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길 여행 둘째 날에는 취다선 리조트에서 오전 요가 수련을 하고 5코스를 걷기로 계획했다. 아침에 일어날 때 다리가 조금 뻐근한 감은 있었지만 전날 걸은 6코스가 어려운 길이 아니었기에 컨디션이 그럭저럭 괜찮았다. 이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제주의 취다선은 요가 수련, 명상, 다도체험 등을 하는 공간이다. 원하는 클래스를 신청해 들을 수 있고 숙박도 가능하다. 이곳에서 원데이 요가 수련을 꼭 해보고 싶었다. 딱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부터 공간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아예 1박을 해도 괜찮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오전 수업이었던 차크라 다이나믹 수련은 기대보다 만족도가 낮았다. '다이나믹'이라는 단어가 붙어 땀 흘리는 요가를 생각했으나 오히려 정적인 편에 가까웠다. 개운하게 땀을 쫙 빼고 싶던 나와는 잘 맞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주 좋았던 한 순간이 있었다. 중간에 다 같이 커다란 창문 쪽을 바라보면서 나무자세를 유지한 시간이다. 바깥에 펼쳐진 나무와 풀을 바라보며 한 발로 서 있으니 나라는 존재가 자연의 일부라는 게 확 와닿았다. 이러한 녹색 풍경을 바라보며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게 제주에서 요가하는 기쁨 중 하나일 테다.
수련이 끝난 뒤 간단히 미역국을 먹고 본격적으로 걸으러 나섰다. 5코스는 4~5시간 코스로 전날의 6코스보다 약간 길었지만 전혀 급할 게 없었다. 남는 게 시간이고, 하루에 한 코스를 걷는 것 외에 달리 할 일이 없으니까. 힘들면 중간에 마음껏 쉬어간다는 생각으로 부담 없이 걷기 시작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고 바다는 전날보다도 더 반짝거렸다. 이날도 주변에 함께 걷는 올레꾼이 없어 적적하긴 했으나 온종일 새 올레길을 걸을 수 있다는 기대만으로 가슴 벅차게 행복했다.
정말 무더운 날씨였다. 더위에 헉헉거리다 '게리가'라는 카페에 들어갔다. 한국인 아내와 호주인 남편이 운영하는 듯했다. 부부의 젊은 시절 사진이 마치 영화 포스터처럼 걸려있었다. 이곳에서 아이스 카페라떼를 한 잔 마시며 20여분 쉬어가려다 책꽂이에 있던 자연식물식(과일채소식) 책이 흥미로워 한 시간도 더 읽고 나왔다. 가공이나 조리를 거치지 않은 과일, 채소, 곡물 등 자연 상태의 식물성 식품을 섭취해 건강을 지키자는 내용이 핵심이었다. 살이 찌는 것은 우리 몸에 독소가 쌓이기 때문이라는, 사실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글귀에 유독 눈길이 머물렀다.
작년 결혼 이후부터 대책 없이 찐 살 때문에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시기였다. 퇴근 후 남편과 기울이는 술 한 잔의 매력에 빠져 몸 곳곳이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안주 삼아 늦은 시간에 배달음식을 먹는 일도 잦았다. 책을 읽는 내내 식습관을 돌아보고 과일과 채소 섭취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서울에 돌아가면 먹거리를 확 바꾸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3년 전 이맘때 혼자 떠난 속초 여행에서 요가 에세이를 읽고 요가에 깊이 빠져들었는데 그 때와 비슷한 변화의 흐름이 감지됐다. 낯선 곳에서 우연히 접한 책의 힘이 이렇게 강할 때가 있다.
