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피해 내려온 제주인만큼, 사람들과의 만남의 자리는 내게 정말로 특별한 이벤트에 속한다. 인간관계를 넓히거나 인맥을 쌓기보다는 오히려 느슨한 관계를 정리하고 너무 쉽게 친해지는 경향을 경계하는 폐쇄적인 나에게도 인간관계는 중요해서(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 중요한 것일지도), 어쩌다 누군가와 만남을 가지게 되는 날이면 꽤 공들여 식사를 준비하곤 한다. 가볍게 친해지지는 못할지라도 한번 마음을 열면 최선을 다해 상대에게 정성을 다하는데 그 정성을 표시하는 방법이 나에게는 직접 만든 요리로 식사를 대접하는 일이다. 그렇게 식사 자리를 가지는 일은 자주는 아니어도 가끔씩 찾아오는데 그런 '가끔'도 이제는 꽤 오래되어 이른바 '파티 요리'에 내놓은 음식의 리스트가 나름 축적되어 있다.
파티 요리 리스트에 오르는 음식들이란 단지 맛있어야 한다는 것 이외에 여러 가지 조건이 따르는데, 가령 비주얼적으로도 훌륭해야 하며(음식을 내놓는 순간 '우와~'하는 탄성이 나올만한), 조리하기가 간편해야 하고(아무리 맛나고 화려한 음식도 기다림의 시간이 길면 맥이 빠지고 만다), 이왕이면 술과 곁들이기에 좋고(대개는 와인과 함께), 먹기가 불편하지 않아야 하며(먹는 모습을 신경 쓰다 보면 맛을 잃는다), 너무 호불호를 타는 음식이어도 안된다.(요즘에는 취향이 다들 제각각 이어서 불호라도 돼버리는 경우에는 대접받는 사람도 대접하는 사람도 서로 난감해지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외에도 채식을 한다거나 특정 재료에 대한 개인적인 민감도가 있을 수 있지만 이런 것까지 다 고려할 수는 없다) 막상 글로 써 나열해 보니 조건들이 꽤 까다로운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호불호 없이 좋아할 만한 쉬운 요리는 생각보다 많은데, 우선 신선한 고기와 해산물이 들어가면 웬만하면 호불호 없이 맛있는 음식이 된다. 거기에 TV프로그램이나 유튜브에서 추천하는 소스 레시피를 활용하면 이른바 맛이 없기 힘든 음식이 된다. (상대가 채식을 하는 경우는 쉽지 않은데, 이런 경우도 몇 번 있어서 맛있는 채식 파티 요리 아이템도 몇 개 준비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고기와 해산물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 좋다. 특히 좋은 부위의 신선한 고기라면 기본 이상은 해결된다) 그래서 고기나 해산물을 활용하되 일상의 밥상에서 흔하게 쓰지 않는 재료나 소스를 이용하고, 한식보다는 서양식을 내놓으면 근사한 파티 요리가 된다. 낯선 이름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더더욱 환호를 받는다. (가령 '뵈프 부르기뇽'이라던가, '굴라쉬'라던가..)
하지만 몇 가지 파티 요리 리스트로 몇 년을 버텨오다 보니 그것도 이제 슬슬 지겨워진다. 물론, 상대는 매번 바뀌니까 똑같은 걸 계속해도 되지만, 파티를 준비하는 나 또한 그 요리의 시식자이다 보니 내가 지겨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가끔씩 TV프로그램을 보면서도 어떤 특별해 보이는 음식이 나오면 주의 깊게 보곤 한다. (요즘은 TV만 틀면 먹방이지 않은가) 최근에는 <언니네 산지직송>이라는 예능을 즐겨 보는데 얼마 전 염정아 씨가 선보인 와인 등갈비가 눈에 확 들어온다. '그래, 저거야'라는 마음속 외침과 함께 테스트 삼아 연휴에 해보았다.(아무리 쉬운 요리라도 먼저 테스트해서 먹어보는 과정은 필수다. 레시피가 쉽더라도 결국 조리환경과 준비해야 하는 양이 다르므로 간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한 번 이상은 해봐야 한다) 결과는 대 성공. 이제는 요리도 꽤 오랜 경력이 되어서 웬만한 레시피는 대충 보고 해보아도 맛이 난다. 게다가 요즘 유튜브나 블로그에 얼마나 계량이 잘 되어 있는가. 따라 하기만 하면 된다. 좋은 세상이다.
