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빨간우산 Dec 26. 2023

인간이라는 종말

샘 에스마일,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인류 문명의 종말 이후의 삶을 그리는 작품들이 '디스토피아' 혹은 '아포칼립스'라는 이름을 달고 쏟아져 나오던 때가 있었다. CG에 의 영화적 표현의 한계가 무한 확장되면서 SF적 상상력을 발휘하가 좋은 소재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핵무기를 비롯하여 인공지능과 같은 인류를 위협하는 첨단 과학기술의 등장 또한 이러한 상상력을 부추겼다. 대부분은 인류가 개발한 첨단 기술로 인해 인류 스스로 자멸을 초래한다는 발상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어느덧 21세기도 20여 년이 지난 지금, '종말'이라는 소재는 여전히 영화적 소재의 단골 메뉴이지만 '종말 이후의 삶'을 다루던 이전에 비해 지금은 '종말의 과정' 그 자체를 다룬다. 그러니까 예전에 '종말'이라는 것은 언젠가 먼 미래의 일이라는 막연한 상상의 사건으로 취급되었지만, 그래서 종말 이후의 삶이란 어떤 모습일까를 상상하는데 흥미를 두었지만, 요즘엔 '종말'이 더 이상 먼 미래의 일이 아닌, 곧 다가올 문제, 아니 현재진행형의 사건처럼 체험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영화적 소재 또한 종말을 종말 이후가 아닌 눈앞에 닥친 사건으로, 즉 현실의 문제이자 심각한 위협으로 다루고 있다. 그리고 다가오는 종말 앞에 인류가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에 대해 진지한 성찰을 시도한다. (대표적으로는 애덤 맥케이 감독의 <돈 룩 업>이라는 작품이 있다) 종말의 징후를 도처에서 실감할 수 있는 지금에는, 예전처럼 지구를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구해낼 영웅에 의지할 그런 상황이 아닌 것이다. 이제 종말은 판타지가 아닌 현실의 문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종말 앞의 인간을 다룬 영화 <Don't Look Up>


이 영화는 그런 현실적인 문제로서의 종말을 다루고 있는 작품의 연장선 상에 있다고 하겠다. (구체적으로는 지구의 종말보다는 미국의 종말에 초점을 맞추고 있긴 하지만) 그리고 모든 것이 서서히 붕괴되고 있는 종말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상황에서 인물들의 행태는 제각각이다. 하지만 제각각의 방식으로 반응하는 중에도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나약하고 무기력하고 비겁하다. 각자의 반응은 다르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편협한 사고와 감정에 갇혀있다는 면에서 그들은 같다. 예전에 지구 종말을 다루었던 수많은 영화들에서 보여주었던 영웅적, 혹은 시민적, 인간적 포용과 의지와 이들은 전혀 상관이 없다. 이들은 각자의 불안과 분노를 쏟아내면서 서로를 불신하고 경계할 뿐, 어떠한 생산적, 긍정적 상호 협의에도 도달하지 못한 채 무너져 간다. 어쩌면 이것이 종말을 맞이하는 현실의 인간들이 보여주는 실제적인 반응일지도 모르겠다. 영웅은 영화 속에서나, 인간관계의 아름다움은 드라마 속에서나 판타지로 존재한다. 종말을 앞둔 인간들은 그런 판타지로 숨어버리거나 혹은 현실의 괴담에 몰입한다. 그들이 직면하기에 현실은 너무 거대하고 잔인하며 그 앞에 인간은 무력하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스릴러' 장르의 문법을 따른다. 음악은 공포와 불안을 조성하는데 적극적으로 기용되며, 카메라 앵글은 기울어지며 불안을 조성한다. 이 영화에서 삐뚫어지는 앵글은 영상 문법의 시그니처처럼 반복적으로 사용된다. 마치 중력을 잃어버린 공간처럼 어디에도 발을 굳건히 디딜 수 없는 인간의 불안함을 화면으로 드러낸다. 가끔 카메라 앵글은 공중에서, 혹은 우주에서 땅과 지구를 내려다보는 시선을 보여주는데 그런 시선에 비친 인간과 지구는 언제라도 짓밟힐 수 있는 연약한 존재처럼 보인다. 혹은 인류의 문명이 얼마나 시스템에 의존해 있는지를 상징하는 듯도 하다. 그렇게 단단하게 현실을 뒷받침하고 있는 시스템의 존재라는 건, 거꾸로 말해 시스템이 무너질 경우 인간의 현실 또한 일거에 무너질 수 있다는 재앙을 암시한다.


