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 동굴덕후가 된 이유
똑똑. 브런치를 아주 오랜만에 열어 봅니다.
새하얀 화면을 응시하고, 통증으로 시큰한 두 손을 키보드 위에 얹어놓고 나니 어릴 적 생각이 나요. 흰 종이 위에 자꾸만 뭐든 그리라고 했던 미술 선생님을 얼마나 미워 했던지, 얼마나 그 교실을 뛰쳐 나가고 싶었는지. 어른이 되면 '흰 종이' 공포는 맞닥뜨릴 일이 없겠지 했는데 내 삶은 늘 흰 종이 위에 갈 길 몰라하며 서있는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이 삶을 예민해 보인다고 했고, 불안하다고 했고, 상처가 많아 보인다고 했습니다.
예민하지 않고 대범한 척, 상처는 이미 다 치유되어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살았지만 그 옷이 내 옷이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 그제서야 흰 종이 위에 멀뚱하게 서있는 내 모습을 껴안아줄 수 있게 되었어요. 사람들은 여전히 예민하고 좋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난 괜찮습니다. 안정적으로 흰 종이를 들고 서있을 수 있는 나만의 동굴이 있어 왔거든요.
믿을 만한 친구들과 멘토를 찾아 다니며 나의 고민과 상처를 끄집어 내어 상담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이유. 동굴 덕택이었어요. 덕.택. 동굴이 베풀어준 은혜와 도움.
동굴.
텅 빈, 깊고 어두운 아주 큰 구멍이라 합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터널과는 구별됩니다. 이렇게 정의를 분류하지 않더라도 우린 '동굴'과 '터널'이라는 단어에서 오는 차이를 느낄 수 있죠. 동굴은 자연이고, 터널은 기술입니다. 아래 두 문장을 읽어 보셔요. 느낌이 다르지요?
나는 동굴로 들어갑니다.
나는 터널로 들어갑니다.
모든 남자는 자기만의 동굴을 가지고 있으니, 남자가 동굴에 들어갈 때 절대 그를 건드리지 말라는 이야기를 대학 때 듣고 격분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럼, 여자는요. 맞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동굴을 욕망할 수 있고 그 동굴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누구는 동굴에 벽화를 그릴 것이고, 누구는 동굴에서 겨울잠 같이 깊은 수면에 들어갈 것이에요. 누구는 동굴 천장에서 뚝뚝 떨어지는 지하수의 화학성분을 분석할 것이고, 누구는 그 곳에서 글을 쓸 겁니다. 생명체가 드문 그 곳에서 박쥐나 굴새우 등을 보면 미치게 반가워서 깔깔 거리겠죠. (말이 너무 하고 싶어 박쥐한테 말을 가르치고 있으려나..)
여러분만의 동굴을 갖고 계신가요?
나만의 동굴, 좀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단어로 이야기하자면 나만의 서재, 에 집착하게 된 건 아마 열 다섯 살부터 스물 아홉 살까지 '내 방'을 가져보지 못했던 서러움에 기인합니다. 직업을 기업 연구원으로 가졌던 것도 어쩌면, 1인 연구실이 허용되는 근무환경이 내게 너무 매력적이었기 때문이었어요. 토요일, 일요일에도 연구소에 나가는 나를 보며 '너 미쳤구나' 하는 주변 사람들. 내 방 하나 없는 집에 들어갈 때 더 미쳐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 나만의 동굴은 내 연구실이 있는 직장이었겠습니다.
투룸인 남자친구 집에 들어가 신혼생활을 시작했는데 고작 두 개 있는 방 중 하나를 내 방으로 고집한 것도 '동굴에 집착하는 본성' 때문이었습니다. 유난히 동굴 혹은 자신만의 사적인 공간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 남편은 나의 이 모습을 아주 기이하게 여기더라구요. 결혼하고서야 알았어요. 세상엔 동굴이 필요 없는 사람도 있구나. (Amazing!!)
