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줄줄줄 쓴 글
항상 내 글*은 "오랜만에 쓰는 글" 로 시작한다.
이 정도면 누군가 나서서 "오랜만"의 정의를 짚어주어야 할 것 같다.
오전에는 에너지가 남아돌아서 그런지, 보통 짜증을 가득담은 글, 냉소적인 글들이 쓰인다.
밤에 쓰인 글들은 온세상에 사랑의 에너지를 뿌리고도 아직도 아쉬움이 남는지 낭만이 철철 흐른다.
(*여기서의 내 글은 온전히 나만 보는 나만의 글이다.)
낮에 앉아서 밤에 쓴 글을 읽다보면 "이 새끼 왜이래, 밤에 취했네." 싶고
밤에 앉아서 낮에 쓴 글을 읽다보면 "인생이 힘들었구나 부엉아..." 하는 생각이 든다.
낮에 쓴 글들만 모아서 낸다면 읽는 사람도 속이 시원해 질텐데.... 내가 대신해서 온갖 욕을 다 적어놓았으니.
밤에 쓴 글들만 모아서 낸다면 '청승맞다' 는 생각이 절로 들 것이다.
언젠간 모아서 낼 수 있겠지..?
그나저나 내 주변 사람들은 글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 정확히 말하면 '글이 보여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내 글은 그런 사람들이 모두 글을 썼으면 하는 바람에서 시작한다.
(새로 나올 매거진 글 좀 써 주세요....)
그래서 합리화일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쓰이는 글*들은 대부분 '아무말대잔치'거나 의식의 흐름대로 간다.
(*여기서 '이렇게 쓰이는 글'은 SNS상에 올리는 글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유명인이 아니라서 이렇게 아무말 대잔치를 하는 것 같다.)
물론 책을 낼 때는 퇴고를 적어도 9번 이상 거친다.
졸다가도 pdf를 보고, 일을 하다가 잠깐 텀이 생기면 수수수수수정.docx을 수수수수수수수수정.docx으로 고치기도 한다.
오늘은 한 번 퇴고 없이 글을 남겨보아야겠다.
갑자기 퇴고없이 이 글을 고대로 발행한다고 생각하니 두려움이 앞선다. 이 거지같은 글을?
어쩌다 보니 글을 쓰는게 직업이 되어가고 있다.
내가 쓴 글들이 이제는 누군가의 말을 통해 보여지고 가공-재가공을 거쳐 다른 누군가들에게 보여지고 있는데
참 신기한 일이다.
누군가가 읽을 글이라고 생각하고 글을 쓰면 그 대상이 발화하고 있는 장면을 자연스럽게 상상하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 작가 분들은 북토크에서 이런 이야기를 자주한다.
"저 이런말 진짜 싫어하는데 그냥 써졌어요.."
"꼭 선배 작가님들이 그런 얘기 하시잖아요, 등장인물들이 머릿속에서 저절로 이렇게 말하고
자신은 그걸 그냥 받아적는것 뿐이라고... 저도 그랬어요."
들을 떄마다 참 어색하고도 어색한 그 말.
이 말이 무엇인지 알게된 때는 내가 아주 짧은 소설을 낸 이후인데.
죽어도 안 써지던 소설이 이승우 작가의 "소설가의 귓속말"을 읽다가 갑자기 줄줄줄 쓰여졌기 때문이다.
물론 따끈따끈한 그 글을 여러번의 퇴고와 수정 끝에 종이책으로 냈긴 하지만
"어떻게 썼나요?" 라고 물어본다면 나는 "그냥 절로 써졌어요." 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제 첫 소설은 저에게 아무말 대잔치 입니다.....그래도 열심히 썼답니다.)
소설이 아니라 매체로 보여지는 글 역시
기승전결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누군가의 입을 통해 발화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참 비슷하다.
대사를 쓰다보면 그 상황들이 대충 그려지기에 나는 줄줄줄 쓰게 된다.
이제 내가 줄줄줄 쓴 글을 책임지기 위해 또 일어나서 걸어야겠다.
글은 줄줄줄 쓰여지더라도 그 글에 대한 책임은 원작자에게 있으니.
그래서 앞으로는 더 치열하고 겸손하게 글을 쓰겠다...... 물론 오늘 이 글만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