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음미하는 맛
요리할 때 조개는 자연이 준 선물과도 같다. 별 걸 넣지 않아도 조개만 넣으면 다 알아서 해주기 때문이다. 손님 초대 요리를 할 때 조개 요리를 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너무 간단하고 쉽고 조리 시간도 짧은데 맛은 정말 실패 없이 끝내주기 때문이다. 홍합 스튜나 봉골레 파스타 같은 것들이 그렇다. 올리브유에 마늘을 볶다가 조개를 넣고 뚜껑 닫고 10분만 끓이면 요리가 완성된다. (면은 나중에 넣으면 된다) 심지어 간을 할 필요도 없다. 조개가 알아서 바다의 짠물을 뱉어내기 때문. 그러니까 적당하게 이미 간이 맞춰져 있는 것이다. 신기할 따름이다.
추석을 맞아서 서양식 말고 한국식 조개 요리를 먹고 싶어 바지락 칼국수를 선택했다. 역시나 조리는 간단하다. 멸치 육수에 마늘과 파를 다져 넣고 물이 끓으면 조개와 호박을 넣고 끓이다 면을 넣으면 요리는 끝난다. 역시나 간은 맞춰져 있다. 감칠맛도 함께. (젓갈을 한 스푼 넣어주면 맛이 더 배가된다) 조개는 정말이지 기특하기 그지없는 재료다.
집에서 바지락 칼국수를 해 먹을 땐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다. 면을 따로 삶아 넣을 것인가 아니면 생면을 그대로 넣을 것인가의 선택인데, 왜냐하면 칼국수 면에 붙어있는 밀가루들 때문이다. 아무리 털어내더라도 그냥 면을 넣으면 남아 있는 밀가루 때문에 국물의 농도가 걸쭉해진다. 거의 울면에 가까운 정도의 농도랄까. 국물보다는 스프에 가까운 느낌이다. 그렇다고 실패는 아니다. 이건 이것대로 매력이 있다. 국물의 농도가 짙다 보니 젓가락보다는 숟가락으로 퍼먹으면 더 편하게 즐길 수 있다. 걸쭉한 국물과 함께 퍼먹는 칼국수라니, 이것도 괜찮다. (깔끔한 국물을 원하면 면을 따로 삶아 넣어주면 된다)
그렇지만 이외에도 바지락 칼국수는 먹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불편을 감수해야만 하는데, 바로 바지락 껍데기 때문이다. 바지락은 자그마한 조개라 꽤 많이 넣어야 맛이 풍부해지는데 그렇다 보니 먹을 때 조개껍질 골라내는게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특히 농도 짙은 울면 스타일의 칼국수를 숟가락으로 퍼먹다 보면 더더욱 그렇다. 숟가락에 자꾸 조개 껍데기가 올라와 앉아 있는 것이다. 게다가 입에서는 빨리 더 넣으라고 아우성인데 조개껍질을 골라내다 보면 그 흐름이 끊기고 만다. 하지만 그렇게 불편을 감수하며 먹다 보면 속도가 적당히 느려지면서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는 순간이 온다. 그렇게 느려진 속도로 먹다 보면 국물의 감칠맛과 조개알의 탱탱함, 면의 쫄깃함과 같이 먹는 김치의 맛까지 섬세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는 '굳이 빨리 먹을 필요는 없잖아'라는 마음이 되면서 천천히 국수와 국물을 즐기게 되는 것이다. 오히려 속도가 빨라지려 하면 조개껍질을 골라내며 마음을 고르게 된다. 그러다 보면 알게 된다. 평소에 음식을 얼마나 허겁지겁 빨리 먹는지를. 음식의 재료와 간의 여러 가지 맛을 음미하지 못하며 식사를 했다는 것을. 이렇게 간단한 요리인 칼국수도 그렇게나 음미할 맛의 양과 질이 다채로운데 말이다. 천천히 먹다 보면 나중에는 후추의 맛까지도 느껴진다. 얼마 전 담근 장아찌가 얼마나 익었는지, 작년에 담근 김치가 얼마나 시큼해졌는지도 가늠하게 된다. 그렇게 조개껍질 덕에 음식을 천천히 즐기고 나면 한 끼 식사가 너무도 만족스럽게 끝나는 것이다. 마치 몇 끼를 먹은 것처럼.
삶도 그렇다. 우린 너무 결과를 향해서만 빨리 달려가려 하고 좋은 것을 더 많이 얻으려 주변을 계속 두리번거린다. 행여나 뭔가 놓칠까 봐 불안해하면서, 나만 뒤처지는 건 아닌지 두려워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뒤돌아보면 그 과정에서 우리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는 걸 알게 된다. 우리가 누리지 못하고 지나가는 것들, 우리가 미처 느끼지 못한 삶의 즐거움들, 순간순간에서 깨달았을 수도 있는 의미들.
'음미'라는 말을 생각해 보게 된다. 음미는 단지 '맛을 느낀다'는 단순한 의미 이상일 것이다. 맛을 느끼는 건 순간이지만 음미는 꽤나 오래 지속되고 풍부하게 얻어지는 경험의 방식이다. 그렇게도 단순한 바지락 칼국수에서도 우리는 조개가 오랫동안 품어온 바다의 감칠맛을 섬세하게 느끼고 상상할 수 있다. 삶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다양한 것들은 모두 그렇지 않을까? 자세히 음미하다 보면 우리는 하나의 세계를 엿볼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