아무튼, 나는 내가 찾은 동굴에서 나에게 고백하는 수많은 글과 나에게 부치는 셀 수 없는 편지들을 쓰고서야. 그러고서야. 동굴 밖의 세상에서도 멀쩡히 사람들을 만나고, 사람들이 맛있다 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으며, 사람들이 웃기다 하는 것들을 보며 웃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자기 치유의 동굴 여정을 담백한 한 문장으로 쓸 수 있는 내가 되었음을 셀프 축하드립니다. 이너조이)
지인 분의 제안을 받고 두 달 정도 [세상의 모든 동굴](이하 '세모동') 콘텐츠를 기획하고 발행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국가 천연기념물 고수동굴에서 '진정한 쉼을 선사해 주는 해외의 천연동굴'을 조명하며 고수동굴을 홍보, 브랜딩하고 싶다는 취지였지요.
세상의... 모든.. '동굴'이요???!!
일의 제안을 받았던 그 순간은, '나만의 동굴'에서 '세상의 동굴'로 의식이 확장되는 신비로운 찰나였어요. 이전에 계약했던 '소상공인 인터뷰' 일이라든지 '스킨케어샵이나 쿠킹클래스의 콘텐츠 기획'을 돕는 일 등을 맡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감정과 느낌을 받았습니다. (일을 대할 때 '감정'으로 받는 것이 나답다 여겨집니다)
나만의 동굴에서는 이러이러한 일이 벌어지는데, 세상의 동굴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어떤 시선으로 무엇들을 누리는 걸까 궁금해서 덥썩 일을 받아 착수했습니다.
'천연동굴 탐사', '동굴에서의 쉼'을 주제로 세상의 모든 유튜브(ㅋㅋ) 영상들을 섭렵하고 직접 단양 고수동굴에도 다녀오고 나서. 일곱살 된 딸 아이와 나는 동굴 이야기를 하다 잠들고 동굴 이야기를 하며 유치원에 가는 모녀가 되었습니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아이는 동굴 천장에서 뚝뚝 떨어지는 지하수 방울과 고수동굴 박쥐 '아띠'에 대하여. 나는 5억년 동안 자연이 아주 천천히 만들어 낸 광활하고도 기묘한 작품, 예술 같은 동굴 혹은 동굴 같은 예술에 대하여.
빛이 차단된 동굴에 들어가 물길이 만들어 낸 비좁은 공간을 한두 시간 걸으며 동굴 생성물을 본다는 건, 거대한 자연 속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겸손해진다는 뜻입니다. 수억 년의 시간 동안 탄산칼슘이 포함된 지하수 방울들이 아주 느리게 쌓이거나 겹쳐져서 만들어진 종유석과 석순 이야기는, 고작 100년도 채 살지 못하고 본향으로 돌아갈 이 인생을 기억하게 해주었고요. 화살 같이 짧고 빠른 인생을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걸까 생각하는 시간이 되어줍니다.
동굴 밖에서 내 혼을 빼놓을 정도로 분주하고 정신 없는 일상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지만, 동굴이 내게 해주는 다정하고 지혜로운 이야기들을 외면할 수 없었어요.
세계에서 가장 큰 동굴인 베트남 손둥동굴은 지구 속의 지구라 여겨질 만큼 자체적으로 고유한 생태계를 갖추고 있었고 내부에 보잉747 비행기가 날아다닐 수 있는 규모라고 해요. 세계에서 가장 긴 동굴인 미국 매머드동굴은 과거 광산의 흔적, 예배를 드렸던 자리, 옛 사람들이 천장에 남긴 글씨, 세계대전 희생자 기념비가 있어 역사의 산 증거들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동굴이라 하이킹이나 캠핑 코스를 누리며 꽤 오랜 시간 동굴 여가를 보낼 수 있고 말이죠.
콘텐츠를 작성하다 진정으로 반해버린 미국의 루레이 동굴.
