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지금 나는 나를 잘 책임지고 있다.
직장인들의 사춘기, 3·6·9 법칙
회사 선배들로부터 자주 들은 이야기로, 직장인들은 3·6·9 주기마다 한 번씩 크게 찾아오는 사춘기의 시기가 있다고 한다. 이 3·6·9 주기의 단위가 연별인지 월별인지 아니면 일별 일지는 모르겠다. 근래부터 지독하리만큼 무기력한 직장생활을 버티고 있는 내겐 그 법칙은 시간별 단위임에 분명하다 여겨졌다. 본디 에너지가 넘치는 활기찬 아이였는데, 정말인지 이러한 생기 없는 자신이 낯설고 버겁고도 벅찰 정도로 말이다.
회사라는 구조와 인간관계로부터 비롯되는 각종 좌절감과 권태감에 시달리다 보니 어느새 나는 보일러실에 걸어 둔 파삭하게 마른 시래기처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자존감의 문제에 의구심이 드려는 찰나 도저히 이렇게는 못 지내겠다는 생각이 들어 메모장을 켰다. 내가 지난 6년간 이 직장생활을 통해 얻은 것들을 나열하고 그로부터금 다시 의욕을 다지기로 마음먹어보았다. 그렇게 채워진 목록이 꼭 나를 위로해줄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간 축적된 직장생활에 대한 경험과 끈기, 조금씩 저금해 둔 통장의 잔고, 몇몇의 프로젝트와 몇몇의 동료들 그리고,, 음,, 보자,, 아마도 아직 피부에 와 닿지는 않지만 더 배우고 내게 스며든 어떤 특정의 가치가 있을 텐데.. 그게 무엇이냐면.. 내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에 계속해서 고민을 이어나갔지만 그럴수록 나는 더욱 스스로에게 의문감만 들고 우울함이 깊어졌다.
회사로 향했던 회의감이 자신의 정면으로 돌아서는 순간, 눈치를 챈 것일까 팀장님께서 웬일로 고기를 사주신다며 나를 불렀다. 고기에 홀린 듯 좇아간 고깃집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팀장님의 진솔한 이야기를 듣고 조금 놀랐다. 그의 이십여 년의 회사생활 중에 지난 5년간의 회사생활이 굉장히 우울했다고. 5년 전에 그는 승진을 하였고 팀장이 되었다. 리더로서의 업무 부담감, 부하직원들의 보내는 거리감, 관리자의 외로움 등등. 하지만 언 듯 이런 생각이 든다고 한다, 나는 그 중압감과 외로움에 지난 5년을 너무도 즐기지 못한 채 보낸 것이 너무도 아쉽다고.
팀장님과의 고민 내용은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지만 그의 이야기로부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나는 지금 당장에 눈에 보이고 손에 쥐고 있는 것만 찾느라 눈이 멀어서 오늘을 잘(well) 못 보내고 있는 게 아닌지 말이다. 나는 그 보상에 대해서 그 크기에 대해서 그 순위에 대해서 집착하고만 있었다. 하지만 그 커다랗고 대단하다는 입이 떡 벌어지는 보상이라는 게 없더라도 나는 바로 오늘을, 지금의 내 삶을 잘 영위해 나가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지당한 몫을 해내고 있는 어른으로서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며 더 즐기는 하루를 보낼 수 있는 바탕이 아닌지.
당장 입에 물고 있는 맛있는 음식이나 손에 쥐어진 반짝이는 장난감이 없다고 나는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채로 무기력한 삶을 지탱하고 있었고, 그런 우울감에 하루하루를 더욱 침체된 채로 보내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이 한 몸 잘 건사하여 이 땅에 두 발 딛고 잘 서 잇는 것으로도 훌륭한 일인데 말이다. 이 거울 앞에 서서 나를 보고 있는 나를 더 소중히 여겨 토닥여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의 나는 나를 잘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다.
손에 쥐고 입에 물고 싶은 보상을 꿈꾼다면, 지금과는 다른 방향으로 질문을 던져보기로 했다. "두 발 딛고 잘 서 있는 스스로를 잘 책임지고 있는 나는 충분히 훌륭하다. 하지만 여기에 얹어 내가 더 맛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지난 시간에 대한 당도에 대해서만 더 해집고 거론하면서 침체되지 말고, 지금이라도 앞으로의 시간에 내가 기대하는 것을 상상하고 몸의 방향을 틀어본다면 조금 다른 일상을 계획하고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은 조금은 희망이 스며든 마무리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웬일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