요리를 하다 보면 결국 요리의 핵심은 밸런스와 간이란 걸 알게 되는데, 이때 밸런스는 재료 간 궁합에 의해 많이 결정된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극강의 궁합을 자랑하는 정답의 재료 조합이 있기 마련이다. 이 요리를 하며 확신하게 된 궁합은 바로 와인-고기-버터다. 프랑스에서 가장 맛있는 소고기 요리라고 알려진 '뵈프 부르기뇽'(소고기를 와인에 오래 끓인 요리)이 대표적인데, 돼지고기와 레드와인과의 조합 또한 상당하다. 여기에 버터가 더해지면 풍미는 작렬한다. (소고기-와인 조합인 뵈프 부르기뇽에는 버터를 넣지 않아도 되는데 소고기 특유의 육향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돼지고기에는 버터를 넣는 것이 아무래도 좋다) 그리고 맛에 있어서 호불호 없이 입에 착 감기게 하려면 역시 설탕이 추가되어야 한다. 대개 입에 넣자마자 '맛있다!'는 탄성이 나오려면 아무래도 단맛과 짠맛, 감칠맛, 기름진 맛 중 2가지 이상은 극대화시켜야 한다. 그리고 대개는 이 모두를 적당히, 혹은 조금 과하게 높여주면 좋다. 뵈프 부르기뇽이나 와인 등갈비도 이 4가지가 적절히 섞인 밸런스가 훌륭한 음식이다. 특히 돼지고기 등갈비의 경우에는 단맛을 조금 더 높여주는 것이 좋다. 돼지고기와 단맛의 조합 또한 불패의 궁합인데 우리가 먹는 돼지고기 음식들을 떠올려 보면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는 제육볶음이 돼지기름 + 단맛이 기본 베이스가 되다. 여기에 짠맛을 높여주는 간장이나 고추장이 들어가면 입에 착착 붙는 맛이 된다. 와인 등갈비의 경우에는 소금을 생각보다 꽤! 넣어주는 것이 좋다. 이제는 모두가 알지 않는가. 단맛과 짠맛은 서로를 상승시켜 준다는 것을. '단짠단짠'이라는 말을 괜히 하는게 아니다. (심지어 아이스크림에 소금 뿌려 먹으면 단맛이 더 극대화된다) 단맛도 그냥 설탕만 넣기보다는 다른 종류의 단맛을 섞어주면 좋은데 대표적으로는 꿀이나 물엿 등이 있다. TV에서는 주로 물엿을 쓰지만 나는 '조청'을 쓴다. 조청은 물엿의 단순한 단맛이 아닌 엿에 가까운 풍부한 단맛이 나고 이 단맛은 입안을 더욱 풍성한 달콤함으로 만들어준다. <언니네 산지직송>에서 염정아 씨는 '오가피 조청'을 넣었지만 꼭 오가피여야 할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로 프로그램에서는 레드 와인 외에 복분자 추출액을 더 넣었지만 이는 고창의 특산물을 소개하기 위함이지 역시 꼭 필요한 재료는 아니다. 레드 와인만 넣어도 진한 포도의 맛이 충분히 올라온다.
레드와인 소스를 등갈비와 함께 조려 끈적하게 적셔 먹으면 맛이 일품이다. 먹자마자 '우와~'하는 탄성이 터진다. 이 탄성의 원천은 역시 와인에 있다. 예를 들어 등갈비를 고추장 소스에 조려도 맛있겠지만 그건 너무 익숙한 맛인 것이다. 아무리 맛있어도 익숙한 맛이 날 때는 웬만해서는 탄성이 잘 나오지 않는다. 인간이란 무엇이든 익숙한 것보다는 새로운 것을 경험했을 때 더 크게 반응하기 마련이다.(그래서 낯선 곳으로 여행을 가는 것 아닌가) 와인+고기 조합의 요리가 파티 요리로 적당한 이유는 바로 그 낯선 조합에 있다. 와인에 조린 고기 요리란 한국사회에서 흔하게 접하는 요리이지는 않은 것이다. 게다가 비주얼도 훌륭하다. 색깔 때문에 더더욱.(와인의 고급스러운 보랏빛이라니!) 등갈비 또한 그 비주얼에 큰 몫을 한다. 와인으로 한 요리이므로 와인에 어울린다는 점은 덤으로 따라오는 파티 요리로서의 장점이다. 아, 조리하기 간편하다는 것도 큰 몫을 한다. 웬만한 서양 요리는 대개 조리가 간편한데(한식처럼 복잡한 요리가 있을까), 등갈비를 수육 하듯이 끓이다가 레시피대로 정량한 소스에 넣고 10~20분 조려주면 그만이다. 정말 쉽다
하지만 이 요리의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모든 요리가 꼭 1~2가지는 단점이 있기 마련인데(파티 요리로서), 이 요리의 단점은 2가지, 먹기가 불편하고 양이 적다는 점이다. 우선 등갈비는 칼로 썰어먹을 수 있는 요리가 아니다. 뼈를 손으로 잡고 뜯어야 하는데 이 뜯는 고기 요리만의 맛이 있긴 하지만 나름 교양을 차려야 하는 파티 자리에서는 손님에게 꽤 크게 신경 쓰이는 요인이 될 수 있다. 게다가 뼈가 있어 보기엔 근사해도 양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도 난감한데 뼈에 붙은 살점이 아무리 맛있다 해도 등갈비에서 나오는 살의 양은 적어도 너무 적다. 게다가 등갈비는 가격도 비싼 재료이지 않은가. 비싼데 양은 적으니 상당히 아쉽다. 그래서 다음에는 그냥 돼지갈비로 대체해서 해보려 한다. 토막으로 판매하는 돼지 생갈비가 등갈비보다 가격이 싸고 살도 많다. 게다가 같은 갈비이니 맛도 비슷할 것이다. 다만 요리를 내놓았을 때의 비주얼이 아쉬울 수 있겠지만 역시나 비주얼보다는 양과 가성비가 나에겐 더 중요하다.
요리를 먹고 한참이 흘렀는데도 아직도 입에서 맛이 맴돈다. 조만간 또 테스트를 해봐야겠다. 새로운 요리를 시도해서 만족스러운 맛을 얻었을 때의 기쁨이란, 일상의 큰 전환이 된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다르게 사는 느낌이랄까. 역시나 요리는 삶과 비슷하고 삶은 요리와 비슷하다. 오늘도 요리와 더불어 삶을 새롭게 산다는 느낌을 한 웅큼 가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