미국여행을 계획한다면 무조건 가야겠다고 여행지 리스트에 저장해 놓을 정도로 아름다운 동굴입니다. 석순과 종유석이 특히나 매우 풍성하여 세계 3대 아름다운 동굴로 지정되기도 했고, 여러 아티스트들이 루레이 동굴에 반해 그린 그림들도 있습니다. 루레이를 방문한 한 엔지니어는 동굴을 보고 영감을 얻어 3년간 세계 최대, 유일의 종유관 파이프 오르간을 발명했습니다. 동굴 속의 이 오르간으로 연주한 연주곡이 앨범으로도 나왔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참지 못하는 창작자들. ^^) 심지어 이 동굴에서는 결혼식 행사도 진행된다죠? 내 아이 결혼식은 미국 루레이에서 있으려나요?
https://youtu.be/mun9sWf1s24?si=Nf5_9k-ad9yWcFIm
동굴 콘텐츠를 기획하고 발행하는 일은 역시 나만의 동굴, 서재에서 진행되었는데 일을 하는 내내 기분이 참 신묘합니다. 동굴에서 자기사랑, 자기치유, 자기이해, 자기성찰만 하던 내가 세상의 동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글로 쓰며 놀라워 하고 있다니 말입니다.
사람의 얼굴이, 하늘의 모양이, 천만가지이듯 동굴의 얼굴도, 동굴 안의 이야기도 천만가지. 자연의 물길과 숨결을 느끼며 어둠 속에서 천천히 발을 내딛고 한 눈에 한 손에 다 들어오지도 잡히지도 않는 동굴을 둘러보다 보니, 동굴 밖에 두고 온 일, 사람, 감정과 생각들이 정돈되었습니다. 매트 위의 명상도 참 좋았지만 자연과 직접적으로, 물리적으로 교감하며 걷는 것도 명상의 변형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지요.
몇 년째 우리 가족의 여가생활, 여행계획에 늘 미술관이 포함되어 있었던 걸 기억했어요. 사람은 자신이 익숙한 곳에 당연하듯 발걸음한다고 미술여행에 대한 기대와 기쁨으로 여행을 준비하던 내 모습을 말입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becoming-us
https://brunch.co.kr/@innerjoy0923/172
눈치채셨겠지만 이제 우리 가족의 여가에 '동굴탐험'이 빠질 수 없겠습니다. 엄마가 미술관에 가든, 동굴에 가든, 엄마 좋아하는 건 진심으로 함께 좋아해 주는 사랑스러운 딸 덕분에 나의 덕질은 환대 받고 지지 받으며 더욱 깊어집니다.
여름부터 지금까지 아이 유치원 가방에는 고수동굴 브로셔가 있습니다. 유치원 친구들에게 단양 여행 가기를, 고수동굴 걸어보기를, 작은 입술을 열어 적극 권유하기 위해서랍니다. 일곱 살 아이는 친구들에게 동굴을 뭐라고 설명하고 있을까요? 궁금하지만 꾹 참는, 엄마입니다. ^^
딸 : 엄마, 우리 단양에 또 가야지?
나 : 맞아, 이번에는 좀더 길게 있다가 오자. 지난 번에는 도담삼봉하고 사인암 봤는데 이번에는 다른 단양팔경도 보고.
딸 : 응, 그리고 고수동굴도. 두 번, 세 번 가자.
나 : 두 번, 세 번이나?
딸 : 그 때 너무 짧아서 아쉬웠어.
나 : (마이리얼트립 앱을 열어 단양숙소를 검색한다)
지금, 좀더 색다른 쉼이 필요하다면,
자연과 함께 하는 아티스트 데이트를 원한다면,
천연동굴로 들어가 보세요 :)
https://blog.naver.com/danyang_gosucave
→ Click 하면 동굴 콘텐츠로 이동합니다.
베트남 손둥 동굴 (세계 최대 동굴)
미국 매머드 동굴 (세계 최장 동굴)
미국 루레이 동굴 (세계 최대, 유일 종유관 오르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