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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닥불 Sep 30. 2024

[올레길] 걸으러 떠난 제주, 바다가 찬란하게 반짝였다

올해 여름휴가 땐 혼자서 제주도 올레길을 걸었다. 몇 년째 주기적으로 앓고 있는 ‘산티아고병’을 가라앉히기 위해서였다. 한 번씩 떠올릴 때마다 가고 싶어 미치겠는 내 인생 버킷리스트. 대학 시절 <길 위에 내가 있었다>라는 책을 읽은 뒤부터 산티아고 행을 꿈꾸기 시작했다. 드라마 <하얀거탑>을 쓴 이기원 작가가 순례길 여정을 어찌나 유쾌하고 인간적으로 그려놨는지 생각날 때마다 책을 펼쳐 벌써 서른 번도 더 읽었다.


마음만 먹으면 금방 산티아고에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걷는 연습이 필요하다며 몇 번 미루다가 덜컥 취업을 해버리고 나니 이제는 한 달 이상의 시간을 빼는 게 여의치 않았다. 결국 나는 1년에 두어 번씩 ‘산티아고병’을 앓는 n년차 직장인이 됐고, 올여름에도 슬슬 견디기 힘들어진다 싶을 때 즈음 올레길이라는 대안책을 떠올려냈다. 아름다운 제주 풍경을 바라보며 하루에 몇 시간씩 걸을 생각을 하니 비행기에서부터 꽤 설렜다.

서귀포시 표선 쪽으로 숙소를 잡아 인근 코스부터 공략해 보기로 했다. 등산화 끈을 조이고, 챙 넓은 모자와 등산스틱을 챙기고, 땀에 절어도 상관없는 허드레 티셔츠에 레깅스 반바지를 입고 호텔을 나섰다. 첫 코스를 시작하기 전에 올레패스 앱에서 2만원짜리 모바일 여권도 구매했다. 이 여권으로는 올레길 코스마다 시작점과 중간지점, 종료점에서 스탬프를 찍을 수 있다. 언젠가 모든 코스를 완주하면 '명예의 전당'에 오를 수 있으리라.  


6코스를 역방향으로 걷기로 해 종료점부터 스탬프를 찍고 힘차게 출발했다. 그때의 두근거림이 지금도 생생하다. 앞으로 사흘간 내가 할 일이라고는 올레길을 하루에 한 코스씩 걷는 일밖에 없다는 생각이 엄청난 해방감을 안겨주었다. 매일 생각해 내야 하는 기삿거리도,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회사 카톡도, 내 소중한 어깨와 눈알을 힘들게 하는 노트북도 없다! 혼자서 싱글벙글 웃으며 걷기 시작하니 가슴안에서 누군가 멜로디를 연주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걷는 걸음걸음마다 푸른 바다였다. 무더위에 지칠 때마다 옆을 돌아보면 드넓은 바다가 그 자리에 있었다. 늦여름 강렬한 태양에 비친 파란 바닷물은 찬란하게 반짝거렸다. 매일 본다 해도 도무지 질릴 것 같지가 않았다. 아직 무더운 8월 말이어서인지 올레길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내 발소리와 타닥타닥 등산스틱 소리만 들리는 기나긴 길은 평화로움의 절정이었다. 긴 시간 말없이 걷다 보면 때때로 외로움이 느껴지기도 했으나 그 또한 혼자 걷는 길의 매력이었다. 내겐 며칠의 시간과, 배고프면 뭐라도 사 먹을 수 있는 적당한 돈과, 오래 걸을 수 있는 튼튼한 두 다리가 있다. 무엇이 더 필요할까.


나름대로 만반의 준비를 해서 갔지만 어쩔 수 없이 초보 올레꾼 티가 나긴 했다. 전날 밤에 물을 병째로 너무 오래 얼린 탓에 도무지 녹지를 않았다. 폭염이라 무조건 꽁꽁 얼려야겠다고 생각한 게 잘못이었다. 녹이는 걸 포기하고 새 물을 사려 했으나 걸어도 걸어도 편의점이나 카페가 안 보였다. 목이 타들어갈 것 같을 때 마침내 만난 마을회관 정수기가 어찌나 반갑던지. 서울에선 이런 갈증을 느낄 일이 없으니 이마저도 새롭고 재미있게 느껴졌다. 물론 정수기를 보기 전까진 기능이 지나치게 좋았던 호텔 냉동고를 원망하며 혼자 씩씩거렸지만.

걷다가 지칠 무렵엔 작은 북카페에 들어갔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2층짜리 공간이었다. 시원한 쑥라테를 마시면서 에쿠니 가오리의 <빨간 장화>라는 책을 읽었다. 등산화까지 벗고 선풍기 바람을 쐬며 책 읽는 시간이 정말 달콤했다. 진정한 휴가. 이 시간을 꼭꼭 씹어 내 안에 눌러 담고, 서울에 돌아가 일에 지칠 때 언제든지 꺼내보자고 생각했다. 그런 게 여행의 이유이니까. 우리가 훌쩍 떠나는 의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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