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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인간의 우스꽝스러운 분투

다니엘 콴 & 다니엘 샤이너트,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by 빨간우산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렇게 살고 있지는 않았을 텐데..."


우린, 때론 이런 생각들을 한다. 누구나 한 번쯤 할 만한 흔한 생각의 패턴이지만, 이런 생각에는 중의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앞 구절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선택이 우리의 인생을 만든다', 그래서 선택은 중요하고 신중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을 수도 있지만, 뒷 구절에 의미를 둔다면 그런 선택으로 인한 지금의 삶이 그만큼 만족스럽지 않다는 뜻일 수도 있다. 어쩌면 지금의 삶에 대한 불만으로, 지금의 삶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우리는 이런 생각을 떠올리게 되는 건 아닐까.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니까 그때 그 선택이 아닌, 다른 선택을 했었더라면 정말로 이 모든 게 달라졌을까? 나는 만족스럽게,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까. 그런데 만약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서 행불행이 그렇게 쉽게 갈리는 것이라면, 그래서 불행한 삶을 선택했을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행복한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어야 할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적어도 50%는), 행복에 겨운 삶을 누리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우리는 왜 항상 행복하지 못하고 대부분 힘겹고 버거운 삶을 살고 있는가? 그때 그 선택을 달리 했더라도 말이다.


물론, 다른 선택을 했었다면 다른 삶을 살고 있겠지.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수천, 수만의 멀티버스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 수많은 다른 삶에서도 삶은 여전히 외롭고 힘들고 힘겨운 싸움의 연속이다. 다만 겉으로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느냐 아니냐만 다를 뿐.


그 모든 것에서도(everything), 그 어디에서도(everwhere), 모두 한결같이(all at once), 우리의 마음속 우주는 똑같이 복잡하고 혼란스럽고 치열하다.



그리고 그 치열함 속에 우리의 마음은 항상 상처 투성이인 채로, 두려움과 외로움에 떨고 있다. 그 수천, 수만의 멀티버스라 해도 모두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 영화에서 말하듯, 인간은 작고 어리석고, 우리의 우주는 혼돈으로 치닫는다. 갈등과 싸움이 멈추지 않는 전쟁터처럼.


그렇다면, 그토록 작고 어리석은 인간으로 태어나, 이토록 혼돈에 찬 우주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매 순간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하는 것일까. 현실에서의 선택의 경우의 수는 그토록 많지만, 의외로 (어리석은) 인간이 마음속에서 내리는 선택은 단순하게도 둘 중 하나로 수렴된다.


사랑이냐, 두려움이냐.



우리의 삶은 우주처럼 복잡하고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멀티버스는 무한할지 모르지만, 결국 우리의 마음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아주아주 애석하게도, 우리는 대부분의 선택에 있어서 사랑보다는 두려움을 택하고 만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왜 인간은 어리석으며, 우리의 우주는, 삶은 한결같이 전쟁터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세상을 혼돈으로 몰아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인간은 차라리 돌이 되어 가만히라도 있어야 할 일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달리 또 하나의 하이라이트는 엄마와 딸이 돌이 되어 나누는 대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 영화는 영화이므로, 그리고 영화는 희망을 주어야 하므로,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삶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 너무도 안쓰러워지므로, 그 모든 혼돈과 전쟁을 치르던 주인공(그래서 그 주인공의 역할은 '엄마'다)은 결국, 사랑을 선택한다. 사랑을 선택한, 사랑이라는 이름의 무기로 그 혼돈과 싸우는 주인공의 마지막 전투신은 그래서 우스꽝스럽지만 위대하다. 그 전투의 모습은 짠하도록 우스꽝스럽지만 그 우스꽝스럽고 처절한 몸짓들은 이상한 울림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왜일까? 전투신의 겉모습은 그토록 짠하고 우스꽝스럽고도 처절하지만, 그 모습이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혼돈과 처절함 속에서도, 그 모든 각자의 두려움과 상처와 폭력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선택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대한가를 우리는 내심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주인공을 응원하듯, 우리 자신을 응원하게 되는 마음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는 현실의 혼돈으로 시작하여, 멀티버스의 수많은 혼돈의 갈등과 투쟁을 내내 거친다. 그리고 우주의 붕괴를 막아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긴박한 순간들에서도, 그들의 분투하는 모습과 싸움의 광경은 (영화에서 적극적으로 연출되듯) 시종일관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 자칫하면 우주가 붕괴할지도 모르는데도, 그 속의 인물들은 그토록 치열하고 진지한데도,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는 우리는 그 긴박함 속으로 몰입되기보다는, 그 우스꽝스러움때문에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그리고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된다. 우주의 붕괴를 막겠다는 영웅들의 치열함에 이렇게 웃어도 되는가, 그건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하는 마음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관람의 태도는 영화가 원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분투는 실소를 금할 수 없을 만큼 우스꽝스러우니 마음껏 비웃어도 좋도록, 우리의 마음을 무장해제한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우리는 웃을 수만은 없는 진실에 도착하게 된다. 그런 우스꽝스럽고 거추장스러운 그들의 분투가 곧 우리의 분투임을, 우리도 그렇게 우스꽝스럽고 짠하게 각자의 싸움을 해 나가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멀티버스를 넘나드는 그 모든 번잡함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하고자 하는 말은 아주 단순하다.


그러니, 서로에게 다정할 것. (Be Kind). 그리고 두려움과 허무보다 사랑을 선택할 것.



하지만, 언어로는, 영화로는 이렇게도 단순한 권유가 현실에서는 그토록 이뤄내기 어렵고 힘겹기만 하다. 그래서 우리는 대개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두려움과 허무에 쉽게 우리의 선택을 내어주고 만다. 그리고는 다시 또 그 선택을 후회한다. 그러니 얼마나 어리석은가 인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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