카메라 앵글, 화면 구성, 미장센을 활용한 영상 화법이 뛰어난 영화


영화는 우리의 현실을 떠받치고 있는 시스템이 하나둘씩 더 이상 작동되지 않게 되면서 시작된다. 인터넷과 핸드폰이 작동되지 않으면서 사회 곳곳의 시스템이 무너지고 현실에서는 재난으로 그 문제가 드러난다.(실제로 인터넷과 핸드폰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라. 단지 연락이 안 돼서 답답한 심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물리적으로 온갖 사건 사고가 초래될 것이다) 인물들은 그동안 당연하게 이용하던 온갖 서비스가 불능에 이르고 기본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되자 외부 사회와 완전히 고립된다. 더 이상 작동되지 않는 고립된 현실에 처한 인간들이 제각기 보여주는 행태를 이 영화는 불안하게 따라가며 관찰하듯 보여준다. 인물들은 시스템도 타인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는 불신의 상황 속으로 내몰림으로 인해 극단의 불안을 경험한다. 당연했던 모든 것이 더 이상 당연하게 제공되지 않고, 어떤 것도 통제할 수 없고 기댈 수 없는 상황 속에 갇힌 인간은 그 어떤 동물보다도 나약하고 무력하다. 그렇게 그들이 처한 상황을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관객들은 인물들의 우왕좌왕하는 불신과 불안의 행태들을 보며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현대인들의 밑바닥을 본다. 그렇게 바닥이 난 현대인들의 실체란, 참담하고 불쌍하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긍정하기에는 서로 불신하고, 부정하기에는 각자 연약하며, 비관하기에는 인간적이지만, 낙관하기에는 교활하다. 무엇보다 그들을 마냥 비난하거나 동정할 수만은 없는 것은, 그들이 곧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종말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설정하고 있지만, 사실 이 영화는 종말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종말의 상황이 벌어지는 원인 또한 독특한데 어떤 외부로부터의 공격 또는 재난이 아닌, 내부로부터 스스로 붕괴하는, 이전에는 다루지 않았던 방식을 취한다. (개인적으로는 종말의 원인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싶다. 이 영화에서 설명되는 종말의 원인이 되는 어떤 문제는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 문제 자체가 아닌 그로부터 촉발되는 종말의 과정에서 보여주는 인간들의 행태에 있으며 바로 그것이 종말을 이끌어내는 진정한 원인이다.) 종말의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어떤 큰 재난을 이벤트적으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다만 어떤 종말의 징후로서 드러날 뿐이며, 그렇게 드러난 징후들은 인간들의 불안과 불신을 촉발시키는 매개체로 작용한다. 따라서 이 영화는 종말이 아닌 인간에 관한 영화다. 그때의 인간은 시스템에 기대어 자신의 모습을 잃고 상황에 휩쓸리며 주변 환경과 본능적인 욕망에 휘둘리며 허우적대는 무기력한 인간. 아이는 아이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스스로 독립적이지 못하고 끊임없이 다른 무언가에 기대려 하고 집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이 기대려 하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 안간힘을 친다.(타인에 희망을 걸지만 타인으로부터 도망치려 한다. 시스템에 집착하지만 시스템을 두려워한다) 인간들은 서로를 불신하고 진심을 알려하지 않지만 혼자로 살아갈 의지와 신념은 없다. 그들은 바로 눈앞의 욕망의 대상에 자신의 모든 주의력을 쏟아 넣지만 정작 자신의 본모습과 삶의 진실, 타인의 진심에 대해서는 눈과 귀를 가린다.


이런 아이러니하면서도 무기력한 인간의 모습, 그것이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소시민의 모습이며 결국 시스템에 종속되어 욕망을 좇는 현대인들에게 세계는 저 너머에, 자신의 뒤에 방치되어 있다. 현대인들은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계성을 갖지 못하고, 눈앞의 욕망의 대상을 현실로 삼아 그것에 집착하면서도 만족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도망치려 하지만 도망칠 곳이 어딘지 알지 못한 채 길 잃은 아이처럼 울며 서 있다. 이 영화는 그렇게 각자 울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관찰적으로 기록한, 스릴러의 장르를 빌어 온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미국 사회에 만연한 불안과 불신의 문제를 인간의 심연으로부터, 인간관계의 연약한 고리로부터, 불신과 분노가 확산되는 감정적 근원으로부터, 극단적인 정치사회적 혐오로부터, 그리하여 사회의 밑바닥부터 붕괴되어 가고 있는 과정을 통해 고발하는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대사들 중 가장 기억에 남으면서도 이 영화의 주제 의식 전반을 아우르는 말이 있어 인용해 본다.


인간은 그렇게도 끔찍하지만, 그래도 서로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어


어쩌면 이것은 숙명이다. 인간이 처한 수많은 딜레마 중 하나이자 가장 풀기 어려운 딜레마일 수도. 영화를 보고 나면, 무력하면서도 끔찍한 인간의 실태 앞에 참담한 심정이 되지만 이 모든 것이 나와 너, 우리의 모습이라는 생각에 이르면 영화가 다시 한번 끔찍한 공포로 다가온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동물들(사슴, 홍학)은 경고한다. 인간은 달라져야 한다고. 인간은 거대한 위기 앞에 놓여있다고. 그러니 우리는 종말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아니 그런 거창한 문제가 아니도 진실된 삶, 진실된 나로 살기 위해서라도, 무언가 달라져야만 한다. 그리고 어쩌면 그런 달라짐의 노력조차도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영화 속 사슴은 인간에게 경고를 하는 듯 하다


주제의 시의성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영상 문법과 미학적 면에서도, 무엇보다 서사의 흐름과 인물의 심리적 밀도 면에서 모두 뛰어난 완성도를 보이는 작품이다. 개인적으로는 올해 최고의 해외영화로 꼽아볼 수 있겠다.​




원작: 루만 알람

감독: 샘 에스마일

각본: 샘 에스마일

출연: 줄라이 로버츠, 이선 호크 등


매거진의 이전글 OTT의 습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