화상태인 부산에서 피난민을 다시 제주로 분산시킨다는 정책에 따라 1951년 1월 제주로 왔다가 그해 12월 다시 부산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불과 1년도 안 되는 제주생활이었던 것입니다. 그저 잠시 머물렀다 갔을 뿐이건만 이름난 화가라 해서 미술관을 세우고 거처도 복원했으며, 그의 이름을 딴 거리까지 조성하면서 행정에서 그야말로 오버를 한 걸까요?

 그렇지는 않아 보입니다. 그토록 짧았던 서귀포에서의 삶이 이중섭에게는 나머지 39년과도 맞바꿀 수 없는 기억이었음이 분명해 보이니까요.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나 함경남도 원산으로 이사한 이중섭은 일제 강점기 결코 쉬울 수 없었던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됩니다. 금수저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겠지요. 도쿄 데이코쿠 미술학교(東京帝國美術學敎)를 거쳐 좀 더 자유로운 분카가쿠인(文化學院)에서 가능성을 한껏 드높입니다. 그리고 평생을 죽도록 그리워한 그의 반쪽을 만나게 됩니다.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한국명 '이남덕'입니다.


일본 유학시절 만난 마사코가 평생의 배필, 이남덕이 되었습니다


 이중섭을 잊지 못해 단신으로 한국을 찾은 마사코는 결국 꿈에 그리던 그와 가정을 꾸립니다. '남쪽에서 온 덕이 많은 사람'이란 뜻으로 이중섭이 '남덕'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하죠. 일본의 패망이 임박한 시점이었음에도 과감히 바다를 건넌 용기 있는 그녀였습니다. 일찍 사망한 첫째 아들 이후 두 아들을 더 낳고 살던 부부에게 유일한 기억 속 파라다이스는 비록 궁핍한 공간이었음에도 '서귀포'였던 것입니다. 곤궁한 삶을 벗어나고자 다시 부산으로 거처를 옮기고, 자녀들의 미래를 염려해 부인 이남덕과 두 아들이 일본으로 건너간 뒤에는 오직 그리움만 오고 갈 뿐이었습니다. 이후 일본에서 잠깐의 재회를 하게 되지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어 섞일 수 있었던 보금자리는, 푸른 바다 위 섶섬이 보이는 서귀포의 초가였던 것입니다. 그의 그림에서 '소'만큼이나 많이 등장하는 어린아이와 수많은 게들은 눈물 나게 그리워 잊지 못할 서귀포 앞바다에서의 추억,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요.


<섶섬이 보이는 풍경>, 합판에 유채, 41*47cm, 1951


 아내 이남덕과 두 아들을 그리워하다 결국 쓸쓸히 무연고자로 숨을 거둔 이중섭. 비록 구상, 박고석 같은 벗들이 그의 장례를 지켜주었지만 바다 건너 사무치는 사랑의 대상을 끝내 보듬지 못한 안타까움이 그를 추모하는 모든 이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 뿐이었습니다. 미소가 지어져야 마땅한 그의 엽서 속 가족의 그림이 왜 이리 미간에 잔뜩 힘이 들어가게 만드는 것인지요.


  


 이중섭의 그림을 보면 삶의 공간에 대한 의미부여가 드러나는 듯합니다. 희망과 열정이 가득했던 일본 유학시절, 힘겹게 살아가던 부산 피난시절, 가난했지만 가족의 사랑이 가득했던 서귀포의 한때, 그리고 오로지 작품으로 승부를 보려던 통영과 진주에서의 시간들. 공간에 대한 상념을 나누고 싶은 저임에도 깍둑썰기 하듯 나눠진 삶의 공간과 그림이 너무도 선명해서 되레 부담스럽습니다. 끝내 가족들과 상봉을 하지 못한 채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힌 그였지만 이젠 저 하늘에서 화려한 소달구지를 끌고 있을 거라 믿어봅니다. 그림과 똑같이 행복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죠.


 이중섭 미술관에서 바다 쪽으로 내려가 천지연 폭포 쪽으로 갑니다. 타이밍 조절이 중요합니다. 반드시 밥때를 맞춰서 동반자들을 살짝 배고프게 만든 후 내리막길 거의 끝에 있는 고깃집으로 들어갑니다. 전망이 꽤 좋아 자주 간 것이지 특별히 맛을 보고 갔던 것은 아닙니다. 제주의 신비스러운 경치가 그저 좋았던 입도 초창기에 찾아낸 곳인데 누군가 놀러 오면 습관적으로 찾게 된 식사 장소가 되었습니다. 한번 정해진 나만의 코스는 이상할 정도로 바꾸기 쉽지 않습니다. 타성과 관성에 젖는가 봅니다. 제주에 정착할 심산이라면 자신만의 여행코스를 짜는데 여유를 가지면서도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다행히 지인들은 고기가 맛있다며 감탄을 연발합니다. 역시 여행자들에겐 분위기가 양념이 되는 것일까요, 백돼지를 주문했음에도 '역시 제주 흑돼지는 일품이야' 하며 난리입니다. 그냥 모른 체하면 될 일입니다.


  흑돼지 같은 백돼지로 배가 채워졌으니 천지연 폭포로의 도보는 언제나 여유로웠습니다. 그러나 오랜만에 찾은 이 코스의 주파는 고통스러울 지경입니다. 뒤통수와 배낭이 달구어져 견디기 어렵습니다. 34도에 육박하는 땡볕의 기세에, 그늘을 찾아보기 힘든 나만의 클래식한 코스는 빛이 바랬습니다. 한여름의 혹서기는 피해서 걸어야 고통 없이 감회에 젖을 수 있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래도 공원을 가로질러 폭포 바로 앞에 서니 튀는 물줄기 덕에 잠시나마 더위를 식힐 수 있었습니다. 과거 어르신들의 귀했던 제주여행 사진 중에는 왜 천지연 폭포에서의 '증명'사진이 그리 많았었는지요. 숨겨졌던 비경이나 맛집을 탐방하는 게 요즘 추세라고 하지만 명성은 나름의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남국의 숲 속에 자리한 천지연 폭포의 장쾌함은 지금도 여전했습니다.


