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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dioholic Dec 23. 2024

오늘도 검도복을 빨았다

나를 정화시키는 시간

주말 아침에 일어나면 습관적으로 빨래를 한다. 세수를 하고 나오는 길에 세탁실로 가서 세탁기에 빨래를 넣고 돌리는 과정은  주말 루틴이 되었다. 탈수까지 마친 빨래를 아침 볕으로 가득 찬 베란다 빨래 건조대에 널어놓을 때의 기분 좋은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나의 이 유쾌한 루틴을 위해서라도 주말 아침은 반드시 맑아야만 한다. 특히 나를 가장 흐뭇하게 하는 건 한 주 동안 입은 검도복과 면수건들 위로 햇빛이 뽀얗게 내려앉은 장면이다.


얘들아... 뽀송하게 마르렴^^


검도라는 운동을 약 20년 넘게 해 온 입장에서 확신하는 게 있다. 검도 인구가 늘지 않는 데에는 다양한 이유가 존재하지만,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바로 '냄새'라는 것. 운동 후 땀에 젖은 도복을 며칠 동안 빨지 않고 다시 입고 말리면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그 냄새는 입는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그 냄새를 맡는 입장에선 상당 악취로 다가오게 된다. 특히나 청결하고 쾌적한 환경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쉰내 풍기는 도복을 입은 들과 같이 몸을 부대끼며 운동을 하고 싶을 리 만무하다. 검도가 유독 여성 인구가 적은 것엔 분명 이러한 요인이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검도가 소위 '예'를 중요시하는 운동이다 보니, 도복에 대해서도 아주 보수적인 편이다. 도복을 개는 법이 매뉴얼화되어 있고 그렇게 도복을 정성스레 관리했을 때 나오는, 마치 군복과 같은 '칼각'이 주는 멋도 무시할 수가 없다. 도복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물이 빠졌는지, 도복 하의 주름이 얼마나 정갈하게 각이 잡혔는지 등은 상대의 검력을 평가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므로 도복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



참 쉽죠...?ㅡㅡ;;;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관리를 하려면 들어가는 수고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우리가 '만번 도복'이라 통칭하는 고급 도복은 일단 비싸고 세탁하는 방법 너무 어렵다.(첫 세탁은 손빨래가 국룰!) 짙은 염료 때문에 만 번 도복을 입고나면 온몸이 스머프가 되고, 손세탁하다가 욕조가 파랗게 물들어 와이프에게 등짝 스매싱을 맞은 사람들이라면 이 고난의 과정을 안다. 또한 세탁 후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값싼 도복을 입느니만 못한 행색이 나오다 보니 사람들은 결국 도복 세탁을 자주 하지 않쉬운 길을 택하게 된다. 문제는 고급 도복뿐 아니라 저가 도복을 입는 사람들까지도 도복을 빨지 않는 걸 당연히 여기는 분위기에 적응해 버리고 만다는 것. 검도장에 들어갔을 때 나는 그 특유의 콤콤한 냄새의 주요 원인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였는지, 보수적인 검도계에서도 도복을 모셔야 하는 대상이 아닌, 그저 가볍게 입는 스포츠 웨어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내가 그렇다) 기존의 무겁고 잘 마르지 않는 면 소재 대신 가볍고 잘 마르는 합성섬유 재질의 기능성 도복이 나오면서 입고 나면 그냥 세탁기로 빨고 바로 말릴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비록 고급 도복 특유의 '뽀대'는 나오지 않더라도, 관리의 피곤함에서 벗어나 자주 세탁하고 상쾌하게 운동할 수 있다는 장점을 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난 실제로 도복 하의의 주름을 아예 박음질하여 나온 기능성 도복을 보고 주저 없이 구입해서 입고 있다. 그 주름을 잡기 위해 운동 후 매일 쭈그려 앉아 마치 휴가 나가기 전 군복 다리듯 심혈을 기울여 도복을 개던 수고를 안 해도 되니까. 사용이 편리해지면 그만큼 더 자주 쓰게 된다는 것을, 요즘 나오는 기능성 도복이 잘 보여주는 셈이다.




일주일 동안 입었던 도복들을 세탁하고 널어놓은 뒤 뽀송하게 말라가는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한 주 동안 내 몸에서 배출된 스트레스의 찌꺼기와 몸 안의 독소들이 씻겨 내려가고 햇볕에 증발되는 것 같은 정화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 느낌이 좋아서 도복만큼은 와이프가 아닌 내가 세탁을 한다.(물론... 땀에  도복 냄새를 노출하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다) 이번 주에 다시 저 뽀송해진 도복을 입고 면수건을 머리에 두르며 운동을 할 생각을 하니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검도가 너무 엄숙하고 보수적이 아닌, 젊은이들도 쾌적한 환경에서 마음 편히 즐기는 운동이라는 이미지가 생기기 위한 첫걸음 중 하나가 바로 도복 세탁이라는 내 신념엔 변함이 없다. 그러니 지금도 열심히 도장에서 땀 흘려 운동하고 있는 내 또래의 검도 아재들! 우리 이제 어느 정도 돈도 벌고 있으니 도복 몇 벌 더 사서 자주 갈아입읍시다.  평소 아재 냄새 감추기 위해 향수와 화장품에 들이는 돈과 수고보다 훨씬 덜 할 테니까요^^


내 정화의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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