카페에서 나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정오가 지나자 햇빛이 점점 더 뜨거워졌다. 5코스는 그늘 한 점 없는 해안도로가 아주 길게 늘어서 있었다. 반바지 레깅스를 입은 다리가 무방비로 노출돼 따가워지기 시작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계속 걷다 보니 등산양말을 신은 분위부터 서서히 가려움증이 올라왔다. 이렇게까지 뜨거운 해를 장시간 받아본 적이 없다 보니 대처가 필요하다는 걸 그땐 몰랐다. 여기에 더위로 인한 두통까지 서서히 밀려왔다. 그늘 한켠에서 좀 쉬고 싶어도 땡볕에 외길뿐이라 계속해서 걸을 수밖에 없었다.
최고 고비는 바윗길이었다. 바닷가를 따라 크고 작은 바위들이 죽 늘어선 험한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게 정말 사람 다니라는 길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때마다 고개를 들어 확인해 보면 야속하게도 머리 위에 올레길 표시가 떡하니 걸려 있었다. 바위를 밟으며 지나가야 해 다리에 힘이 많이 들어가는 것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돌이 태양열에 달궈져 환장하게 더웠다. 위아래에서 동시에 뿜어대는 열기가 사람을 미치게 했다. 후퇴하자니 이미 너무 멀리 온 뒤여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돌아보면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니었으나 당시엔 끝없게만 느껴졌다. 더 이상 두통을 참기가 힘들다고 느껴질 즈음 눈앞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카페가 보였다.
5코스 중간 스탬프를 찍는 그곳엔 '동백꽃 필 무렵'이라는 카페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넋이 나간 내 표정과 땀에 절은 옷을 본 주인 아주머니가 얼른 선풍기 두 대를 내 앞으로 가져다주셨다. 머리가 깨질 것 같고 구토가 치밀었다. 레몬에이드를 한 잔 주문하고 바로 화장실로 가 찬물 세수를 했다. 자리로 돌아와 열을 식히고 음료를 마시니 살 것 같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맞은편 테이블에 앉아 계시던 손님 아주머니가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8월 말은 너무 더워 올레길 걸을 때가 아니라고 하셨다. 10~11월에 오는 게 좋다면서, 심지어 왜 아가씨 혼자 와 사서 고생을 하냐고 측은한 눈빛을 보냈다.
조금씩 컨디션이 돌아오기 시작한 데다, 무엇보다 두어 시간 만에 사람을 처음 만나 입을 연 것이라 조금 신났다. 인상 푸근한 아주머니와 이런저런 수다를 떨면서 휴식하니 두통이 가라앉고 어느새 다시 생기가 돌았다. 아주머니는 대화 중간에 올레길을 여자 혼자 다니면 위험하다고 재차 강조하셨다. 무서운 순간들이 있던 건 사실이다. 특히 외진 산길에서는 수시로 앞뒤 양옆을 살피며 걸어야 했다. 겁이 많은 나는 첫날 내 배낭 소리에 스스로 화들짝 놀라 돌아보다 헛웃음을 지었다. 숲에서 고양이 두 마리가 지나가는 걸 보고 '헉' 소리를 낸 적도 있다. 그러나 둘째 날엔 더위에 지배당해 무서움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쪄죽겠는 날에 몰래 숨어있다가 사람 덮치면 그 정성도 참 대단한 겁니다" 하고 웃어버렸다.
꿀맛 같은 휴식을 보낸 뒤 다시 길을 나서겠다고 일어섰다. 아주머니가 "아가씨가 혼자 기특하긴 한데, 그래도 그냥 내 차로 가자. 도착 스탬프 찍는 곳까지 데려가 줄게" 하셔서 또 한참을 같이 웃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도 중간중간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경우가 있다던데 어떤 마음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라는 말을, 고작 올레길 걷기 이틀 차였던 내가 하면 웃기려나. 동백꽃 필 무렵에서의 즐거운 휴식을 원동력 삼아 무사히 5코스도 다 걸었다. 하루를 또 혼자서 걸어냈다는 게 커다란 만족감을 줬다. 숙소에 들어와서 샤워를 하고 나니 다리에 붉은 반점이 가득 올라와 있었다. 햇빛 알레르기 증상이라 다음 날엔 레깅스 반바지 대신 긴 바지를 입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