 


 폭포를 감상하고 서귀포항 쪽으로 향합니다. 이젠 정말 나무 한 그루도 없는 길을 가야 합니다. 이쯤에서 돌아갈까 생각도 했습니다만, 얼마 전 KBS 제주의 로컬 프로그램인 <보물섬>에 나온 현장을 놓칠 수는 없었습니다. 서귀포 유람선 선착장 부근에서 언덕을 휘감고 올라가는 오른쪽 도로를 건너가면 무성한 풀숲이 있습니다. 나뭇가지들을 헤치고 들어가니 가공하지 않은 듯한 모양의 비석이 보입니다.    


  1933년 이나쯔마 마루호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조난 추도비


 제주에 살면서 처음 들었던 포경업(捕鯨業) 이야기였습니다. 제주에서 포경업이 번성했다는 생경한 내용이라 귀를 쫑긋 세우고 볼륨을 키웠습니다. 포경하면 일본입니다. 그렇습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무차별적인 고래 포획을 위해 이곳 서귀포항을 전진기지로 이용했다는데요, 지금과는 바다 환경이 달랐는지 상당한 수의 고래가 잡혀 항구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당시 고래 해체작업으로 서귀포항의 바다색은 항상 붉은빛을 띠었을 정도라고 하니 얼마나 포경업이 성행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서귀포항에서 출항한 일본의 포경선에는 제주의 선원들도 탑승했다고 하는데요, 비석에 쓰여 있는 이나쯔마 마루호에도 13명의 선원 중 마찬가지로 제주 출신이 있었습니다. 이 포경선은 1933년 11월 행방불명이 되어 탑승 선원 전원이 조난당한 것으로 결론이 나 이렇듯 조난추도지비(遭難追悼之碑)가 세워진 거라고 합니다. 울산의 장생포와 흑산도 등을 고래의 피로 물들였던 일본인들은 아름다운 서귀포 바다마저 죽음의 핏빛으로 바꾸어버린 것입니다. 찻길 옆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기 힘든 풀숲에 제주의 아픈 또 하나의 역사가 서 있었습니다. 다시 손님을 안내할 기회가 있다면 꼭 추가되어야 할 코스입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포경업이 성행할 당시 서귀포항 (연합뉴스 자료)


 비석의 맞은편 시원하게 솟아 있는 새연교에 오릅니다. 서귀포항과 새섬을 연결하는 다리로 야경의 명소이기도 하지요. 서귀포의 새로운 상징이 된 곳인데 지난 2009년에 개통되었으니 제 '클래식' 코스엔 없을 수밖에 없었던 곳입니다. 기가 막힌 풍경으로 다리 건너 새섬까지 둘러볼 수 있는 낭만이 있으니 코스의 종착지로 추가해 마땅하겠습니다. 다리 위 가장 높은 곳에서 보는 제주 바다는 넋을 놓게 만듭니다. 구름과 바다의 음영이 비현실적일 정도입니다. 


새연교의 모습과 다리 위에서 바라본 서귀포 바다의 풍경


 기억을 더듬으며 다시 찾은 예전의 코스엔 더해져야 할 공간들이 존재했습니다, 어디 오늘 찾은 길 뿐일까요. 내가 걸어온 이 길 위에 살았던 사람들, 아프고 슬픈 기억조차 온몸으로 안으며 자리를 지켜왔던 모든 사람들과 그들의 역사를 지켜보았을 땅과 바다와 바위들. 아무리 익숙한 공간이라도 새로운 감성이 덧씌워지는 이유는 무수한 이야기들이 세월과 비례해 그 안에 숨어있기 때문이겠습니다. 항구를 바라보며, 숲을 바라보며 나만의 역사 역시 뚜렷하게 새겨지는 중입니다.


 이중섭 거리, 그와 가족들이 살던 초가집이 다시 그려집니다. 짧은 그의 인생에 있어 분명 가장 반짝이는 시기였겠습니다만 어찌 행복함 뿐이었을까요. 아이들과 게가 그려진 그림에선 기쁜 추억만 담겨있을 리 없습니다. 먹을거리가 부족해 게를 잡을 수밖에 없었던 가장으로서의 죄스러움과 미래가 불투명한 피난생활 속, 붙잡히지 않는 장밋빛 미래에 대한 고뇌가 잊힐 때가 있었을는지요. 그럼에도 그는 결국 아름다움을 이야기합니다. 환한 빛을 그려냅니다. 

 좁디좁은 단칸방에서 더 행복할 앞날을 노래하는 이중섭과 그의 가족이 떠오릅니다.


  조카 이영진이 서귀포 이중섭의 집을 찾았다가 벽에 쓰여 있던 문장을 외워 이중섭 사후에 발표한 시가 있습니다. 지금도 이중섭 가족의 단칸방에 들어가면 그 시를 볼 수 있습니다. 제목은 '소의 말', 가족들에게 한 마리 우직한 소였던 그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다시 옮겨쓰고 싶습니다.


 그토록 자주 걸었던 서귀포 관광코스는 

 참으로 애틋하면서도 따뜻한 공간의 연속이었습니다.  


  

  이중섭과 가족들이 함께 살던 서귀포 초가의 단칸방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 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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