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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우산 Aug 17. 2024

손절의 이유

관계의 파괴자, 나르시시즘

관계의 파괴자, 나르시시즘.

제주에 내려온 지도 7년이 다 돼 간다. 꽤 오래 흘렀다. 이렇게 오래 살았으면 '정착'이라고 할 만도 하고 '현지인'이라고 할 만도 하겠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 나는 아직 철저히 외부인이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형성된 인간관계랄 것이 딱히 없기 때문. 그러니까 '관계'가 없다는 건 사회에 속하지 못한다는 얘기이고 그렇다는 건 이곳 사람으로 볼 수는 없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럴까. 왜 그렇긴. 당연하게도 내 괴팍한 성질머리가 첫 번째 이유겠지. 다가오는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아직까지 곁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그게 다일까. 과연 나에게만 문제가 있었던 걸까.


사람들은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으레 남 탓을 하기 마련이다. 나도 사람이므로 으레 하기 마련인 그것을 한번 해보자.


사람들에게 치일 대로 치여 제주에 내려오면서 나는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하나의 원칙을 세우게 됐다. 그것은 '존중'. 인간관계에 중요한 여러 가지 것들이 있겠지만, 결국은 그것으로 수렴한다는 것이 내 오랜 경험의 결론이었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지키기 어려운 그것, 바로 상대에 대한 존중이다.


존중이라는 것은 상대를 치켜세워주는 것도, 우러러보는 시선도 아니며 무조건 동의해주는 공감이나 어려워하는 거리감 같은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냥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을 '한 인간'으로 대해 주는 중립적이고도 담백한 태도이다. 사람을 '한 인간'으로 대한다는 말속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된다. 우선 편견으로 보는 시선을 배제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편견을 유발하는가. 바로 그 사람과 관련된 배경이나 속성 같은 것들이다. 그러니까 학력이나 출신지역, 직업이나 지위, 경제력, 성별, 나이, 외모 따위의 그 사람의 인간성에 본래 속하지 않는 것들. 유난히 한국사회에서 중요시하는 바로 그것들이다. 흔히 그 사람에 붙어있는 딱지라고 하는 것들. 이 딱지들이 아닌 그냥 그 사람을 그 사람 자체로 인정해 주는 것. 그것들에 따라 편견을 가지지 되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간섭하거나 바꾸려들지 않는 태도. 그냥 '이 사람은 이렇구나' 하는 그 정도의 시선. 하지만 인간적인 관심은 잃지 않고 지켜보는. 쉬울 것 같지만 쉽지 않은, 상대에 대한 적절한 선을 지키는 그 일, 바로 '존중'이다.


난 단지 그것 하나만을 보았다. 상대를 존중해 주려 애썼고 그만큼 상대로부터 존중을 바랐다. 행여 어떤 판단과 평가를 하게 된다 하더라도(어찌 그런 생각이 드는 걸 막을 수 있겠나) 최대한 티 내지 않고 또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이나 관계의 질에 반영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내 욕심과 바램을 드러내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거나 불쾌하다는 생각이 들어도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마음으로 넘기곤 했다.


하지만 재미있는 건, 한국사회에서(아마 다른 어느 나라도 마찬가지일 거라 짐작되지만 그래도 특히 한국사회에서) 이런 존중의 선을 보여주면 존중의 태도가 돌아오기보다는 다른 태도로 나를 대하곤 하는데 대개 두 가지 중 하나로 나타난다. 거리를 둔다는 이유로 기분을 상해한다거나(자존심을 상해하곤 한다), 반대로 나를 만만한 사람 혹은 아랫사람으로 본다는 것이다. 대개 존중하는 태도는 예의 있는 행동과 말로 나오게 마련이다 보니 첫째 반응보다는 둘째 반응이 더 많다. 혹은 처음에는 첫째 반응이었다가 둘째 반응으로 옮겨가는 경우도 많다. 어찌 됐건 재밌는 건, 결국 두 번째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이 그랬다. 그렇지 않은 사람을 보기란 어려웠다. (한 두 사람만이 기억난다)


또 재미있는 건, 그들은 자신에 대한 존중을 우월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난 그 사람을 그저 한 인간으로 존중했지, 우러러보지는 않았다) 혹은 나보다 자신이 우월한 무언가를 기어코 찾아내 군림하려 든다는 것이다. 그들이 찾아내는 자신이 더 높다는 기준은 실로 다양했는데, 우선 나이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전에 어떤 직장을 다녔었나 혹은 직위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속물적인 것에서부터 입도 몇 년 차라느니, 유명인 누구누구랑 친하다느니 하는 우스꽝스러운 기준도 남발했다. 심지어 지식수준, 문화적 취향, 정치 성향, 가치관 등등의 명예와 관련된 것들까지 자신의 우월함을 위한 액세서리로 삼았다. (지식이나 명예와 관련된 것들은 대개 좌파를 자처하는 사람들 사이에 나타나는 증상이다. 그들은 자신이 좌파적 성향을 가진다는 것을 우월함의 증거로, 타인을 계몽해야 할 우매한 사람으로 보는 엘리트 의식으로 드러낸다. 특히 운동권 출신 사람이면 - 게다가 간부 경험이 있다면 더더욱 - 엘리트 의식은 지독하리만치 오만했고 그들의 위선은 뿌리가 깊었다. 또 재밌는 건 그런 좌파적 자의식이 과잉된 사람일수록 아무런 정치적 실천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절대 정의에 올려놓은 채 뉴스를 보고 욕을 해대며 남들을 훈계하는 데만 골몰한다. 그들은 남을 내려다보는 선민의식, 특권의식을 위해 좌파를 외쳐댄다. 실로, 요즘 가장 보기가 힘겨운 그런 유형의 꼰대가 아닐까 싶다. 이른바 좌파꼰대. 최근엔 정치성향과 무관하게 자신의 미천한 지식으로 남을 가르치려 드는 지식꼰대도 흔하게 보인다.)


