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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닥불 Oct 16. 2024

[올레길] 혼자 걸을 때 무슨 생각하냐고 물으신다면

지난여름 나 홀로 올레길 여행 마지막 날. 4코스 해안도로를 걷다 노란색의 작고 귀여운 카페를 발견했다. 맥심 커피 광고를 찍은 곳이라고 했다. 어릴 적 향수를 자극하는 비디오테이프를 비롯해 각종 레트로 감성의 아이템으로 꾸며져 있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마시고 가방에 챙겨간 책(김하나X김혼비,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을 읽으면서 땀을 식혔다. 손님이 아무도 없던 이곳에 40여분 지나자 카페에 한 젊은 커플이 들어왔다. 남자는 커피를 주문하더니 사장님께 “제주 바다 매일 보면 질리지 않아요?”라고 물었다. 사장님은 “하나도 안 질려요. 매일 다르니까. 오늘은 햇빛이 강해서 윤슬이 유독 반짝반짝 예쁘네요. 내일은 또 다른 모습이겠죠”라고 답했다. 남자는 웃으면서 “사장님은 제주랑 정말 잘 맞는 분인가 보네요” 했다.


사장님의 답을 들으며 나라면 어떨까 생각했다. 긴 해안길 한복판에 있는 작은 카페를 내 취향대로 아기자기하게 꾸며 손님을 받는다. 고개를 들면 창밖으로 드넓은 제주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고, 열 발자국만 나가면 곧바로 바닷바람을 맞을 수 있다. 오래 즐기다 보면 이 풍경도 지루해질까. 익숙해질 수는 있겠으나 질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우리나라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이고, 사장님 말처럼 바다의 모습이 매일 조금씩은 달라질 테니까. 온종일 바다를 보면서 일하는 삶은 어떤 삶일지 궁금했으나 지금의 내 생활과 괴리가 커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현재의 내 삶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사실 올여름 나 홀로 올레길 여행의 목표는 수개월간 머리를 어지럽히던 퇴사 고민을 진지하게 해 보는 거였다. 단 며칠이라도 혼자서 걷다 보면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를 들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순히 지쳐서 잠깐 고비가 온 건지, 아니면 정말로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은 건지. 운이 좋으면 이번 여행에서 어느 순간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올레길 한복판에서 갑자기 누군가의 지령이라도 받은 것처럼 '그래, 퇴사해!' 혹은 '아직 아니니까 좀 더 버텨' 이런 식의 답이 튀어나올 거란 바보 같은 생각. 기대와 달리 올레길을 걷는 사흘간 이 중대한 고민 자체를 별로 떠올리지 못했다.


더위에 찌들어 걷다 보면 생각이 아주 단순해진다. 카페가 언제 나오려나, 이쯤에서 한 번 쉴까, 점심 뭐 먹지, 반주로 막걸리 곁들이면 많이 힘들겠지... 이런 생각 외에는 별로 들지 않는다. 중간중간에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서 퇴사와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해보려 해도 금세 일차원적인 생각으로 돌아가고 만다. 생각이 줄어 머리가 가벼워지는 기분은 꽤 좋았지만 마지막 날까지도 약 한 시간을 점심에 막걸리를 마실 것인지 말 것인지만 고민하고 있는 나 자신이 어이없기도 했다. (막걸리를 마시는 30여분은 행복할 게 분명하나 그 이후에 걷는 시간이 지옥일 게 빤해 결국 마시지 않았다. 점심 메뉴로 고른 두루치기가 생각보다 맛이 없었다는 것도 차라리 다행이었다.)

생각해 보면 대학생 때 산티아고에 다녀왔던 친한 동생이 비슷한 말을 했었다. 산티아고 순례길 걷기가 버킷리스트였던 나는 부러운 마음을 가득 담아 여행이 어땠냐고 흥분조로 물었는데 “언니, 거기 간다고 뭐 대단한 깨달음 얻는 거 아니야. 그냥 ‘너무 힘들다’ ‘오늘 밥 뭐 먹지’ 이런 생각밖에 안 든다니까”라는 답이 돌아왔었다.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걸으면서 정리해 보려던 인생 고민은 결국 그 상태로 멈춰 있고, 걸으면서는 계속 단순한 생각밖에 하지 못한다는 거였다. 당시 나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한 채로 잊어버렸는데 이번에 올레길을 걸으면서 비로소 떠올리고 이해하게 됐다.


제주에서 서울로 돌아온 지 벌써 한 달 반이 흘렀다. 퇴사 고민을 마무리하지 못한 나는 여전히 회사에 속해있다. 지겹다고 생각하면서도 매일 발제를 고민하고, 취재원을 만나고, 기사를 쓴다. 그래도 좋은 건 땀을 뻘뻘 흘리며 올레길을 걸었던 그 사흘의 시간이 마음 한 구석에 든든하게 한 방을 차지하고 있다는 거다. 하루 한 코스씩 꾸역꾸역 걸어 나갔던 혼자만의 시간이 오늘도 나를 버티게 해 준다. 힘들 때마다 잠시 눈을 감으면 가슴이 뻥 뚫릴 만큼 드넓고 아름다웠던 제주도의 푸른 바다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요즘처럼 쌀쌀한 바람이 불 땐 작열하던 태양이 그립기도 하다. 언제 또 제주에 가 올레길을 걸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제주 바다의 이미지가 흐릿해지기 전에 다시 비행기를 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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