그들은 유치한 것부터 대단해 보이는 것까지 무엇이라도 우월함의 근거가 될만한 것을 찾아 자신을 높은 위치에 올려놓고, 남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그 위에 군림하거나 상대를 통치하고 간섭하고 이용하려 든다. 놀라운 건 이런 경우에 해당하지 않은 사람을 만나보기란 하늘의 별 따기와 같 어렵고도 희박한 일이 되었다는 것이다. 대체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한국사회는 대체 어디까지 찌그러져 가는 걸까.


상대를 존중해 줬을 때 돌아오는 태도가 이런 어린아이 같은 미성숙한 우쭐함이라는 걸 확인하는 일은 안타깝다 못해 참담하다. 처음에는 '이 사람이 왜 이러지' 하는 생각에 뒤로 물러나 좀 더 지켜보기도 했다. 선을 자꾸 넘을 때에는 친해졌다고 생각해서 그런가 싶어 '우리는 아직 그럴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야'라는 메시지를 직, 간접적으로 보내봐도 소용이 없었다. (신기한 건, 정작 정말 친한 사람들은 절대로 선을 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인간관계란 참으로 이상하고도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 선을 자꾸 넘는 일들을 지켜보다가(한 번 선을 넘으면 계속 넘는다) 도저히 수용할 수 없겠다 싶을 때는 관계를 정리하곤 했다. 관계를 정리하는 일은 쉬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를 가진다는 건 쉽게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렇다는 건 시간을 두고 지켜본다는 것이며 그러다 보면 어느 정도 마음이 가까워진다는 얘기다. 마음이 가까워졌으니, 그러니까 나름 정이 들었으니 떼어내기도 쉽지는 않은 것이다. 거꾸로 정이 어느 정도 들었는데도 굳이 떼어내야 했다는 건 그들의 선 넘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말해준다. 떼어내기 싫어 다시 생각해 보고 다시 생각해 본 시간들은 참으로 감내하기 어려운 과정이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다가오는 사람들 대부분의 관계는 그렇게 정리가 되었다. 재밌는 것 또 하나는 밑도 끝도 없이 다가오고 친한 척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런 결말로 끝이 난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그들은 나에게서 어떤 '필요'를 보았던 것 같고, 내가 존중의 태도를 보여주자 그 필요를 너무 빨리 드러낸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신 우월하다는 감각을 느낄 수 있는 대상을 필요로 했으며(실질적인 필요도 물론 당연히 바랬다) 그 필요를 해소하기 위한 관객으로서, 도구로서 자신을 바라봐주길, 자신에게 맞춰주길 바랬던 것이다. 그들은 참 미성숙하고도 얄팍하며 시시했다. 그들의 밑바닥을 보는 건 참으로도 참담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 또한 나의 편견이나 짐작에 불과할 지도 모르겠다. 진실은 항상 저 너머에 있는 것이고, 모두에게는 자신만의 관점이 있고 어떤 판단이든 자신이 느낀 주관적 감정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부른 판단과 오해를 방지하고자 여러 번 생각하고 고민했던 힘겨웠던 시간들을 생각해 보면 그것이 나만의 착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리고 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아도 필요하고 적절한 판단이었다는 확신은 지워지지 않는 걸 보니 진실 한 조각쯤은 붙들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어찌 되었든 후회와 미련은 조금도 없으니 다행한 일이다.


그런 이유로 이곳에서의 생활은, 인간관계는 그렇게 황폐화되었다. 나의 외골수적인 기질도 한 몫했겠지만, 한국사회와 그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 뭔가 벌어지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그 뭔가라는 건, 꽤나 심각한 것이고 우리 인간관계를 갈라놓는 거대한 재앙임은 분명하다.


요즘은 누구나 (남들에 비해) 우월해지고 싶어 하는 나르시시즘의 시대다. 어떻게든 무언가 우월한  것을 찾아내 그것을 뽐내고 싶어 한다.(대게 디지털 상에서 흔하게 하는 일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관계는 찢어지고 갈라지고 파괴된다. 상대의 자랑과 우쭐을 보고 듣는 일은 그다지 유쾌하지도 않을뿐더러 상대와의 친밀한 감정을 깎아낸다. 질투는 부지불식간에 관계에 금을 내는 파괴적인 감정이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저 '이건 아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이건 우리 모두를 위해서 좋지 않다'는 생각만 막연히 들뿐이다. 하지만 그 생각은 입 밖으로 뱉어지지 못하고 마음 속에서만 메아리쳐 다시 되돌아올 뿐이다. 얄팍한 우월함으로 파괴된 인간관계는 나를, 너를, 우리 모두를 파괴한다. 어쩌면 유명 드라마의 대사처럼 이렇게 외쳐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이러다 다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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